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인생상담] 그가 사랑했던 것

2022-01-14     임인구
부처님이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고요히 열반에 들자 모든 이가 비통에 잠겼다. 통도사 팔상도 중 쌍림열반상, 통도사 성보박물관. 

“쌍수에 침상을 펴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일렀다. 그리고 곧 노끈 침상에 올라 오른쪽 옆으로 누워 얼굴은 서쪽으로, 머리는 북쪽에 두고 다리를 포갰다. 초저녁이 지나자 별과 달빛이 빛을 잃었다. 숲의 새와 짐승들도 고요했다.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에게 일렀다. 

“구족계를 공경하되 세존의 횃불이 빛나듯 하라. 내가 세상을 버린 뒤에 내 말을 순종해 어기지 말라. 몸과 입과 마음을 깨끗이 단속해 이익을 버리고 크게 편함을 구하라. 온 세상이 죽음 불로 타니 어떤 이가 편안히 잠들까. 모름지기 번뇌의 때를 버려라. 잠을 깨고 번뇌를 없애라.” 

부처님께서 멸도했다. 모든 비구는 구슬피 통곡하고 기운을 잃었다. 몸을 땅에 던져 뒹굴고 부르짖으며 스스로 억제하지 못했다. 남녀노소 모두 슬픔을 못 이겨 미치듯 어지러워했다. 옷을 찢고 이를 깨물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을 긁어 상처를 내기도 했다. 가슴을 치고 하늘을 향해 부처님 덕을 찬탄했다. 

“아아, 슬프다. 부처님이시오. 중생들이 우러러 의지하옵거니 내어 버리고 가심이 어찌 이리 빠르신가. 길이 끊어져 다시 뵐 수 없네.”
__ 『불본행경』 「대멸품」, 『불설장아함경』 권4 「유행경」 각색

 

듣고 싶은 말

“내 탓이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잘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더 많이 행복하게 해줬어야 했는데.” “얼마나 아프고 쓸쓸할까.”

10년 넘게 함께해온 고양이의 죽음을 앞두고, 후회와 번민 속에 무력하게 앉아 있는 이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제 작은 숨소리를 내며 조용히 누워있는 고양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그일 뿐이다. 그렇게 고양이를 한정 없이 어루만지다가, 또 한정 없이 울다가 그 역시 고양이의 옆에 지친 몸을 누이며 어느덧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꿈속에서도 그는 죽음이 머지않은 고양이를 쓰다듬다 잠들어 있다. 그렇게 울다 지쳐 고요히 잠든 그의 옆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홀연히 일어나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앉는다. 그리고는 그의 이마를 부드럽게 앞발로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없어도 너무 외로워하지 마.”

그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다. 꿈에서 깨어난다. 눈을 떠보니, 고양이가 편안한 얼굴로 안식에 들어있다. 떠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만남의 눈물이다. 죽어가는 것에게 어떤 것을 해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실한 그 대상에게 귀한 어떤 것을 받던 존재가 자신임을 알게 된 만남의 증표가 이 눈물이다. 

‘내가 너를 지켜주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실은 네가 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네가 떠나게 된 것이 아니라, 떠나는 네가 떠나면서도 나를 지켜주고 있었구나.’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자기 앞에서 죽어간 존재는 바로 자신이며, 바로 유한한 필멸자였다. 중생의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중생을 깨어나게 한다. 자신이 중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가 이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어떤 것의 죽음은, 그 죽음을 지켜보는 우리 자신을 유한자라고 다시 일깨운다. 중생의 자리를 다시 확인하게끔 한다. 그래서 모든 죽음은 자기 죽음에 대한 자각이다. 반드시 죽게 될 운명 속에 놓인 유한자로서, 자신이 듣고 싶은 아주 상냥한 말이 있었다는 사실도 자각한다. 유한자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친절하고 자애로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한다. 중생으로서 이런 자각은 죽어간 그것이 우리에게 전하고 간 가장 큰 선물이다.

 

중생의 길

중국 선불교의 육조(六祖), 혜능 선사는 자신의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 중생의 길에 대해 아주 친절하게 가르침을 전한다.

법해가 여쭈었다.

“큰스님께서 이제 가시면 무슨 법을 부촉하여 남기시어, 뒤 세상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을 보게 하시렵니까?”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뒤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찾고자 할진대는 오직 자기 마음의 중생을 알라. 그러면 곧 능히 부처를 알게 되는 것이니, 곧 중생이 있음을 인연하기 때문이며,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의 마음이 없느니라. 미혹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깨치면 중생이 부처이며, 우치(愚癡, 사상에 혹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지혜로우면 중생이 부처이니라.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마음이 평등하면 중생이 부처이니, 한평생 마음이 험악하면 부처가 중생 속에 있도다. 만약 한 생각 깨쳐 평등하면 곧 중생이 스스로 부처이니, 내 마음에 스스로 부처가 있음이라 자기 부처가 참 부처이니, 만약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느 곳을 향하여 부처를 구하리오.”

__ 『육조단경』 「진불」 각색

혜능 선사는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중생을 알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곧, 자신이 부처임을 알고자 한다면 자신이 중생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혜능 선사에게 있어 부처와 중생은 하나가 강화하면, 다른 하나는 약화하는 모순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를 강화하면 다른 것도 강화하는 관계다. 반대처럼 보이는 게 서로를 살리고 있는 상호관계성을 띤다.

