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 삶과 죽음 그것이 문제로다

[도심한거都心閑居]

2022-03-11     석두 스님

생사(生死)! 

불교는 이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났다. 고타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여 ‘깨달은 자’ 곧 ‘붓다’가 됐다. 하지만 태어난 자는 탄생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느낌’이다. 느낄 수 없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은 경험되어지고, 느낌이 있으며, 표현될 수 있다. 

‘깨달은 자’의 죽음은 보통 범인(凡人)의 죽음과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범인은 유언장(遺言狀)을 남기고, 각자(覺者)는 열반송(涅槃頌)을 남긴다. 한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조차도 각자는 우리에게 ‘깨달은 세계’를 노래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서는 위선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의 온 생애가 그 말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며 소탈하다. 신의 경지까지 올라간 자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적인 연민을 더 느끼게 된다.

“아난다여, 이제 나는 늙어서 노후하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하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태어나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을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열반경』에서 묘사하는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다. 죽음 앞에서조차도 자신의 깨달음에 충실하고, 제자들을 아끼는 인간적인 체취가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더 그분의 마지막 유훈이 간결하게 마음속에 새겨진다. 

초기경전에서 보이는 부처님의 임종게(臨終偈)와 선(禪)에서 볼 수 있는 선사(禪師)들의 임종게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다르다. 선시는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선에서 표현하는 세계는 문학에서 표현하는 시적 영감의 세계와는 그 결이 다르다. 탈속(脫俗)의 세계, 직관적 사유의 세계인 것이다.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또한 그와 같도다.”

서산 대사의 해탈 열반송(涅槃頌)이다. ‘열반송’이란 고승들이 입적하기 전 남기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말한다. ‘임종게’ 혹은 ‘열반게’라고도 한다. 깨달음의 세계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형이상학의 세계이다. 즉 ‘진제(眞諦)의 세계’이자, 유학에서 말하는 ‘이(理)의 세계’인 것이다. 진제인 진리의 세계는 ‘속제(俗諦)의 세계’에서 찰나적으로 포착된다. 

일상적이며 자연적인 현상인 구름의 생성과 소멸의 모습이 깨달음을 얻은 자의 안목에서는 한 생명의 죽음, 탄생과 동일시된다. 깨달은 자에게 존재의 탄생과 죽음은 구름의 생성과 소멸의 연기적 현상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가 너무 가볍게 다루어진 것 같아서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깨달은 자의 안목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을 익숙한 것으로, 무의식적인 견고한 틀 안에서 갇혀 사는 우리들의 인식의 틀을 여지없이 부순다. 다음은 만공 스님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인 금봉 스님의 열반송이다. 

“청산은 문수보살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세음보살의 귀로다.
오는 세상, 세상 인연 다하니
옛을 의지해서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는구나.”

깨닫기 전에 청산은 객체(客體)로서 늘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외계의 실존적 모습이었다. 또한 문수보살은 피나는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통해서 이루어가야만 하는 수행자의 롤모델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의 안목이 열리니, 산하대지 모두가 부처와 보살의 화현(化現)이다.

현현(顯顯)하는 모든 것 속에서, 이제 나는 더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청산이며, 문수이며, 관음인 것이다. 더 닦을 것도, 찾을 것도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가 나의 진면목(眞面目)인 것이다. 이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나도 인연 따라 흘러가기만 하면 된다.

깨달은 자의 안목은 서릿발같이 서늘하다. 부처님의 인간적인 마지막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 수 있는 자만이 자비로써 무지한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 그래서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 스님의 다음의 게송은 위안이 된다. 도반에게 병문안 가서 느끼는 소회를 읊은 이 게송에서 중생을 연민하는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가 그려진다. 

“벗을 찾아 깊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실로 마음이 아프다.
몇 해가 지나도록 열반당(涅槃堂)에 
누워 있네.
문 앞에는 지나가는 나그네 없고, 창문에는 종이마저 떨어졌네.
화로엔 차가운 재만 남고, 
앉은 자리엔 서리가 끼어있네.
병든 후에야 이 몸이 고(苦)인 것을 
비로소 아나니,
건강할 때 열심히 남을 도우라.
노승(老僧)은 스스로 편안한 
도리가 있어서
여덟 가지 고통이 옥죄어 와도 
전혀 방해롭지 않네.”

죽음의 목전에서 오는 육신의 고통은 깨달은 자나 몽매한 중생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전도(顚倒)된 중생은 탄생과 소멸을 이분법적인 분별심으로 보고, 깨달은 자는 삶과 죽음을 나누어 보지 않을 뿐이다. 

생자(生者)는 반드시 필멸(必滅)하는 것이니, 이것이 태어난 모든 존재의 인연법인 것이다. 이것을 수용하는 자는 깨달은 자요, 거부하는 자는 전도된 자일 뿐이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