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품은 지리산] 지리산의 암자들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이 집이요

2021-12-28     이광이
우리나라의 일반적 탑과 다른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삼층석탑이 있는 실상사 백장암. 실상산문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지리산은 동으로 머리를 들고, 서로 꼬리를 내려 엎드린 거대한 황소 모양의 지형이다. 표피는 잿빛 초록이고, 육신은 사방팔방 비탈을 이루며 헤아릴 수 없는 겹겹의 주름 폭을 이루고 있다. 소의 등뼈를 따라 구불구불 끊어질 듯 이어지며 좁은 길이 나 있는 능선이, 사람들이 허허로울 때 걷는 종주 1백 리 길이다. 그리고 소의 육신, 산과 골과 곡을 감싸 안은 너른 품이 21개 구간, 7백 리에 이르는 둘레길이다. 이 길을 쫙 펴면 지리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거리다. 지리산은 구례 하동 남사면을 ‘겉지리’, 남원 함양 산청의 북사면을 ‘속지리’라 한다. 겉지리는 양명(陽明)해 예로부터 절집이 많았고, 속지리는 해가 짧아 당집(巫堂)이 많았다고 한다. 

지리산 산사는 크게 4개 본사 권역으로 나뉜다. 남사면 서편에 화엄사, 동편에 쌍계사의 두 본사가 수많은 사찰과 암자를 거느리고 있고, 북사면은 동편이 벽송사, 대원사가 자리한 해인사 권역이고, 서편이 실상사가 있는 금산사 권역이다. 암자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산모퉁이 너머 비탈이 치마폭처럼 휘어지는 안쪽에 비바람을 피할 작고 아늑한 공간이 있게 마련인데, 암자는 영락없이 그곳에 있다. 찻길이 끊기고 꽤나 걸어 들어가야 하는 암자가 진짜 암자이지만 노령화된 우리 불교 형편에 찾는 이가 드물어, 대개 가난하게 산다. 

스님 혼자 사는 암자에 갈 때는 무엇을 얻어 올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갖다줄 것인가를 생각해 쌀이나 마른 소채를 싸서 가지고 가면, 인법당에 불전 놓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 우리는 그저 물처럼 청한 기운 하나 느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회향이 어디 있을까 싶다. 오랜 세월 불교를 지탱하는 힘이, 오후 4시면 해가 넘어가는 깊은 암자에서 무욕의 삶을 사는 가난한 스님들 덕분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남사면 서편 암자들 

화엄사는 산내 암자들이 많다. 지장암, 금정암, 봉천암, 길상암, 미타암, 청계암, 연기암 등. 이런 암자들이 본사 좌우로 늘어서 있어 힘 안 들이고 두루 들러보면 좋다. 화엄사 뒤편에 삼층석탑과 기둥으로 쓰인 늙은 모과나무가 일품인 곳, 구층암이 있다. 암주가 덕제 스님이다. 화엄사 야생차를 총괄하는 스님이다. 화엄사와 쌍계사 일대가 우리나라 차의 시배지이니 꼭 들러 차를 한잔 얻어 마시고 가야 한다. 어느 해 차 박람회 때 부스를 차리고 나온 덕제 스님이 남이 먹다 남긴 자장면을 스스럼없이 먹어 치우는 것을 보면서 ‘스님이 도인이구나’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성삼재로 입산해 30분 걷다가 남으로 꺾어 내려가면 ‘지리 10대(臺)’ 중 하나로 꼽히는 ‘우번대’가 있다. 신라 우번 선사가 토굴을 짓고 살았고, 근래 경허의 삼월(三月) 중 하나인 수월 스님이 머물다 가기도 했다. 지금은 팔순의 노스님 혼자 산다. 법종 스님이다. 스님은 1970년대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화엄사, 범어사에 살다가 여기 들어온 지 40여 년으로 반생을 지리산에서 보냈다. 

