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한거都心閑居] 오늘의 일상 그대로가 도道

2022-02-04     석두 스님

도를 닦는 수행승들에게 옛 고승의 어록(語錄)은 수행 중에 생긴 의문을 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더 큰 미로에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전문적으로 화두 참구하는 스님에게도 쉽지 않은 어록이다 보니, 재가 불자에게는 더욱 낯설고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치열하게 공부하다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혀 이도 저도 어찌할 수 없어 거의 반송장처럼 지내본 경험이 있는 수행승들에게, 어록은 감로수 같은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이번 지면을 통해 마음공부를 지어가는 불자들에게 공부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각자에게 인식의 틀을 한번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불교 초심자에게는 더 쉽게 어록에 다가갈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한다.

어록은 ‘말씀을 담은 기록’이다. 부처와 보살의 말씀을 담은 기록을 ‘경(經)’이라 하고, 선종(禪宗) 큰스님들의 말씀을 기록한 것을 ‘어록’이라 한다. 보통 어록은 본인 스스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직계 제자들이나 유발 상좌들이 스님의 생전 법문을 채록하고 기억하다가 사후에 편집돼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예외로 『육조단경』은 혜능 스님의 생애와 법문을 사후에 정리해 출간한 것인데, ‘어록’이 아닌 ‘경’이라 붙인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선종에서 육조 스님을 부처의 지위로 격상해 귀하게 여긴다는 증표가 되겠다. 

 

평이함 속에 번뜩이는 날카로움

간단히 말하면 어록은 깨달음을 얻은 스님의 ‘일상사(日常事)’다. 깨달음을 얻은 자의 삶은 보통의 우리 삶과 어떻게 다를까? 우리는 어록을 통해 선 종장(宗匠)들의 생각과 삶을 엿보게 될 것이다. 긍정적인 ‘관종자(觀從者)’가 돼 남을 통해 내 생각과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선종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어록의 한 대목을 보자.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 껴입고
졸리면 다리 뻗고 자고
더우면 부채질한다.

임제종 양기파 선장인 백운수단(白雲守端, 1025~1072) 선사의 게송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에 빗대 ‘나의 사홍서원’이라 하신 말씀이다. 너무 쉽고 일상적인 것이라 시시하기까지 하다. 깨달은 자의 안목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이해하기 쉽다. 

그럼 다음은 어떤가?

가고 오는 것, 도 아님 없고
잡고 놓음, 다 선(禪)일세.
봄바람 푸른 풀밭 언덕에서 
다리 뻗고 한가롭게 낮잠 잔다.

이것은 구한말 해담치익(海曇致益, 1862~1942) 선사의 게송이다.

‘이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평이하다. 그 평이함 속에 번뜩이는 날카로움이 있다. 선은 바로 그런 것이다. 불교를 당·송대에 중국화한 선은 ‘일상선(日常禪)’을 주창한다.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생들에게는 고색창연한 말보다 하루 한 끼의 식사가 부처와 보살의 자비이다.

배고픔은 원초적이다. 원초적인 것은 분별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본능에 따르게 된다. 본능은 죄악이 아니다. 본능은 순수하다. 본능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없다. 선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과 흡사하다. 먹지 않으면 생명은 소멸한다. 자지 않으면 명철한 판단을 할 수 없다. 중생의 몸을 가진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배고픔과 목마름은 자연의 필연적 법칙이다. 세상 그 누구도 이 자연의 필연적 현상을 피할 수 없다. 부처도, 보살도, 조사도….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 그것이 조작 없는 삶을 사는, 무위법(無爲法)의 삶을 사는 도학인(道學人)의 모습이다. 일상생활 전부를 도(道)로 삼는 선풍(禪風)은 마조도일(馬祖導一, 709~788) 스님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마조 스님이 대중에게 말씀했다.

“도를 닦아 익힐 필요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 더러움에 물든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바로 더러움에 물든다’ 하는 것이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평소의 이 마음이 바로 도이다. 평소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단견과 상견을 버리며, ‘평범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경에 이런 말이 있다. 범부처럼 행하지도 않고 성인 현자처럼 행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깨달음의 진면목

20여 년의 승려 생활 중 참으로 다양한 신도들을 접하게 된다. 승려인 나보다 더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도 있고, 이건 아니다 싶은 이도 있다. 그중에 오늘의 주제에 부합되는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신도들이 대웅전 안에서 서로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서로 좌복을 밀치고 당기는 모습을 보았을 때,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인천(人天)의 사표(師表)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스님들도 모두가 법답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모습은 가장 충격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돌이켜 근원의 참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전부”라고 한 선의 종장들 어록 말씀이 무색하게 들릴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선은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진리의 모습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자고, 먹고, 사랑하고, 똥 싸는 이 모든 원초적인 행위는 도를 이루기 위한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선의 보고(寶庫)인 것이다. 귀하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가득 담은 창고를 가까이 두고, 우리는 남의 창고를 기웃거리고 탐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한번 살펴보았으면 한다.

마조 스님의 유발 상좌인 방온 거사의 오도송에 이러한 깨달음의 진면목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날마다 하는 일 별다를 것 없고
오직 나 스스로 탈 없이 지낼 뿐
무엇 하나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니
어디서 무엇 해도 드러나거나 
어그러짐이 없다.
붉은색이니 자주색이니 누가 이름 지었는가?
산에는 티끌 한 점 자취가 없네.
나의 신통과 묘용은 
마실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다.

 

석두 스님
1998년 법주사로 출가했으며 해인사 봉암사 등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불광사, 조계종 포교원 소임을 역임했으며, 현재 봉은사 포교국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