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의 변호인, 지장] 지장성지

도솔산 참당암·오대산 지장암 떠오르는 금수산 정방사

2022-01-24     유동영

선운사와 참당암을 창건한 검단 선사가 열반에 들 때임을 알아차리고, 사부대중을 불러 이른다. “나의 육신은 제행무상에 의해 멸하지만, 영혼은 도솔산의 산신이 되어 영원히 말세 고해 중생의 지장도량을 지킬 것이다. 도솔산의 수행자들이여, 뼈를 깎는 수행 정진으로 정각을 이루고 오직 고해 중생을 위해 헌신하고 자비를 실천하라.”  

암자 뒷산이 도솔산이고 북쪽으로는 검단 선사가 소금 굽는 방법을 가르친 심원의 사등 마을이 있다. 사등 마을과 접한 줄포만을 넘으면 내소사가 있는 변산반도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전쟁물자 용도로 소나무를 베려 했으나 당시 참당암 스님들은 목숨을 걸고 지켜냈다.

절집의 고요와 정갈한 전각의 모습은 분 단위로 바삐 움직이는 숨은 손길들이 있어서다. 도량석보다도 먼저 각 전각에 청수가 오르고 향과 초가 탄다. 선방에는 벌써 불이 켜지고 정신을 가다듬는 행선을 마친 뒤 좌선 중이다. 이렇게 세상을 깨울 준비가 돼 있는 새벽 네 시, 목탁은 비로소 부처님 전에 청정한 도량을 고하는 도량석을 시작한다. 오방으로 지극한 절을 올린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편안하소서! 이렇게 크지 않은 도량에는 활기가 돌고 종무소 옆 다각실은 사랑방이다.

아침 공양을 마치자마자 공양주 보살님은 재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머무른 사흘 내내 같은 모습이어서 공양간 한 달 일정을 적은 보드를 보았다. 삼장보살 도량답게 매일은 아니지만 재가 빼곡하게 적혀있다. 천도재가 있는 어느 하루는 스무 개가 넘는 밥공기에 숟가락이 꽂히기도 한다. 영가들이 많을 때는 그 수에 따라 밥을 담기 때문이란다. 재는 늘 암주인 법만 스님이 손수 집전한다. 선방의 스님들 또한 정성으로 영가들을 배웅한다. 

검단 선사의 서원을 품은 삼장보살 지장전

검단 선사가 동굴 속에서 좌선에 든 어느 날, 흰옷에 정병을 든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검단 선사! 그대에게 말세 중생을 구제하려는 제불 보살의 뜻을 전하오. 말세의 모든 영혼을 천도할 수 있는 지장보살이 상주하는 지장 도량을 만들어 주시오.” 이는 검단 선사의 선운사 창건설화 일부다. 도솔산 내에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모신 참당암 지장보살을 비롯해 세분의 지장보살이 머문다. 모두 국가지정 보물로 선운사 대중들은 천·지·인 삼장보살이라 부른다. 도솔암 보살님은 천장, 선운사 보살님은 지장, 그리고 참당암 보살님은 인장, 즉 지지 보살이다. 참당암 법만 스님은 이 세 분이 애초 참당암에 모셔져 있던 분이라 한다. 선운사 지장보살은 참당암에 모셔져 있던 보살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도솔암 지장보살은 참당암 스님이었던 운기 스님의 구순 친자에 의해 ‘애초 참당암에 모셔져 있던 보살님을 도솔암 부흥과 도난 대비를 위해 올려보낸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참당암 석조 보살을 옮기는 것보다 금동 보살을 옮기는 게 쉬웠을 것이다. 국내에는 삼장보살을 모신 절로 칠곡 송림사가 있으나 조선 후기에 모셨다.

명부전 지장보살과 시왕은 모두 1681년 조각승 승호 스님이 경주 불석으로 새긴 것으로 21 권속이 모셔져 있다. 돌임에도 소조나 목조인 것처럼 정교하고 매끈하게 조각돼 있다. 왜란・ 호란 양난의 참화뿐만 아니라 경신 대기근으로 100만 이상의 백성이 굶어 죽는 참사가 이어지자 이를 위로·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거행한 대 불사였던 듯하다. 지장보살 권속은 경주로부터 심원 앞바다까지 배로 모셨다.

천장보살이 머무는 도솔암 내원궁. 내원궁  뒤의 개이빨산이라 부르는 저 산 너머에 참당암이 있다.

 

오대산 남대 지장암

오대산은 신라의 자장 율사가 중대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이래 조선조까지도 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자리해 왔다. 

『지장본원경』의 지장보살을 모실 곳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남쪽이면 무방하다고 한 점을 근거로 남대 기린봉 아래에 지장도량을 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남대의 지장결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남방은 붉은색을 말하니 남대의 남쪽 면에 지장방을 두고 지장 탱화를 건다. 가운데에 지장보살을, 뒤로는 8대 보살과 이들을 에두른 1만 지장보살을 그린 탱화다. 그리고 다섯 명의 스님이 『지장경』과 『금강경』으로 염불하며 점찰예참을 외운다. 이를 금강사라 한다.’ 

시간이 흐르며 기린봉 바로 아래의 금강사는 현재의 지장암 터에 자리를 잡는다. 주 전각은 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이고 협시로는 좌측에만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 다만 우측에는 30cm가 채 되지 않은 크기의 작은 지장보살 불감이 있다. 

오대산 산내에서 지장암 계곡 부근으로 전나무가 유독 빼곡하다. 전나무는 눈이 내릴수록 꼿꼿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며 푸르다. 지장전 우측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기린선원이 있다.

 

맑고 아름다운 절 정방사 

시원한 바람과 밝은 달을 일컫는 청풍명월에서 유래한 청풍면이라지만, 굳이 그게 아니라도 호수를 따라 한가롭게 이어지는 길은 한겨울 삭풍조차 맑다. 힘차게 서 있는 의상대가 만만치 않은데도 절 마당에서 세상사 거친 숨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청풍호와 겹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마당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방사는 사계절 아름답지 않은 때가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눈앞으로 보이는 설경이 마치 해수관음의 하얀 가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언제 어느 때에 와도 풍광이 좋으니 재방문율이 높다는 게 주지 법초 스님의 자랑이다. 

주지 법초 스님은 마애 지장보살에 얽힌 이야기를 전했다. 전 주지였던 석구 스님은 지장기도를 많이 해 정방사가 관세음보살 도량임에도 원통보전 우측 바위 위에 전각을 세우고 지장전 불사를 했다. 지금처럼 바위 위에 지장보살이 음각된 것은 석구 스님이 절에 잠시 머물던 한 학생에게 원력을 세워 지장보살을 새기게 한 데서 비롯한다. 돌을 잘 다루는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다 보니, 부족하다 싶어 지금처럼 앞쪽에 따로 지장보살을 모셨다. 도난을 당한 뒤 극적으로 돌아온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님도 영험이 있지만, 요사이는 그런 지장보살님이 알려져 지장기도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불자들이 늘고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