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화가 나혜석의 일생

불꽃 같은 삶, 나혜석

2022-02-28     임석규
나혜석의 <자화상>, 1928년경. 제작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미술사조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2015년 11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자화상>이 수원시에 기증됐다. 기증자는 나혜석의 막내아들 김건(전 한국은행총재)의 부인 이광일 씨였다. 그녀는 나혜석이 그린 남편 김우영의 초상도 함께 기증했다. 김건 전 총재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채 치열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존재를 마지막 순간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이 그림들은 현재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중에는 고흐의 것이 유명하며, 렘브란트, 루벤스, 고갱 등의 자화상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의 자화상으로는 1710년에 그려진 국보 <윤두서 자화상>이 유명하다. 사람들이 화가의 자화상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작품에 작가의 심리상태나 가치관이 특히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자화상은 1928년경 그린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이 시기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짙은 색의 배경과 옷, 검은 머리색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로 여인의 얼굴에 감도는 외로움이 더욱 강조된다. 그리고 여성의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중성적이고 오히려 남성적이기까지 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큰 눈에 높은 코를 가진, 강하고 과장된 윤곽선의 외모로 묘사돼 동양인이라기보다는 서양인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서구적인 마스크 때문에 학계에서는 진짜 나혜석의 ‘자화상’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체념한 듯한 표정과 굳은 시선은 어쩌면 자신이 구미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근대기 개화하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조선의 현실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혜석의 <나부상>, 1928년경. 나혜석은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화가이다. 당시에는 보편화되지 않았던 누드화를 그리기도 했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유화가·작가·여성운동가로

나혜석은 근대기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아직 봉건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조선에서 결혼과 출산, 육아와 이혼 등 자신이 겪은 일들을 여성 본인의 입장에서 정리하고 해석한 글들을 발표해 온 작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평가받아온 인물이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18일 수원 신풍면 신창리에서 5남매 중 넷째로 출생했다. 수원 일대의 대지주였던 부친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 등을 지냈으며,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관료였다. 실용적이고 다분히 현실적인 인물이었던 부친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혜석은 이미 일본 유학 중이던 오빠들을 따라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나혜석은 그해 4월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근대기 최초 여성 서양화가가 탄생한 것이다. 미술대학에 입학하긴 했지만 초기에는 미술보다 문학 활동을 더 열심히 했으며, 문학을 통해 근대 계몽사상의 당당한 한 축인 여성, 즉 ‘신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글들을 발표했다. 세계사 차원에서 보면 신여성은 1890년대 영국의 ‘뉴 우먼(New Woman)’ 열풍에서 시작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새로운 여성성의 자각과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1915년 나혜석은 도쿄에 유학 중인 여학생의 모임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여자계」를 출간한다. 그리고 도쿄 유학생 동인지인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을 게재해 근대적 계몽사상의 주체로서 각성한 여학생의 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정립되기 시작한 근대적 인간관에 대한 각성은 유럽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일본 사회에도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으나,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봉건시대 규범인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가까스로 벗어난 ‘현모양처’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과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봉건적 규범에서는 겨우 벗어나 있었지만, 자아와 개성에 눈뜨기 시작한 신여성들에게 현모양처론은 새로운 굴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혜석은 최초로 발표한 글 <이상적 부인>(1914년 12월)에서 ‘현모양처’는 교육가들이 상업적으로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며, ‘온양유순’이란 것도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당시 나혜석의 미술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1919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삽화 연작, 1920년 「신여자」에 게재한 <김일엽의 하루> 같은 스케치, 또는 1920년대 초기에 그려진 농촌 풍경화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초기 작업은 초보적인 재현회화나 사실주의적 묘사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녀는 인상주의적, 표현주의적 경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나혜석은 1920년 교토제대 법과 출신의 엘리트 김우영과 결혼한 후 10년간은 활발하게 미술작품 제작과 기고 활동을 했다. 전성기였던 이 당시 눈에 띄는 미술 활동으로는 1921년 3월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개최한 개인전을 들 수 있다. 매일신보사와 경성일보사 후원으로 열린 내청각 개인전은 나혜석 개인뿐 아니라 한국 근대 여성미술의 역사가 열리는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경성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 유화 개인전의 주인공이 여성이란 점에서도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전시 기간이 단 이틀이었음에도 5,000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고, 작품도 20여 점이나 팔렸다고 한다. 

