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절로 소확행#] 동백꽃 필 무렵 백련사

도량에 떨어진 붉은 자비 뚝뚝

2022-02-22     최호승
강진 백련사를 둘러싼 동백숲에서 떨어진 꽃들이 대지를 붉게 수놓았다.
조선 3대 명필 광교 이광사가 쓴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편액. 
‘대(大)’자는 사람이 걷는 것 같다.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중략…)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고재종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중에서)

계절은 겨울이었고, 날이 찼으며, 시심은 가득했다. 때마침(?) 인연이 도래했다. 다른 꽃 다 질 때 홀로 겨울에 피는 꽃, 동백(冬柏)이 기다렸다. 저녁 대신 겨울 아침에, 뜨건 상처의 길이 아닌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의 길을 한 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이었다. 좋지 아니한가. 저절로, 강진 백련사로 향했다. 

 

광양 옥룡사지 동백숲길. 동백숲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곳은 전남 광양 옥룡사지 ‘천년 동백’. ⓒ광양시

 

꾹 다문 붉은 입술

강진 백련사 동백숲은 백련결사와 함께 가장 많이 알려졌다. 동백은 여수 오동도, 광양 옥룡사지, 장흥 천관산, 고창 선운사 등 서남해안의 섬과 연안 지역에 자생한다. 백련사는 지리적으로 그 중심에 있다. 

주차장에서 내리면 곧장 일주문이다. 백련사까지 300m 정도 되는 오솔길은 곁에 동백숲을 거느리고 있다. 울창한 동백숲 분위기는 사찰 서쪽에서 만끽했다. 부도가 있는 이 동백숲은 다른 나무가 거의 없고 오직 오래된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빽빽해서 볕 드는 오전에 걸어도 어두울 지경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동백나무를 심었을까. 나무로 만든 사찰 건물들은 불에 약하다. 예경 대상 불상을 모시고 예불 드리며, 스님들이 수행하고 정진하는 도량이 불을 만나면 사라졌으니…. 고려시대 국사(國師, 신라·고려시대 스님의 최고 법계) 원묘 스님이 백련사를 중창할 때 불로부터 도량을 보호하려고 심은 나무가 불에 강한 동백이다. 33,058m2(1만 평) 부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들과 섞여 8,0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부처님 법 지키는 호법신장처럼 백련사를 호위하고 있다. 동백숲 자체가 천연기념물 제151호다. 

백련사 동백은 짙은 초록색 이파리가 작았고, 꽃도 크지 않았다. 백련사 동백은 다른 지역보다 잔가지가 많고 잎이 작고 색깔이 진하며, 꽃의 크기도 더 작다고 한다. 작은 게 무슨 문제랴. 3월 말이나 4월 초에는 뚝뚝 떨어진 동백꽃이 숲길을 붉게 물들인다. 

시절이 일렀을까. 아니다. 5분만 멈춰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잔가지 틈을 파고들어 대지를 적시는 겨울 볕,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리는 새소리, 동백나무의 짙은 초록빛, 백련사의 풍경소리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맘 급해 먼저 핀 붉은 동백꽃. 동백꽃이 절로 붉어질 리가 없다. 저 안에 담긴 벼락 몇 개, 천둥 몇 개, 태풍 몇 개, 눈과 비바람 몇 개의 인연을 떠올린다. 

 

신안 천사섬 분재공원. 하얀 눈꽃이 붉은 동백에 내려 앉은 신안 천사섬 분재공원 애기동백. ⓒ신안군

 

동백의 꽃말 닮은 도량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문정희 ‘동백’)

붉은 동백은 사랑의 색이다. 동백의 꽃말 역시 “나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이다. 여수 오동도에 내려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오동도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던 부부의 사연이 동백의 꽃말이 됐다. 자신을 해하려는 이를 피하다 그만 절벽에 떨어진 아내를 발견한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내를 묻은 섬을 떠난 남편을 다시 섬으로 부른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가 아내의 무덤에서 발견한 붉은 꽃, 그 꽃이 자라는 나무. 그는 그 꽃이 자신에게 ‘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렸어요. 당신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꼈단다. 

그래서일까. 동백의 꽃말이 백련사가 품고 있는 사랑과 자비와 닮아 보였다. 불교계에서 사회복지 단어가 생소한 시절,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스님들을 사회복지사로 만든 스님이 백련사 주지, 보각 스님이다. 

