[칼을 든 스님] 나라 존망의 보루 산성山城

포토에세이 | 그 안의 중심, 승군

2022-03-29     유동영
금성산성 보국문

임진왜란 격전지이자 승군이 활약했던 산성 아홉 곳을 찾았다. 동래성과 진주성을 산성으로 부르지는 않으나, 동래성 안에는 마안산 그리고 진주성 안에는 월영산이 있어서 형세는 산성과 같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준비한 회령진성 또한 동쪽에 절벽을 둔 나지막한 산을 둘러서 쌓은 해안 성곽이다. 이렇듯 입지 조건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각각의 성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승군, 즉 스님들이다. 스님들이 첫 참전을 한 동래성 전투 등은 역사적 기록으로 전해오고, 진주성·금성산성·독산성 등에는 지금도 여전히 성안에 절이 있다.  

 

동래성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적 3만이 동래성을 에워쌌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모은 병사는 약 3,400명이었다. 그중에는 범어사와 국청사의 의승수군 100여 명도 있었다. 왜적은 남문 성밖에 팻말을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송상현이 답을 보냈다.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왜적의 총은 화살보다 빨랐고, 무수한 칼과 창은 줄지 않았다.

 

동래성

먼저 동문이 뚫렸다. 수없는 주검들을 짓밟으며 다가서는 왜적의 칼이 송상현을 향하고 있었다. “고립된 성을 적들이 에워싸니, 아군의 구원이 끊겼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여,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혜를 가벼이 하고 맙니다.” 그가 죽기 전 사용하던 부채에 적어 아버지에게 남긴 시다. 이 전투로 조선군과 백성 5,000여 명이 전사했고, 왜적은 500여 명의 사상자만 있을 뿐이었다. 

 

진주성. 1차 대첩의 패배를 설욕하려는 조선의 모든 왜적 9만 2,000여 명이 진주성을 에워쌌고, 성안 3만 명의 조선인은 왜적과 죽음 앞에서도 결연했다. 그 스러진 혼들은 오늘의 나라를 세웠다. 

 

호국사 
호국사
진주성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의승장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세력이 더욱 커져 사기가 배나 됐다. 일시에 함께 어울려 적을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났다.” 『난중잡록』의 진주성 전투 묘사에 나오는 신열 스님 부분이다. 1차 진주성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성안의 병사 3,800명으로 3만여 왜적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다. 지금까지도 진주성 동편에 월영산 호국사가 남아 있어서 왜란 당시의 승군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행주산성

이치전투, 독산성 전투 등에서 처영 스님은 권율 장군과 함께 전공을 올린다. 처영 스님이 이끄는 의승군은 행주산성의 가장 취약 구역인 서북 능선에 배치됐다. 처영 스님의 제자인 해안 스님은 당시 행주산성 상태를 ‘한낱 가시덤불로 둘러진 울타리와 같이 허술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이후로도 권율 장군은 처영 스님에게 남원 교룡산성 수축 등의 요청을 했고 스님은 무난하게 완성한다. 정유재란 무렵에는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부채와 짚신 등을 선물하며 전황이나 원균과 관계한 것 등을 이야기한다. 사진의 좌측에 솟은 산은 북한산이다. 

 

파사성

유성룡은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성을 구상하면서 오산의 독산성과 더불어 여주의 파사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의엄 스님이 수축했다고 전하나, 왕조실록에는 1595년부터 기록이 나온다. 파사성은 그 풍광이 좋아 물길을 따라 이동하던 선비들의 주요 관광지이기도 했다. 이색을 비롯한 유성룡 등 여러 유자가 시를 남겼다. 유성룡은 특히 성을 쌓은 의엄 스님에게 시를 남겼다. ‘백만의 금강역사들이 받드니, 긴 칼 옆에 차고 누대에 올라 휘파람을 부네.’ 

 

석주관성 아래 섬진강 변

 

금성산성

금성산성은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더불어 호남의 삼처산성으로 불리기는 하나, 그 위치로나 복원 정도 및 조망으로 볼 때 다른 두 성에 비해 산성으로써 단연 으뜸이다. 산성의 총길이는 6km가 넘고 그 거리를 한 바퀴 도는 시간만도 약 5시간이 걸린다. 왜란 이후로는 삼남의 많은 산성이 그 기능을 잃어 성곽조차 관리되지 않았지만, 금성산성만큼은 전략적 가치가 커 갑오농민전쟁 직전인 1892년까지 성을 관리하는 별장을 뒀다. 지금은 동자암이 성을 지킨다.

동자암
입암산성

한 가지 묘한 일은 정유재란 때 금성산성 전투가 문헌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이던 1593년에 정철은 선조에게 다음 난을 준비해 금성산성의 보수를 건의한다. 그해 12월에 이성임의 감독 아래 고쳐 쌓았다. 이렇듯 닥쳐올 난을 대비해 수축한 성이었는데, 바로 옆 추월산 보리암 바위 자락에서는 왜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김덕령의 처가 투신을 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담양·장성 등, 가는 곳곳에서 만행을 저지르며 전주까지 점령했다. 어느 왜장이 금성산성을 두고 “만약 조선이 이 성을 고수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1597년 금성산성의 상황이 더 궁금해진다.

금성산성의 처절한 부침은 갑오농민전쟁 때 극에 달한다. 동학도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성내 30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탔으며,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된다. 조선왕조 내내 건재했던 금성산성이 무너지자 조선도 막을 내렸다. 모든 것이 타버리는 와중에도 성의 수호 사찰인 보국사는 다시 일어났는지 6.25 전쟁 때야 비로소 폐사된다.

금성산성에서 승용차로 약 40여 분 거리에 있는 입암산성 또한 1593년, 사명대사의 제자 법견 스님이 수축했다. 입암산성 안에도 안국사 터가 남아 있고, 또한 정유재란 때 목숨을 잃은 의병장 윤진을 기리는 비가 있다. 터는 부드럽고 편안해서 금방이라도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만하다. 

 

남도 바다 곳곳이 이순신 장군 이야기를 전한다. 성안의 커다란 느티나무는 이순신 장군 사후 250년에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심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를 거느리고 명량을 향해 나섰던 회령진성.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