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고통이어라_툴루즈 로트렉

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2022-02-07     보일 스님
<세탁부(Rosa la Rouge)>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홀로 앉은 남자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무희들의 춤 동작을 잡아낸다. 그의 조그마한 손에 쥐어진 데생 목탄이 덩달아 같이 춤추는 듯하다. 이따금 독한 압생트 한 잔을 들이켜지만 눈은 여전히 무희들의 몸짓을 좇는다. 크고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펼쳐지는 것들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지금 그에게는 두 가지의 움직임만이 전부다.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술잔을 들어 마시는 것. 밤새 술 마시고 그림 그리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무도회장 밖을 나선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파리,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지팡이를 짚고 몽마르트르 언덕의 새벽길을 뒤뚱거리며 힘겹게 오르고 있다. 이 남자의 본명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렉 몽파(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 Monfa, 1864~1901)’. 이름에서부터 귀족 느낌이 물씬 난다. 로트렉 스스로 매우 부담스러워했을 이름이다. 실제 명문 귀족이었지만 그의 부모는 사촌지간이었고, 로트렉은 근친혼의 결과물이었다. 그로 인해 로트렉에게 주어진 희소병 ‘농축 이골증’(현재는 로트렉 증후군이라고 함)이 가져온 병약함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로트렉은 어려서부터 자주 병마에 시달렸다. 특히 뼈가 쉽게 부서지곤 했는데, 14세에 낙상을 당해 허벅지 뼈가 성장을 멈췄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당시 귀족 남자들이라면 당연하게 즐기던 승마나 사냥 같은 거친 운동은 애당초 그가 발을 디딜 수조차 없는 영역이었다. 

평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살아간 로트렉. 그러나 가문의 천형과도 같은 지병은 오히려 그의 예술적 감성을 날카롭게 일깨웠다. 훗날 그는 만약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라고 고백했다. 진심이었다. 다리에 문제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화려한 연회장에서 귀부인들과 춤을 즐기고 낭만적인 연애에 빠져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림 같은 꿈이었다. 

프랑스 귀족이라는 자부심과 선천적 장애에서 오는 열등감은 한데 엉켜 그를 더욱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버지에게서도 무시와 경멸을 받게 된 그는 결국 절망과 모멸감 속에서 쫓겨나듯 대저택을 빠져나와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향한다. 로트렉에게 삶은 그 존재 자체로 고통이었다. 

그가 동그란 안경테 속에서 반짝이는 눈빛을 건네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예술은 어디에 있을까? 그림은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삶은 이리도 비루한 걸까? 그런데도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였던 로트렉은 세상의 조롱과 무시를 예술로 승화했다.

 

물랑 루즈, ‘벨 에포크’의 추억

때는 1889년.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유명한 에펠탑이 파리 한복판에 세워졌다. 만국박람회가 열렸던 해, 그 유명한 ‘물랑 루즈(Moulin Rouge)’라는 술집도 개업했다. 전쟁은 지나간 추억이 됐다. 경제는 잘 돌아갔고, 사람들에게는 활기찬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아름다운 시절, 말 그대로 ‘벨 에포크(Belle Epoque)’였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밤을 환하게 비추는 물랑 루즈는 새롭고 신기한 즐길 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장소였다. 예술가, 화가, 문인 등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새로운 에너지가 가득 찬 이곳. 로트렉 역시 물랑 루즈에 빠져들었다. 

당시의 물랑 루즈는 지금 상상하는 사교계 명사들이나 예술가들의 고급 살롱처럼 근사한 모습은 아니었다. 온갖 주정꾼과 부랑자, 건달들, 몸을 파는 여인들, 도박꾼들로 뒤섞인 난장판과도 같았다. 한마디로 다들 정상이 아니었다. 로트렉은 그 속에서 밑바닥 인생들의 다양한 군상을 관찰하고, 더 나아가 그들 무리 속 한 사람이 돼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러다 보니, 그의 모델들은 피사체가 되는 것에 어떤 거부감이나 거리낌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로트렉에게 일상의 내밀한 부분까지 가감 없이 내보였다. 로트렉이 그들을 작화 대상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일부가 됐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사람들에게는 저속함과 우아함,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자신감 넘치는 자태로 치마를 들어 올려 어딘가 어색한 빨간색 타이츠를 뽐내며 춤추는 라 굴뤼, 로트렉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매력적인 무희 잔 아브릴, 목 위로 얼굴이 사라지거나 못생기게 그려지기 일쑤였던 인기 가수 이베트 길베르. 다만 이베트 길베르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장갑만은 잊지 않고 그려 넣어준 덕분에 사람들은 간신히 그림의 주인공이 그녀인지 알 수 있었다. 

