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스님 되돌아보기] 초부 적음

약사여래의 화신, 보살행의 외호승 초부 적음(草夫寂音)

2022-03-18     효신 스님
1936년 10월 4일자 조선일보 3면 ‘가을의 이 표정, 저 표정(4)’에 실린 적음 스님. 이때 스님은 30대 중반이었다. 

내일이 오늘을 담보로 존재하듯, 오늘은 어제의 시간을 견뎌낸 대가이다. 현재 한국불교도 마찬가지다. 오랜 역사의 고비마다 법등(法燈)이 꺼지지 않게 등불을 지킨 스님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 불교가 존재한다.

오늘 불교는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제국주의 한국불교 말살 정책에 항거하며 지켜낸 결과이고, 아울러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의 과정에서 이루어낸 청정승단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이 길을 닦은 스님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청정승단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초석을 마련한 스님, 초부 적음(草夫寂音)이다. 뛰어난 침술의 한의사 출신인 스님은 기꺼이 외호 소임을 맡아[사판승(事判僧)으로], 법등의 기름이 되어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의 외호 보살행이 없었더라면 오늘 한국불교는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음(寂音)이라/ 고요 속에 소리가 있네/ 그대 법명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는 경봉 스님의 말처럼 조용히 한국불교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다.

 

만공 스님의 일언 “중생의 약이 돼라”

적음 스님은 대한제국 광무 2년(1898) 2월 11일 경북 군위군 효령면 불로동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은 김해 김씨로 속명은 영조[永祚, 족보명은 영곤(永坤)]이다. 스님은 7살 어린 나이에 원인 모를 불치병을 앓게 되자 당숙의 친구 한의사에게 의탁해 마산에 머물면서 치료받게 됐다. 이때 침으로 병이 낫게 된 것을 계기로 한의학과 한학을 배워, 20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의술은 신침(神鍼)으로 소문이 났다.

1920년, 서울 종로구 재동에 경성한의원을 개원했다. 환자 중에는 이광수, 최남선 등 신지식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다. 범어사 동산 스님의 외삼촌이자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위창 오세창은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중병이 들어 평생을 고생했는데, 훗날 적음 스님에게 치료를 받고는 완쾌됐다고 한다. 3·1 만세운동은 스님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그날 이후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계몽이라 생각헤 독서와 공부에 매진하고, 해방될 때까지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특히 출가 후, 1940년에 호국불교병원 ‘대비원(大悲院)’을 운영할 때는 애국지사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해 그들의 모든 편의를 봐주었다. 김구, 여운형, 장덕수, 공초 오상순 등이 대비원에 왕래했다. 

적음 스님은 경성한의원에 치료받으러 오는 스님들과 법담을 나누다가, 1924년에 직지사로 출가했다. 직지사 조실이자 경허 스님의 지도를 받았던, 제산 정원(霽山淨圓, 1862~1930) 스님을 은사로 ‘적음(寂音)’이라는 법명을 받는다. 제산 스님이 입적하자 만공 스님은 일찍 스승을 여읜 적음 스님에게 울타리가 필요하다고 여겨 당신의 제자로 거두었다. 뛰어난 침술로 스님들뿐만 아니라 병원에 가지 못하는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는 적음 스님의 자비심을 본 만공 스님은, “그대는 약초에 연(緣)이 있어 이로 인하여 무수한 병자를 구제하나니 이제 일체중생의 약이 되어 스스로 돕는 바가 돼라”며 ‘초부당(草夫堂)’이라는 당호를 내린다. 건당식(建幢式, 법맥을 계승하는 의식)은 사부대중의 축하 속에서 치러졌는데, 그 사진에는 만공·용성·만해·석우·용음·동암 스님과 오세창 등 당대 선지식들이 참석했다.

만공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법맥을 전승하는 건당식. 한가운데 앉은 적음 스님을 비롯해 만공·용성·만해·석우·용음·동암 스님과 오세창 등 당대 선지식들이 참석했다.

 

깨달음과 같은 수행 대중 볼보는 일

일본 제국주의는 식민통치 목적으로 호국과 호법을 앞세워 불교라는 같은 옷으로 한국 침략의 당위성을 전파했고, 포섭된 친일 이회광의 한국불교 중앙기관 원종(圓宗)은 1910년 3월 연합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조동종에 예속하려는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러자 1911년 1월 영호남 스님들을 주축으로 “조선(한국)불교의 연원은 임제종에서 발원했다”는 임제종 설립 운동이 일어나 다행히 조약은 성립되지 못했다. 임제종 운동은 백용성, 오성월, 박한영, 한용운 등을 주축으로 한 항일운동이었지만, 그 근원은 한국불교 정체성인 수행의 본질을 지키는 데 있었다. 

1911년 6월 3일 총독부는 주지전횡제도와 대처식육을 허용하는 ‘사찰령’ 및 7월 8일 ‘사찰령시행규칙’을 공포하면서 간섭과 통제를 전면화했다. 이에 자유로운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유지하는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바로 선학원의 설립이었다. 사찰령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 위해 절을 상징하는 ‘사(寺)’ 또는 ‘암(庵)’ 대신에 행정기관의 형식을 띤 ‘선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됐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24년부터 적음 스님이 맡았던 1930년까지 모든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만공 스님이 적음 스님에게 그 살림을 맡기면서 한국불교의 새로운 역사가 진행됐다. 

