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의 변호인, 지장] 아미타불과 지장신앙

극락왕생과 지옥중생 구원의 염원 만나다

2022-01-24     이승희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1476. 아미타 삼존불상 후불벽화로 장엄하게 그려졌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에 사후세계에서의 안녕을 보장해주는 극락정토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서방에 존재한다는 극락정토에는 무한한 빛과 수명을 지닌 부처님이 계시며 그곳을 주재하는 부처님을 무량수불 혹은 아미타여래라고 부른다. 극락정토는 청정불국토(淸淨佛國土)이자 완전무결한 이상세계다. 아무런 괴로움도 없고 기쁨과 즐거움, 편안함만이 가득한 곳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온갖 보배와 아름다운 연꽃과 천악(天樂)과 향기로 가득한 세계다. 그곳에 살게 되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일체의 윤회도 없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불자들에게는 선망의 공간이다. 지옥의 중생에게는 결코 도달하기 어렵고, 중음의 공간인 명계에서 심판을 받는 자에게는 반드시 가고 싶은 세계일 것이다.     

극락정토의 교주인 아미타불은 항상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세지보살을 대동하고 등장한다. 관음과 세지보살을 함께 그린 아미타삼존도의 근거는 『관무량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특정 시기에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표현한 아미타삼존도가 출현한다. 리움미술관 소장의 고려 <아미타삼존도>와 조선 전기의 무위사 극락보전 내 아미타삼존불상과 후불벽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장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게 된 근거나 배경은 어떠한 경전에도 언급돼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왜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에 지장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게 됐을까. 이러한 의문은 경전이 아닌 그 시대의 정토신앙과 지장신앙을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지장보살의 독자적인 신앙체계

지장보살은 관음보살과 함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보살이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면서도 동시에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로서 독립적인 신앙체계를 갖춰 발전했다. 반면 관음보살과 달리 지장보살은 그 탄생부터 매우 독립적이다. 그 어떤 부처에게 소속되지 않고 처음부터 지장보살만의 독자적인 신앙체계를 가진다. 지장보살의 정체성과 역할을 잘 알려주는 경전이 소위 지장보살의 3대 경전이라고 부르는 『점찰선악업보경』(이하 『점찰경』), 『대승대집지장십륜경』(이하 『십륜경』), 『지장보살본원경』(이하 『지장경』)이다. 이들 경전에서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 미륵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불법이 사라진 혼탁한 세계와 몽매한 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촉(付蜀, 부탁해 맡김) 받은 보살로 묘사된다. 즉, 부처님의 열반 후에 오염되고 타락한 무불시대에 지장보살은 ‘육도중생’을 교화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지장보살이 육도중생 가운데 특별히 지옥의 구도자로 강하게 부각한 경전이 『지장경』이다. 이 경전에서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워 유명계(幽冥界)의 교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원에 근거해 지장보살은 한 손에 지옥문을 여는 육환장(六環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마니주(摩尼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우리나라에서 지장보살신앙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난다. 경덕왕 대(재위 742~765) 활동했던 진표 율사(713~780)는 김제 모악산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등 여러 사찰에 점찰법회를 정착시켜 불교를 대중화했다. 점찰법회는 『점찰경』에 근거한다. 『점찰경』에서 지장보살은 부처님을 대신해 사람이 지은 전생의 업을 점치는 법과 참회하는 법을 알려준다. 무불시대인 말세에 중생은 업장이 많아서 석가모니불의 올바른 법을 닦을 수 없으므로, 먼저 참회 수행을 해 업장을 소멸한 후에 불법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회법은 궁극적으로 미래불인 미륵불 신앙과 연결된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하고 미륵보살의 장육상을 조성하고 7년 동안 점찰법회를 열었던 것도 당래(當來, 미래의 세상)의 미륵불신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점찰법회는 고려 중기에도 지속됐다. 하지만 법회를 통한 수행의 목표에 변화가 생겼다. 당래 미륵불에 대한 믿음보다 아미타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염원이 강해졌다. 법상종의 승려 진억(津億)은 1123년(인종 1)부터 1129년(인종 7) 사이에 지리산 오대사(五臺寺)에서 서방정토왕생을 목표로 수정결사(水精結社)를 주도했다. 이때 승려 법연(法延)은 무량수불상(아미타불상)을 조성해 금당에 봉안했다. 수정 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15일마다 『점찰경』에 따라 나무 간자(簡子)를 던져 자신의 수행 과보(果報, 인과응보)를 확인하고 악보(惡報, 나쁜 과보)가 나오면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참회 수행을 했다. 무불시대에 미륵불을 기다리며 대승의 법을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닌 서방정토왕생을 위한 참회 수행으로 결사 의식이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배경에는 고려의 왕자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이 새로운 형태의 정토신앙을 왕실과 귀족 사이에 보급한 것과 관련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송에 유학해 천태교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1085년 천태종을 개창했다. 송에서 새롭게 수용한 천태종에서는 『법화경』과 『관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을 근거로 죄업을 참회하는 법화삼매참회(法華三昧懺悔)를 수행하며, 아미타불을 예불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의천의 모후인 인예태후(仁睿太后, ?~1092)는 1092년(선종 9)에 견불사(見佛寺)에서 천태종의 예참법(禮懺法)을 1만일 동안 실천했다. 왕실에서 행한 『법화경』 등에 근거한 참회법과 서방정토왕생신앙은 왕실과 고위 귀족을 비롯해 다른 종파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중기의 대문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육친이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소문(疏文, 명부 앞에 죽은 이의 죄복을 아뢰는 글)을 지었다. 「점찰회소(占察會疏)」에서 그는 ‘번뇌를 씻고 보살의 지위를 거쳐 정각의 몸을 이룩하고, 구품대(九品臺)에 올라 아미타여래를 친견하고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될 것’을 기원한다. 그런데 특이하게 육도중생 가운데 지옥도를 제외한 축생도의 무리까지만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 소문대로라면 『지장경』에서 언급된 지옥의 중생까지도 빠짐없이 구원하겠다는 대원을 세운 지장보살의 면모가 보이지 않는다. 