보각 스님은 1985~2019년 중앙승가대에서 1,000여 명의 제자를 교육했다. “실천 없는 자비는 무자비와 같다. 부처님이 지금 시대에 오셨다면 사회복지사 모습으로 출현하셨을 것”이라고 강조한 보각 스님이다. 병원, 장애인시설, 요양원 등 불교가 사회에 퍼뜨린 자비 씨앗은 스님이 시작했다고 봐도 큰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만해대상 실천대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다. “중생 없는 부처가 없듯, 보살행 없는 불교도 없다”는 스님의 원력이 백련사와 강진에서도 꽃 피고 있었다. 강진 읍내 어린이집과 노인돌봄센터를 위탁해 운영한다. 

백련사를 거닐었다. 도량은 사시예불 중이었다. 대웅보전에 이르자 현판이 시선을 붙든다. 조선 3대 명필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대(大)’자는 사람이 걷는 것 같고 ‘웅(雄)’자는 웅크린 모양이다. 사람을 향해 있는 부처님의 자비가 어른거렸다. 

 

장흥 천관산 동백생태숲. 국내에서 ‘단일 수종 최대 군락지’로 꼽히는 장흥 천관산 동백생태숲. ⓒ장흥군

 

시와 함께 소확행 느낄 곳들

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 동백의 붉은 빛은 강렬하다. 시심(詩心)을 자극한다. 꽃말과 한참 붉게 핀 상태에서 꽃 전체를 떨구는 동백은 그 자체로 시일지도 모른다. 겨울꽃, 동백은 강진 백련사 외에도 여러 도량에서 볼 수 있다. 동백꽃 필 무렵, 시를 사유하며 어디를 가볼까? 백련사를 참배했다면 3월 초엔 해남 대흥사 입구 1.5km의 동백숲길 순례를 빼놓지 말자. 사계절 꽃피는 1004섬 신안 압해도 분재공원에 조성된 3km 꽃길의 애기동백이 압권이다. 매년 1월 31일까지 ‘섬 겨울꽃 축제’가 열린다. 눈이 오면 동백의 붉은 빛이 더 사무친다. 

강진 옆 장흥 천관산에는 2007년 ‘단일 수종 최대 군락지’로 한국 기네스 기록에 오른 동백생태숲이 있다. ‘2021년 방문해야 할 명품숲’으로 동백나무 2만여 그루가 3월이나 4월에 붉은 꽃으로 천관산을 수놓는다. 국내 최대 규모(약 20만m2)의 천연 동백 군락지로 사진가와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동백숲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곳은 전남 광양 옥룡사지 ‘천년 동백’이다. 신라의 국사 도선 스님이 35년간 머물다 입적한 옥룡사에는 스님이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심었다는 동백나무숲이 있다. 1878년 불이 사찰을 삼켰지만, 새순이 돋아 자란 동백나무들은 3월에 붉은 꽃을 피운다. 

꽃무릇과 단풍, 마애불과 지장기도도량으로 유명한 고창 선운사 역시 천연기념물 제184호 동백나무숲이 절경이다. 500년 넘은 동백나무 3,000여 그루가 있다. 동백꽃 보기 위해 찾은 추사 김정희가 백파 스님의 비문을 남긴 곳이다. 시는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와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이 백미다. 김용택은 그까짓 사랑 때문에 다시 울지 말자는 다짐으로 감췄던 눈물을 동백꽃 붉게 떨어지는 선운사에서 터트리고 만다. 그 붉은 울음으로 보려거든 4월에 찾아야 한다. 대웅보전 뒤쪽 숲에서 지장기도도량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산림이 압권인데 가장 늦게 핀다. 개화 시기가 늦은 선운사 동백은 ‘춘백(春栢)’이다. 

꽃말이 유래한 여수 오동도에서는 관음기도도량 향일암에서 ‘관음’이라고 불리는 동백을 찾아 가볼 일이다. 통영 용화사로 가는 미륵도 일주도로는 ‘동백로’라고 불릴 정도이고, 근처에 미륵사도 있다. 

겨우내 붉게 피었다가 가장 아름다운 때 통째로 뚝 떨어지는 동백, 꽃. 시인 도종환의 ‘동백 피는 날’ 시어처럼 동백꽃 필 무렵, 앞길에 눈보라 가득해도 동백 한 송이는 가슴에 품어 가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