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가는 종이 재현하는 영담 스님

불광초대석 | 영담한지박물관 운영하는 영담 스님

2022-01-07     김남수

영담한지미술관은 아담하지만 이름있는 미술관이다. 스님은 출가 이전부터 한지와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수행자로서 종이를 만들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통 종이의 맥을 스님들이 지켜왔다는 자부심이었다.

“아버님이 한의사셨어요. 한약방에 첩약을 싸는 종이를 순지라고 하는데, 전통한지를 사용했습니다. 한지는 닥섬유가 얼기설기 얽혀 있어 그 사이에 미세한 공기구멍이 있어요. 약탕기에 한약을 끓일 때, 한지를 약탕기 뚜껑 삼아 입구를 막아서 끓이면 습도 조절이 잘돼 약이 잘 다려지곤 했지요. 초등학생 시절 어느 떠돌이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됐는데, 그분이 양평 무내미에서 종이를 뜨던 통꾼이었어요. 아버님은 그 할아버지에게 종이 뜨는 시설을 간단히 갖춰 주고 종이를 만들게 하셨어요. 그 덕분에 종이 뜨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한지에 대한 애정을 물었더니 어린 시절의 인연을 꺼낸다. 옛적에는 스님들이 종이를 만들어 왕실과 관에 납품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옛 스님들의 맥을 잇고 싶었다고.

“옛날에는‘한지’라는 단어가 없었어요. 그냥 종이 하면 ‘한지’를 말했죠. 용도와 재질, 지역에 따라 문창호지, 벽지, 책지, 다리니지, 혼서지, 태지, 구름종이, 야들종이 등 이름이 다양했습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종이’의 의미가 변하고, 옛날 종이에 굳이 한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지요. 한지를 제작할 때, 일본식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은 기본적으로 종이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종이는 불교 경전으로, 1,300여 년 전 신라 경덕왕 시절 사경된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담은 한지를 재현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1984년, 원주에서 종이 만들기를 시작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박경리 소설가가 있던 곳이었다. 

“닥나무를 삶아 종이가 나오기까지 사람의 손이 99번, 마지막으로 종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 번 더 만져서 ‘백지(百紙)’라고 합니다.”

 

천년 가는 종이

닥나무를 삶아 종이가 나오기까지 지장(紙匠, 전통 한지의 제조기능을 가진 장인) 한 명을 포함해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루는데, 스님은 두 명의 지장과 일을 했다. 스님까지 합하면 11명. 주변의 도움도 있었지만, 겁 없이 덤비던 시절이다. 닥종이는 닥나무를 삶아 종이가 나오기까지 사람 손을 99번 거친다. 마지막으로 종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한 번 더 만져 총 100번을 거친다 해서 ‘백지(百紙)’라고 한다.

당시 지장의 급여는 종이의 장 단위로 책정했는데, 그러다 보니 지장들이 종이의 질보다는 양을 우선하게 되더란다. 스님은 지장들이 하루에 만들던 최대량을 기준으로 책정한 월급을 주면서 ‘종이 질’을 우선시했다. 그러면서 스님이 만든 종이는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님이 제대로 종이를 알리게 된 것은 1986년부터다. 당시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을 대통령에게 보여줬다. 

“대통령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관공서에 불려갔습니다. 『직지심경』과 『왕오천축국전』을 외국과 국내 박물관에 보낼 건데, 이를 인쇄하는 데 사용할 한지가 필요했던 거죠. 그렇게 관공서에 한지를 납품하게 됐어요. 그런데 『직지심경』만 하더라도 800년이 지났으니 종이가 조금 누렇게 변하잖아요? 제가 만든 종이는 하얗고. 그대로 인쇄하면 당연히 질감이 차이 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왜 종이의 질감이 다르냐며 묻기도 했죠.”

그만큼 전통 종이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스님이 만든 종이는 유명세를 탔다. 동국대에서 개교 80주년 기념으로 『신수화엄경』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영인(影印, 인쇄물의 원본을 사진으로 복사해 인쇄하는 일)하는 데도 참여했다. 스님의 발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종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한지를 재현하고 싶어한다.

 

한지를 예술 작품으로

지장들이 종이를 뜨면 남는 종이와 버려지는 종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닥섬유에 나무, 풀, 흙, 돌가루로 염색을 시도해봤다. 종이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해 본 이런저런 시도였다. 염색한 종이는 뜻밖에 별스러운 종이가 됐다. 스님의 첫 작품이었다.

그 첫 작품을 넘겨준 사람이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유명 사진작가 ‘애드워드 김’이다. 80년대 후반 한지를 촬영하기 위해 스님을 찾아왔는데, 종이를 넘겨주면서 스님의 사인을 요청하더란다. 작품값 30만 원과 함께. 

“처음엔 일반적인 종이를 얻기 위해 온 사람들이 나중에는 염색한 종이에 관심을 두더라고요. 제가 사인을 해 본 적이 있겠어요? 그때가 처음이었죠. 염색한 종이가 작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서는 계속 작품을 만들었어요. 염색한 종이가 일반 종이로 얻는 수익보다 훨씬 컸고요.” 

스님은 미술을 별도로 배운 적이 없다. 감각적으로 염색한 종이를 다루다 보니 어느새 작가가 됐다.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전시도 하고 한지와 관련된 특강도 많이 다녔다.

“국제전에 가면 우리 종이가 반응이 좋아요. 많이 팔리기도 하지만 남는 종이는 그대로 두고 와서 돌아올 때 가져오는 게 없어요.”

스님은 최근 청도에 있는 어른들과 뜻깊은 일도 했다고 자랑한다. 붓과 크레파스를 잡을 기회조차 없었던 80~90세의 할매, 할배들. 스님은 이들 가슴속에 있는 추억과 한을 직접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이 그림들이 작품이 돼 작품집을 냈는데, 유난히 마음에 쓰인다고.

“먼저 떠난 딸을 표현한 동그라미, 청도에서 대구로 유학 가기 위해 3시간 넘게 걸어간 산길과 고향을 떠나는 열차에서 바라본 어머니의 뒷모습, 동네 오빠가 꺾어 준 감나무 줄기의 풋풋한 첫사랑 냄새. 이런 마음들이 책에 담겼어요. 그분들에게도 큰 위안이 됐을 거고, 글을 쓰는 저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한지’라는 단어가 없었어요.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종이의 의미가 변하고, 옛날 종이에 굳이 한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지요.” 

 

지천포오백(紙千袍五百)

조선시대 스님들은 제지 부역이 너무 힘들어 폐사 위기에 몰렸을 때, 목숨 걸고 사대문 안에 들어와 양반에게 상소를 올렸다. 영담 스님은 그 상소문을  읽으며 옛 스님들의 맥을 이어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강원을 졸업하고 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살림’을 시작했다. 

  “‘지천포오백(紙千袍五百)’이라고, 옷감은 500년 가지만 종이는 1,000년 갑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종이 만드는 곳이 많지 않아요. 종이에 옛 조상들의 지혜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스님은 현재 한지미술관 부설로 ‘섶마닥종이문화원’을 건립 중이다. 옆으로 선암서원이 있고, 앞으로는 양반 고택이 서너 채 있다. 가까이는 운문사가 있고, 조금 멀리는 부처님의 땅, 경주가 있다. 철은 오래지 않아 부식되지만, 종이는 1,000년이 넘어도 그대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부처님 말씀은 종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곳에 스님이 천년 한지의 꿈을 그리고 있다.  

가까이는 운문사가 있고, 조금 멀리는 부처님의 땅, 경주가 있다. 그곳에서 천년 한지의 꿈을 그리고 있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