로트렉은 그들의 아름다움을 부각하려 애쓰지 않는다. 아니, 그 자신의 마음에 새겨지는 대로 그려낸다. 사랑하는 이들의 겉에 드러난 아름다움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응시한다. 그러면서 아름다움과 추함은 어느 존재에나 함께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아름다움 역시 갖고 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건 무척 떨리는 일이다.” 
__  툴루즈 로트렉

그가 물랑 루즈의 밝게 빛나는 가스등에만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춤사위 너머로 감춰진 하층 인생들의 쓸쓸함에도 시선을 뒀다. 로트렉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어 안아주고 어루만진다. 어쩌면 로트렉은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시선을 끄는 건 그가 만난 여인들의 뒷모습이다. <몸단장>, <세탁부>에서처럼 고된 노동에 지쳐 피로에 찌든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다. 하지만 아름답다. 관능적이어서도 아니고, 색채가 아름다워서도 아니다. 

로트렉은 <세탁부>에서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수잔 발라동의 아름다움을 그만의 시선으로 묘사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구부러진 허리. 낡은 다림판을 잡고 위태롭게 버티는 손. 하지만 그녀의 앙다문 입술과 턱선에서 강인함이 뿜어져 나온다. 머리칼로 가려진 그녀의 두 눈동자가 어떨지 쉽게 상상하게 만든다. 하루 내내 그런 모습은 아닐 테지만, 로트렉은 정확히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강렬하다. 이제 역으로 그 순간을 통해 주인공들의 내면과 고된 하루의 맥락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삶의 고통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예술은 인생의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일까. 로트렉은 스승이자 친구였던 반 고흐의 삶과도 묘하게 겹친다. 두 사람은 물랑 루즈에서 압생트를 나눠 마시며 함께 전시회를 기획할 만큼 친한 사이였다. 아쉽게도 고흐의 자살로 이뤄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로트렉도 우연의 일치인지 고흐처럼 37세를 일기로 1901년 세상을 떠난다. 알코올 중독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지 이미 오래였다. 급기야는 입원한 요양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아들이 성년이 됐음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면서 돌봐줬던 어머니 품에 안긴 채. 숨을 거두기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당신밖에 없군요. 죽는 건 너무 괴로워요.” 이보다 더 슬프고 가슴 아픈 마지막 말이 또 있을까. 

로트렉은 이렇게 한평생 세상의 조롱과 무시 속에서 살다 외롭게 고통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운명에 대한 깊은 원망과 분노를 승화시켜줬던 예술만이 그를 지켰고, 죽고 나서도 그 예술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그를 온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였을까. 로트렉에게 그림은 지겹고 오욕에 가득 찬 삶을 영원하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위로이자 위안이었다.    

“산다는 것은 충분히 슬픕니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즐겁게 나타내야 하죠.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푸른색과 붉은색 물감이 있는 것입니다.”    
__  툴루즈 로트렉

<몸단장(The Toilette)>

 

진흙 속에 핀 연꽃이여…

갈수록 세상은 편리하고, 쾌적하고, 화려해지지만 어쩐지 마음은 공허하고 쉽게 우울감에 젖어 든다. 그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각자 나름의 아픔과 뒤틀린 감정에 밤새 뒤척이며 신음하기도 한다. 누구에게 터놓고 얘기하기도 어렵고, 위안을 얻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누군가는 압생트에 의존한 로트렉처럼 술에 중독되거나 갖가지 쾌락에 탐닉하면서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과 만족도 이내 공허함을 지나 고통으로 이어진다. 도로 제자리다. 어쩌면 바로 그때가 예술이 우리를 위로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누구나 <세탁부>의 수잔 발라동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면서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슬며시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귀에 대고 속삭인다. 그는 로트렉일 수도 있고, 수잔 발라동일 수도 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삶은 이미 충분히 슬퍼. 그러니, 나도 살아내고 있으니 당신도 잘 살아. 어떻게든 살아내야지.’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밤이다. 가야산 속 매서운 찬바람에서 이름 모를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안쓰럽고 슬프게 느껴진다. 어쨌든 이 겨울을 견뎌내야 하리라. 이 어둠을 이겨내야 하리라. 친구여,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어떻게든 살아내자. 아름답고 강인하게 말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가야산 해인사승가대학에서 학인스님들에게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고 있다. 예술과 인공지능을 통해 붓다의 지혜를 찾아가는 글쓰기와 강연, 법문을 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