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불교여성운동의 선구자, 우봉운

2022-02-28     김남수

우리는 긴긴 편지 뒤에 
결혼하였다. 그러다가 
그분은 합병 이전 이갑, 
안창호,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 등 38인이 한꺼번에 
잡히었던 중대 사건에 
관계하고서 해외에 뛰어 버렸다. 
그분은 지금 금강산에 들어가 
속세를 버리고 수도승이 
돼 있는 중인데 아무튼 그 사진 
일을 생각하면 지금조차 
웃음을 참을 수 없다.  
- 「삼천리」 제9호, 1930년

우봉운

우봉운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사진은 연애편지를 하면서 받은 훗날 남편이 된 기태진의 사진 한 장이었다. 우봉운은 김원주, 나혜석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자유연애의 1세대다. 일제 강점기 여성불교운동을 전개한 신여성 1세대이기도 하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 조금은 특이한 여성이다.

 

기독교에서 사회주의로

우봉운은 1890년대 경남 김해에서 출생해 서울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후 대구의 또 다른 기독교 계통 학교인 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3년 재직했다. 남편 기태진은 함경도 성진에 있었고 우봉운은 대구에 있었는데, 이들을 이어준 것은 연애편지였다.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다가 결혼했다. 

우봉운은 결혼과 함께 함경도로 이전해 이동휘를 만난다. 우리나라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동휘, 바로 그 사람이다. 이동휘는 우봉운이 1920년대 초 다시 국내로 오기까지 그녀의 삶에 큰 그림자를 남긴다.

우봉운은 독립운동 전개 과정에서 국내를 떠나야 했다. 이동휘를 따라 옮겨간 곳이 중국 간도의 명동촌이다. 후에 윤동주와 문익환이 태어나고 자란 그곳이기도 하다. 우봉운은 명동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이라는 흐름에 이동휘를 따르던 사람들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다. 우봉운이 있던 연해주는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우봉운은 혁명 이후 어느 즈음인가 기독교를 통한 계몽운동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환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남편 기태진이 금강산 석왕사로 출가했다. 금강산에 가서 남편을 만난 우봉운은 “여보, 당신은 생각대로 중노릇을 하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 여승 노릇은 못 하겠고 오직 아들 웅(雄)이를 데리고 북간도에 나가서 교육을 시키며, 하나님 앞에 일을 하다 당신이 회개하는 날이면 다시 만날는지요”하고 돌아왔다.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우봉운은 1920년대 초 어느 즈음에 출가해 승려가 된 남편이 있던 경성(서울)으로 돌아온다. 경성으로 돌아온 우봉운은 초기 여성 사회주의 운동가가 돼 있었다. 우봉운은 사회주의 운동 조직인 ‘북풍회’에 가입했고, 1927년 출범한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을 전개한다. 근우회 중앙검사위원, 중앙집행위원, 재정부장을 역임하며 1931년 해산할 때까지 함께 한다.

우리 여자 사회의 선진(先進)인 우봉운 여사는 자애롭고 감동하고 분투하여 동지를 규합시켜 불타의 진정신(眞精神)으로서 여성의 덕성을 함양(涵養)시키는 선지 계발을 위해 지난 대정(大正) 11년 4월 조선불교여자청년회라는 단체를 조직한 이래 4개 성상(星霜) 동안 회장 우봉운 여사의 열성과 노력은 일시도 그치지 않아.
- 「조선불교」, 1925년 4월

경성으로 돌아온 우봉운은 1922년 창립한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초대 회장이었다. 불교여성운동의 주요 터전은 당시 종로 간동에 있었던 석왕사의 경성 포교소다. 남편 기태진이 출가했던 사찰이 석왕사였으니 우봉운의 불교 활동은 부부의 인연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1910년대 여성 불자가 계몽의 대상이었다면, 1920년대는 계몽의 주체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다. 그 출발을 불교여자청년회로 잡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불교여자청년회가 창립 이후 가장 주력한 사업은 여성 교육 사업이었고 능인여자학원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능인여자학원은 ‘빈민여자’들을 위해 1922년 10월 9일에 개학한 능인여자강습회로부터 출발한다. 교장은 불교여자청년회 회장이었던 우봉운이 담당했으며, 교육부의 간부 5~7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능인여자학원은 종로 사간동에 있는 석왕사 소유의 건물에 있었다.

1923년 학생이 150명, 교사가 6명이었으며 4년제로 운영됐다. 야학에서 시작해 주학으로 변경돼 처녀들은 주간에, 가정주부들은 야간에 수업을 들었다. 몇 년 후 능인여자학원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었고, 1925년 경영권이 일본 사찰인 서본원사(西本願寺)의 경성별원으로 이전했다. 능인여자학원의 경영권 변화는 곧 불교여자청년회의 침체를 웅변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침체했던 불교여자청년회는 1929년 재건되는데 그즈음 우봉운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재건된 불교여자청년회에 우봉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김일엽이라는 유명한 여성 인사가 불교계에 등장하는 시기도 그때다.

동아일보를 다니며 신문권유원(新聞勸誘員) 
노릇을 하든 우봉운 여사는 일전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안국동 여자선학원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여사의 위승설(爲僧設)까지 유포되었으나...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9월

여성운동 일선에서 물러난 우봉운은 여자선학원에 있었다. 심지어 스님이 됐다는 풍문까지 있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초에는 부인선우회라는 단체의 임원을 역임하면서 선학원에서 수행했다. 

우봉운이 사회운동에 다시 등장한 것은 해방 이후다. 해방 공간에서 활동도 특이한데,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경성시 인민위원으로, 1948년 1월에는 민족자주연맹 상무위원회에서 부녀 대표 임원으로, 1948년 4월에는 민주독립당 상무위원회에서 부녀 책임자 임원으로 선출된다. 해방 공간에서 우봉운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이라는 좌익 계열의 운동을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여성 부문으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고, 이후 북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의 일은 알려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