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일엽 스님과 나혜석을 안은 덕숭산 수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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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8     유동영

원효 스님이 예언하기를 ‘(불기) 3천 년경에는 대한국에 있는 덕숭산에서 무수한 도인이 나오게 되는데, 불법의 성광이 전 세계에도 두루 비치게 된다’며 이를 만공 스님이 입증한다고 했다. 해발 500m가 채 되지 않는 덕숭산은 크지도 높지도 않으나 곳곳에 우뚝 솟은 바위들과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편안하고 넉넉하다. 눈이 제법 내리는 겨울철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눈 지붕을 만들어 더 없는 절경을 이룬다. 

(결제 중임에도 취재에 기꺼이 도움을 주신 환희대 경완 스님, 정혜사 원주 지상 스님 그리고 방사와 여러 실무를 친절히 처리해준 템플스테이 정현주 팀장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눈 내리는 새해 첫날 새벽,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국보 대웅전에는 촛불이 그윽하다. 눈발은 도량석의 가락에 맞춰 덕숭산 자락에 사분사분 앉는다. 대웅전은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아 안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매화의 기개처럼이나 군더더기 없이 당당하고 꼿꼿하다. 천하제일 전각이라도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이랄 수 있으나, 천 오백 년 넘게 이어지는 도량석에 청정한 나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방장스님의 새벽 예불은 7년쯤 전에도 이미 법당 밖에서부터 시작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라 온 세상을 깨우는 사물 소리가 더 특별하다. 수덕사는 다른 총림과 다르게 사물 중 서쪽의 대종이 먼저 울리고, 동쪽 법고각의 목어와 운판이 뒤를 잇는다. 법고는 저녁 예불에만 울린다. 학인스님과 행자님이 분주하게 눈을 치워 길을 트자, 방장스님부터 학인스님까지 말 없는 발걸음들이 하나하나 대웅전으로 향한다. 

거센 눈발이 아니면 통알 안행은 마당의 탑을 돌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정혜사 아래 모셔진 만공 스님 승탑에 통알하는 모습

아침 공양을 마친 아침 8시, 40여 명의 사부대중이 새벽부터 쌓인 미끄러운 눈길을 뚫고 정혜사 마당에 모였다. 수덕사만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는 새해 첫날 통알을 위해서다. 통알은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중 모든 대중에게 올리는 절집의 세배 의식이다. 많은 절은 새벽 예불 뒤 주전각에서 통알 의식을 치르는데, 수덕사만은 유독 높은 곳에 자리한 정혜사까지 오른 뒤 다시 대웅전 부처님 전에서 통알을 한다.   

눈이 내리지 않는 여느 해 같으면 정혜사 선방 스님들을 비롯해 견성암 비구니 스님 등 100여 명에 이르는 대중이 통알 의식에 동참했을 것이다. 정혜사 어른이신 설정 스님을 선두로 만공 스님이 기거하셨던 금선대를 거쳐, 만공탑 등에 예를 올린 뒤 대웅전에 이른다. 대략 1시간이 걸린다. 현재와 같은 통알의 정확한 유래를 알기는 어려우나, 사중 스님들에 의하면 아마도 만공 스님 이후 결제 중에 행하는 세배가 방해돼 그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합동 통알로 갈음한 것 같단다. 

 

정혜사 쌍탑

수좌 일엽과 화가 나혜석 

옛사람들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눈 속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
-일엽 스님의 「오도송」

수덕사 금강문
일엽 스님이 석굴암에 견준 대웅전

나혜석의 말년 삶을 두고 여러 연구자가 ‘비승비속의 삶을 살았다’고 말하곤 한다. 불가에서 비승비속의 삶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상은 유마거사나 당나라 때 마조 스님의 제자인 방거사다. 이 분들 만큼의 경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불법을 심지로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는 삶을 비승비속에 비유하곤 한다. 이러니 비승비속 나혜석의 삶과 결과로서 드러나는 작품이 궁금했다. 1937년 수덕여관에 짐을 푼 것은 아마 수덕사에 일엽 스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나혜석은 일엽 스님을 찾았고, 일엽 스님은 그 만남을 글로 남겼다.

“나씨는 나를 찾아 수덕사 견성암으로 와서 머리를 깎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혜석씨로 말하면,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모되어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밝은 그 눈의 동공은 빙글빙글 돌고, 꿋꿋하던 몸은 떨리어 지탱해 가기 어렵게 되었다. (...) 한 가지 외의 생각은 다 소멸시키고, 외골수로만 나가면 생각이 통일되어 올바른 길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내가 간곡하게 일러도, 그는 ‘일엽처럼 나는 불교장이는 되기 싫어’. 그는 이미 종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씨는 소위 일반 지식인들과 같이 종교는 생활의 방편이라 했고, 내가 중 자격이 없다고 말한 데 대해 도리어 불만을 품는, 유명한 중이 두 사람이나 날 것이 싫어서 자기가 중이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는 당찮은 말까지 했다.”

일엽 스님이 석굴암에 견준 대웅전

‘이혼고백서’ 사건 뒤로 사회는 물론 오빠로부터도 후원이 끊겨버린 나혜석의 정신과 몸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세상사를 끊고 화두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라 할지라도 언제 스러질지도 모를 옛 동무 모습이 애처로웠을 테고, 그 친구가 절집의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혜석은 일엽 스님의 강권을 마다했고, 그 뒤로 10여 년 동안 수덕사를 근거지로 해인사 등을 오가다, 말년에는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 덕산면 덕숭산 수덕사의 삼덕, 이 정도로 덕을 갖춘 곳이었기에 그나마 나혜석이 그 긴 시간을 이곳에 의지할 수 있었던 듯하다.  

지금까지 나혜석 작의 글들과 작품들로는 불자 이상의 나혜석을 찾지 못했다. 사하촌에 살며 스님들과 교류를 하며 사는 삶을 비승비속이라 하기에는 비약이 심하다. 근대의 유학자이자 서화가로서 송광사에 머물며 송광사 8경을 설정하고, 목우가풍 송광사의 상징으로 쓰이는 삼일암의 ‘목우가풍’ 네 글자를 남긴 송태회를 두고도 비승비속의 서화가라 부르지 않는다. 앞으로 나혜석의 숨겨진 걸작들이 드러나서 비승비속의 삶을 살다간 나혜석으로 다시 조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만공탑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