1923년에는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에 부영사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에서 5년을 보낸다. 곧이어 1927년부터 하르빈(하얼빈), 시베리아에 이어 베를린, 스페인, 이태리 등 유럽제국을 여행하고 파리 체류 이후 미국을 거쳐 귀국하는 장장 2년에 걸친 세계일주까지 하면서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된다. 

1928년에는 미술의 본거지인 파리에 체류하면서 미술 작업에 몰두했는데 프랑스와 스페인 풍경, 서양 여인을 모델로 한 누드화 등이 이 당시의 산물이다. 유럽 여행과 함께 나혜석의 서구 지향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자유연애 사상은 깊어져 남편 김우영의 지인이자 천도교의 대도령이 되는 최린과 스캔들이 나게 된다. 최린은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까지 한 인물이지만, 1933년 말께 내선융합(內鮮融合)이 유일한 길이라며 일제에 협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최린과의 연애 사건으로 결국 나혜석은 이혼하게 된다. 

나혜석의 <김우영 초상>, 1928년. 남편 김우영과의 결혼은 나혜석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줬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1931년 나이 35세에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나혜석은 1934년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연애, 결혼, 이혼 과정뿐 아니라 이혼할 때 아내의 재산 분할권과 자식에 대한 친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현 제도를 고발했다. 그리고 <신생활에 들면서>라는 글에서는 ‘정조’란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취미’ 같은 것이어서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당시로써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급진적인 발언들은 그녀를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이단자로 만들어 사회의 냉대 속에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한 후 세간의 이목을 피해 낙향을 결심, 그해 3월 수원으로 내려갔다. 수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 집중했으며, 1935년 10월 진고개 조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소품 200여 점을 출품하고 재기를 꿈꿨으나 냉담한 반응 속에서 언론으로부터도 관객으로부터도 호응을 얻지 못한 그녀의 마지막 전시회가 됐다. 마지막 전시회가 실패하고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불교에 심취하고 1937년 말 수덕사 일엽 스님을 찾아간다. 일엽 스님의 권유로 1938년도 해인사 하안거 참선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삼계대성인 석가모니의 법도량에서 청정한 몸으로 길들이는 승려생활이란 참으로 신성한 가운데서 인천(人天)의 대법기를 이루는 곳으로서 가히 부러워 아니할 수 없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 마곡사, 통도사 등지를 순례하면서 작품활동을 이어갔지만 중풍에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면서 심신이 파탄에 이른다. 이에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저녁에 헌 옷을 입고 아무런 소지품도 없이 파란만장했던 52년 인생을 행려병자로 마감한다. 

나혜석의 <염부상>, 1930년대. 나혜석은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에 눈을 떴다.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가 인상적이다.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꺼지질 않을 ‘여성해방’의 불씨

나혜석은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18점을 포함해 생전에 약 300점의 작품을 발표했다. 나혜석보다 앞서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웠던 고희동이 귀국 후 바로 한국화로 전향한 것에 비하면 실로 대단한 집중력이며,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발표한 유화가는 없었다. 그러나 현재 나혜석의 작품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그림은 40~50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대부분 진위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그녀의 그림과 글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당시 가장 진보적이었던 그녀의 사상이 그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금까지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역시 그의 사상이 미술작품과 문학작품 사이에서 괴리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나혜석 본인이 두 장르의 씀씀이를 다르게 정해놓고 있었던 까닭은 아닐까? 아니면 쿠르베 같이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충실히 묘사해 기존 사회에 반항했던 리얼리즘 계열 작가들의 작품들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은 운명처럼 1896년 같은 해에 태어나 모두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의 여성주의와 여성해방사상을 받아들인 신여성이었다. 이들은 봉건적 가치관과 남성 중심 기존 질서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당시 사회에서 이들은 철저하게 배제됐고, 멸시와 수모를 당하며 소모됐다. 스님으로서 일가를 이뤘던 김일엽을 제외하면 나혜석과 김명순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으로도 꺼지지 않았던 여성해방이라는 소중한 불씨가 남아있다. 이 불씨를 살려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게 할 의무는 아직 우리의 몫이다.  

 

임석규 
동국대를 졸업하고 도쿄 무사시노미술대학 조형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을 역임했으며, 발해 불교미술 전문가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전문위원, 조계종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