만공 스님은 “우리나라 절 집안에 조실하고자 하는 이는 많으나 살림 맡을 만한 원주감 하나가 제대로 없다”고 탄식하며 “견성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중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올바른 공양인 것이 사실이나, 참구하는 대중을 돌보는 일도 견성과 추호도 다름이 없는데, 이 일의 최적임자는 적음뿐”이라 했다. 적음 스님이 임종 때 제자들에게 “공부하는 일이 비록 중요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 자기 마음 가운데 중생구제에 그 뜻이 있다. 그러니, 내 공부를 이룬 후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시은 갚는 일”이라고 당부한 데서 어떤 마음으로 외호 소임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스님이 머무는 곳은 아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이들뿐만 아니라, 신묘한 의술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상당한 재력가들도 많았다. 스님의 제자 벽암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걷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 스님께 침을 맞은 후 걸어 나가는 기적 같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스님은 빈부귀천 신분에 상관없이 치료비를 절대 받지 않았는데, 그들 중에는 스님 몰래 치료비 명목의 보시금을 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님은 이 보시금들을 외호와 모든 불사에 사용했다. ‘선불교동경유학생회’, ‘묘향산 보현사 상원암(上元庵) 시성전(視聖殿)의 선원 창건’ 등 곳곳에 스님의 지원은 계속됐다. 

적음 스님은 선학원 인수와 함께 ‘전국조선수좌대회 개최’를 시도했다. 이것은 훗날 1935년 일본불교의 침탈로부터 조선불교의 선을 수호하리라 천명한 조선불교선종의 창립 출발로 이어진다. 특히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으로 등록한 일과 친일 덕성재단에 부당하게 강제 매각당한 선학원 건물(부인회관)을 긴 소송으로 끝내 소유권을 되돌려받은 사건은 스님의 행정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 등록은 법률 허점을 역으로 활용한 것으로, 일본으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 동시에 독립적인 재정 확충을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그 궁극적 서원(목적)은 승가와 재가의 기부를 모아 “(청정 비구) 수좌들이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데” 있었다. 

이 서원은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의 효시 역할을 하게 됐고, 현재 청정수행 교단인 ‘조계종’을 탄생시켰다. 적음 스님은 1954년 7월에 효봉 스님과 함께 공동명의로 전국 비구승대회를 소집하여 교단정화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 후에 금오 스님 등을 인솔해 불교계 대표로 경무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공주 신원사 적음 스님 부도

 

쌀 한 톨에 7근의 무게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불교 외연을 확장하고자 여러 방안을 고심했다. 선방의 개방과 ‘남녀선우회 및 부인선우회’의 운영조직을 결성해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부인선우회는 전국 사찰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들 중에는 법련사의 기증자였던 법련화 보살도 있었다. 그녀는 적음 스님 입적 후, 사간동 옛 법련사 술집을 적음 스님의 상좌 벽암 스님에게 시주하려 찾아갔다. 하지만 벽암 스님은 “본인은 삼륜이 청정하지 못하여 자격이 없다”고 거절했고, 현재 법련사는 송광사 분원으로 남게 됐다. 선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 잡지 『선원(禪苑)』도 간행했다. 『선원』 표지의 원이삼점은 스님이 직접 도안한 것으로, 잡지 간행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선원』에서는 건전한 신앙의 확립, 설법 포교, 지방의 선원 소식, 수좌의 대우 개선 등 불교 전반 사항을 다루고 있다. 

쌀 한 톨에 7근의 무게를 느끼며 부처님 시은에 보답하려 한 스님의 아낌없는 보살행은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을 마련해 주는 데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당시 한용운은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이를 딱히 여긴 스님은 본인 초당을 지으려고 마련해 둔 땅 171.9m2(52평)에다가, 조선일보사 방응모 사장을 설득하여 동참시킨 몇몇 유지의 도움으로 주위 땅을 사들여 330m2(100여 평) 남짓한 집(심우장)을 1933년에 완공, 한용운에게 희사했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일제 총독부를 바라보는 게 싫다고 해서 일부러 북향으로 설계된, 앞면 4칸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일본 경찰의 매서운 감시로 일반인의 접근은 어려웠지만, 스님은 치료를 핑계 삼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경전을 널리 보급할 수 있는 역경원의 설립이 일생의 원력이었는데, 해방 직후 1945년 12월 17일, 서울 충무로 3가 50번지에 있는 일본 정토종 본원사에 ‘호국역경원’ 설립해 그 원력을 성취한다. 훗날 ‘해동역경원’으로 변경 설립됐지만, 초대 원장은 적음 스님이, 부원장은 청담 스님이 취임했다. 1959년, 주지로 있던 마곡사에서 병을 얻은 스님은 1961년 10월 3일 긴 보살행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세수 63세, 법랍 39세였다.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신념으로 불법을 외호하던 스님의 보살행은 그의 문도 손상좌 견진 스님(현 신원사 고왕암 감원) 등이 이어가고 있다. 

묘향산의 기세가 하늘 밖 제일가는 풍경구로
가히 도인이 거처할 만한 곳이니
만 길 폭포 소리 우레와 같고
인간의 부정한 행실을 꾸짖는 것 같아
천 년의 경치에 취하여 돌이켜 생각해 본 즉
뜨내기 중생의 꼭두각시 인생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꼭두각시 같은 우리네 인생은 어찌하여 
본래의 천진 자성을 닦지 아니하리오

-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 상원선원에서 보낸 
적음 스님의 편지 중에서.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 상원선원에서 보낸 적음 스님 편지 마지막 문구

 

효신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