 

아미타불·지장보살 병립 불화:
극락왕생의 염원과 지옥중생 구원의 믿음 

지옥중생의 구제자라는 지장보살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한 시기는 고려 후기다. 고려불화 160여 점 가운데, 아미타불화, 수월관음도에 이어 지장보살도가 차지하는 수량이 약 25점이 될 정도로 많은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는 고려 후기 지옥중생의 구원과 관련된 영험담이 성행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천태종의 승려였던 요원(了圓)은 14세기 말에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이라는 대중적인 교화서를 편찬했다. 이 책에는 총 118화의 영험담이 수록돼 있는데, 지옥중생의 구제와 관련된 내용이 다수 나온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하 『법화경』) 제목을 쓰자마자 지옥에서 풀려났다는 이야기, 염라대왕 앞에 끌려간 사람이 『법화경』을 외운 공덕으로 지옥을 벗어났다는 이야기, 『법화경』 서품의 제목을 부르자 지옥이 텅텅 비었다는 이야기 등 『법화경』 독송과 사경의 공덕으로 지옥에 빠진 중생이 구제됐다는 것이다. 

법화신행은 궁극적으로 극락왕생을 지향한다. ‘상주 호장 김의균은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기를 즐겨 했는데, 그가 죽은 뒤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는 이야기, ‘나이 많아 벼슬에서 물러난 사람들이 법화사(法華社)를 조직하고 다달이 육재일에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읽고 해석했으며, 15일이 되면 음식을 장만해 아미타여래에게 공양하고 모두 모인 원(院)에서 재를 베풀고 밤새워 모두 함께 정토에 회향하고자 했다’는 이야기, ‘송경의 낙타교 동쪽 마을에 연화원(蓮花院)이라는 절에서 다달이 육재일에 모여 『법화경』에 읽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며 『법화경』에 의지해 정토에 회향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 등은 함께 모여 법화신행을 하며 후일에 죽음을 맞아 정토왕생을 기약하고자 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음을 알려준다. 

<아미타삼존도>(국보), 고려 14세기, 리움미술관 소장

고려 후기에는 『법화경』 독송과 사경이 정토왕생을 위한 중요한 행법이자 지옥의 중생까지도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 신행법으로 인식됐다. 결국 지옥의 중생도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관음보살과 달리 특별한 역할을 갖지 않은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려 말기 충렬·충선·충숙의 3대 국왕에게 왕사와 국사로 추앙되면서 불교계를 이끌던 천태종 고승인 무외국통(無畏國統) 정오(丁午)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백일을 기약하고 추선(追善)을 위해 베풀며 지은 시왕에게 올린 소문에서 지장보살과 시왕의 도움으로 죄장을 없애서 안양에 태어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즉, 죽음 이후의 세계인 명계(冥界)에서 시왕의 심판을 받고 죄장을 없애고 지장보살의 도움을 받아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된 극락왕생의 염원과 지장보살에 대한 믿음이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을 나란히 서 있는 불화로 구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승희 
고려시대 아미타정토불화 연구로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 용인대, 단국대, 충북대 등에서 강의, 불교미술사학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동양미술사학회 부회장, 경기도, 충청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수리기술위원, 덕성여대 연구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