엄밀히 따지면 관계도 아니다.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둘처럼 보이지만 하나다. 따라서 중생에서 멀어지려고 애쓸수록 부처에서도 멀어진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이기 때문이다. 

‘중생인 만큼 부처’라는 의미는 중생인 만큼 부처를 부르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부르는 자’가 있어 ‘불리는 자’는 그 부름을 듣고 이 자리로 불려온다. 중생은 부르는 자다. 청하는 자다. 무엇으로 청하고 있는가?

바로 자신의 유한성이다. 덜 떨어지고, 모자라고, 못나고, 초라하고, 부족하고, 비겁하고, 나약하고, 의존적이고, 소심하고, 겁 많고, 어리석고, 비루하고, 한심한 그 모든 각양각색의 얼굴들로 중생은 부르고 또 부른다.

타자 철학자인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유한자의 얼굴로 우리에게 명령한다고. 그 생생한 얼굴이 말하는 명령의 내용은 이러하다.

“당신은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무고한 필멸자의 얼굴을 함부로 모질게 대할 수 없다. 그것이 반드시 죽게 될 이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렇게 바로 보게 되었을 때, 어떻게 고통을 더 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명령은 동시에 물음이기도 하다. 

“당신은 이것을 정말로 죽일 수 있습니까?” 

필멸할 운명의 유한자 얼굴 앞에 서서 진실한 방식으로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묻는 분명한 물음이다. 그렇게 유한자 앞에, 중생 앞에 불려와 물음을 받은 이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없어도 너무 외로워하지 마.”

자신 또한 유한자의 운명 속에서 떠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 모든 죽어가는 것의 아픈 가슴에 상냥할 수 있는 그 존재의 면모, 그것이 부처다.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이로부터 바로 이 선물을 받은 것이다.

중생의 길이란 바로 받는 길이다. 받을 중생이 있어야 줄 부처가 출현한다. 잘 받고자 하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부처는 비로소 선물이 된다. 우리 곁을 떠나간 그가 실은 우리의 삶에 둘도 없을 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본 눈물이 흐를 때, 우리는 정말로 눈을 뜬 것이다. 그가 부처로서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녀간 사실을 정말로 사실로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선물이었다는 것을 알아본 현실 속에서 선물은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으로 중생에게 남는다. 

스승 부처님의 열반을 지켜보는 제자들이 슬픔에 잠겨 비통해 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도 중 쌍림열반상, 통도사 성보박물관.

 

길을 잇는 것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결코, 끊어질 수 없다. 여기에 절대 잃을 수 없는 선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선물의 이름은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이가 전한 마음과 함께,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탐구를 자연스레 시작한다. 그가 어떤 것을 보며 웃었는지, 무엇을 할 때 정말 행복했는지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문득 눈치챈다. 그가 사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사랑의 본질은 그라고 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데 있다. 놀랍게도 그가 사랑한 그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문득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를 닮아간다. 

분명하게 그가 사랑했던 것이 있다. 부처가 사랑했던 길이 있다. 그 길은 죽어갈 모든 생명을 향한 길이었고, 중생을 향한 길이었다. 중생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로 향해오는 길이었다. 인간을 아주 많이 사랑한 이가 반가운 선물처럼 인간을 찾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의 가장 중심에, 길이 뻗어 나간 가장 정확한 그 목적지에, 바로 우리 자신이 앉아 있었다. 덜 떨어지고, 모자라고, 못나고, 초라하고, 부족하고, 비겁하고, 나약하고, 의존적이고, 소심하고, 겁 많고, 어리석고, 비루하고, 한심한 그 모든 얼굴로 그저 속상하게 앉아 있었다. 그 외로운 얼굴만을 시선에 가득 담으며, 부처는 과녁을 향해 흔들림 없는 화살처럼 걸어오고 있었다. 끊김 없는 길을 끊임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가볍고 고요한 그 발걸음마저 상냥했다.

그렇게 부처가 가장 사랑한 길은 우리 자신에게로 오는 그 길이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바로 우리였다. 그가 사랑한 것을 사랑하는 것, 여기에 사랑의 정수가 있다.

그가 그토록 끊이지 않는 마음으로 한평생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된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나다. 그래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나 자신을 귀하게 삼으면 그이며, 또 나다. 가장 나이면서 바로 그이다. 어디 가지 않았다.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난 적도 없는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나로 사는 길이, 나이자 그를 사랑하는 길인 까닭이다. 둘이자 하나의 길인 이유다. 나를 그와 잇고, 중생을 부처와 잇고, 둘을 하나로 잇는 길, 그 길이 바로 사랑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바로 나였음을…. 떠나는 그 마지막에서도 고운 선물로 전하려던 그 방식, 바로 그 길이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사랑이 우리를 잇고, 길은 영원히 이어진다. 

한결같은 이 길 위로, 이 두 손 위에 떠나간 모든 것을 정성스럽게 모시며, 이 두 발로 그가 사랑한 길을 걷는다. 내가 사랑하는 길을 걷는다. 그다운 나로서. 그리운 나로서. 그려간다.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것의 자취를.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