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행복은 어디에

삶의 여성학

2007-09-17     관리자

가을은 삭막한 고층아파트 단지 사이에 심어놓은 은행나무에도 어김없이 찾아와서 노랑, 빨 강 잎새 사이로 아름답다. 산보를 하다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에 이끌려 놀이터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아이들 세계에 들어가 본다. 그네 타는 여자아이 둘이서 높이 올라가 는 경쟁을 하는지 재잘거리고 웃어대는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소꿉장난을 하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 미끄럼틀을 기어올라 갔다가 내려오며 지르는 환성들이 자연과 어울려 이들이 발산하는 행복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그들을 바라보다 가 문득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며 자라서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며 스 스로 행복했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신데렐라 공주처럼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 여자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고약한 신화를 믿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마음속 한구석에 서 고개를 든다.
저 아이 엄마가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여자의 행복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가 장을 섬기고 현모양처가 될 때 찾아진다고 주문외듯 천연스런 거짓말을 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여자들은 자신의 행복에 책임을 지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왕자를 찾아 헤매다가 한 남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결혼으로 달려오는 동안 여자아이는 놀 이터에서 느꼈던 그런 재미와 환희와 행복이 결혼 안에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한 아이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아기의 엄마로서, 한 가정의 주부로서, 소홀함이 없이 살기 위해 열심히 청소도 하고 빨래도 깨끗이 하고 그릇이며 가구도 윤이 반 짝반짝 나게 닦으며 생각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했는데 왜 놀이터에서 처럼 그런 재미와 터질 것 같은 충족감으로 찬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하고, 처음엔 의아해 하고 다음엔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자신에게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에 빠진다. 주부들은 각자 집안에 고립된 채 이런 생각을 하며 혼자서 닦 았던 장롱을 또 닦으면서 그 일 자체에서 행복을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또한 아침부터 저 녁까지 가족들이 요구하는 대로 뒷바라지와 시중을 들면서 이것이 주부가 해야 할 큰일이며 행복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단조롭고 반복적인 가사일들을 하면서 느끼는 솔직한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드샇ㄴ 공허한 그 무엇이 순간순간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다. 행복한 것 같 기도 한데 웬지 답답하고 우울한가 하면 몸도 개운하지가 않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이를 두고 '주부가 앓는 이름모를 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또한 여성학자인 베티 프리단은 매스컴과 더불어 온 사회가 여성에게 믿게 만든 '여성의 신 비가 만들어낸 주부 병'이라고 하였다. 오다가다 어머니들이 딸 몰래 수군거리는 이런 이야 기가 있다. "딸은 학교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 얼른 시집을 보내야지 나이 들면 알 것 다 알고 이모저모 재고 생각하느라고 시집을 안 간다."라는 것이다. 묘한 이야기다.
어머니들은 여자들이 결혼하면 어떻게 살며 어떤 느낌이란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거기에 는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가지가지의 수모와 고통이 있는가 하면 출산과 육아 의 수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반은 어머니의 등에 밀려 반은 사랑과 결혼의 환상에 이끌려 결혼을 한 딸은 어머니가 눈감 고 아옹하기 식으로 슬쩍 대물림한 여자살이를 살면서 자신이 꿈꾸던 행복을 갈등과 고민 속에 찾아 헤매곤 한다.
우리 나라에는 종교마다 여자 신자로 넘친다. 여성들은 인생살이의 고통과 갈등 때문에 그 리고 가족과 결혼 안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구원을 갈구하며 하나님을 찾아 가기도 한다.
인류를 구원하고자 나선 성자들의 말씀에는 사람 차별하는 것 같은 것이 없을 것이라는 희 망을 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참 나'가 어디에 있는지 찾게 해달라고 애타게 빈다.
그러나 구원을 믿고 애타게 달려간 종교에서 여성들은 성자의 말씀이나 뜻과는 달리 또다시 '여자는 남자보다 못한 존재'라는 대접을 톡톡히 받곤 한다. 가부장적인 교리들은 여성으로 하여금 차별적인 신앙경험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으러 제발로 걸어 들어간 수 많은 여성신자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채우는 사슬에 다시 구속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고 있 다.
어떤 종교는 여자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의례와 설교를 집전하는 성직자의 자리에 설 수 없다고 한다. 성경에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 하나를 빼서 만들었고 여자의 시조인 이 브는 아담을 꼬여 금단의 사과를 먹게한 나쁜 여자-악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불교쪽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면 서도 여자는 죄가 많아 여자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보다 더 많은 계를 받아 지키고 닦아야 하며, 젊고 어린 비구스님이 공부연조가 높은 나이든 비구니 스님에게 '해라'를 해도 괜찮은 비상식적인 불교전통이 그대로 유지되 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불교에도 그대로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지금까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점심때가 되면 학생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부엌일 등의 학생봉사를 기꺼이 한다. 또한 성직자들을 도와 전교사업에 물심양면으로 가사를 불구하고 전심전력을 다한다.
성자의 말씀을 좇아 구원을 찾아 허겁지겁 나선 여성들에게 때로 마녀의 덫을 씌워 죽이는 가 하면 파계하는 요물로 뒤집어 씌우기도 한 예도 있다.
여성들은 종교에서 뿐만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필요에 의해 그때마다 여성 본래의 모습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일그러뜨려 왔다.
때로는 인간이 아닌 신성한 성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뱀이나 악마의 자리로 끌어내 리는 등 여성을 비인간화시키고 비하한 사례는 적지 않다.
지금은 어떤가? 이제는 여성 신자들이 그들의 존엄한 인간성을 각각의 종교 안에서 회복하 고 신앙생활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자문자답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여성불자들이 세상의 여자살이에 지친 몸을 이끌고 부처님이 제시하는 구원과 행복을 찾아 왔다면 여기에 자신들의 모습이 온전하게 한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집인지 아 닌지를 가늠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혹시 아직도 수행정진해도 도를 이룰 수 없는 아둔한 2호 수행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살펴 볼 일이다. 그리고 금녀의 금줄이 어디에 쳐져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 지 눈여겨 볼 일이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