 우번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모습
우번암

우번대는 마당에서 보면 숲에 가려 풍경이 별것이 없지만 5분쯤 걸어 남쪽 높은 곳에 이르면 과연 이곳이 전설의 ‘아란야’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눈 내린 산맥 위에 바람이 불고, 바람결에 운무가 흩어지는 변화무쌍한 풍경들. 겹겹이 굽이치는 봉우리들이 밀려오는 파도의 포말처럼, 꼭 정토의 바다 같다. 멀리 붉게 물든 산하, 광주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비경 중의 비경이다. 

스님이 “정말 극락 같지요?” 한다. 꼭 한번은 호텔서 자보고 싶어 도반스님에게 부탁해 대전 유성 최고급 호텔에 들었는데, 별것도 없더라, 냉장고에 든 것은 비싸기만 하고, 마음은 불편하더라, 그래서 그날 밤에 방을 나와 버스 타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산에 사는 사람은 산이 집이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능선을 따라 3시간 정도 걷다가 북사면으로 내려가면 지리산의 제2봉, 반야봉 아래 ‘묘향대’가 있다. 예로부터 하늘이 숨겨 놓은 땅, 이 땅의 아란야로 딱 둘을 꼽으면 이북의 묘향산 법왕대와 이남의 지리산 묘향대였다. 어느 선방은 1년, 어느 암자는 한 달, 어느 토굴은 열흘 안에 도통한다는 구전들이 구구한바, 이곳은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그야말로 전설의 성지다. 호림 스님과 처사님 둘이 산다.  

묘향대 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이곳은 태양광 덕분에 전기 맛은 보는데 법당과 방에 등 켜고, 라디오 듣고, 휴대전화 충전하는 데 쓴다. 여기서는 휴대전화가 필수품이다. 험한 산길로 5시간 걸리는 암자를 누가 찾아오겠는가? 초파일 절에 온 사람이 많아야 5명이라 하니, 살길이 막막한데 그래도 살아가는 비법이 있다. 스님이 휴대전화로 법문을 하는 것이다. 전화 법문을 하면, 보시는 계좌로 들어온다. 문명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최첨단의 텔레콤으로 소통이 이뤄지고 있으니, 산꼭대기 암자는 그 덕에 살아간다. 절 아래에는 빨치산의 토굴이었던 ‘박영발 비트’가 남아있다.

 

남사면 동편 암자들

하동 쌍계사 권역으로 넘어간다. 칠불사 삼거리 의신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암자보다 작은 토굴, ‘연암난야’가 있다. 다섯 평의 작은 집. 흉내만 낸 마루와 부엌, 둘 눕기도 비좁은 인법당 하나, 부처님은 벽장 속에 앉아 계신다. ‘도현 스님 토굴’이다. 스님은 1963년 범어사로 출가한 일흔 노장으로 쌍계사 안거 기념사진 찍을 때 한가운데 앉는 큰스님이다.  

“다섯 평이면 대궐이지. 전에 살던 집이 군불 넣어놓고 마을에 잠깐 내려갔다 온 사이에 홀라당 타버린 거야. 내가 지리산을 다 태워 먹을 뻔했어. 집만 타서 다행이었지. 전기도 없이 18년을 살았는데 지금은 호텔이야. 불보살이 다녀가신 게라.”  

마당에 파초 한그루, 우산 같은 나뭇잎 여전히 푸르다. 

“법정 스님이랑 불일암 살 때도 마당에 파초가 있었지. 범어사 선원에도 있었고, 속이 비었어. 양파처럼 아무것도 없어. 혜가가 달마에게 팔 하나를 바치면서 그 팔을 얹어 놓은 것이 파초였지. 무아(無我)가 그런 거라.”  

이 길에 들어섰으면 내친김에 아자방의 ‘칠불사’에도 들를 일이다. ‘버금 아(亞)’자 모양의 이 선방은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이나 지속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갈 때마다 구들만 들여다보고 있던 주지 도응 스님이 최근에 천년의 구들 비밀을 파헤쳤다고 하니 그 방에 앉아보고 싶다. 

또 한 곳, 서산 대사 출가 암자가 있다. 의신마을 입구에서 우로 30분 오르면 ‘원통암’이 나온다. 칠불사 선원장 진현 스님이 혼자 산다. 여름·겨울 안거는 칠불사에서 정좌하고, 해제되는 봄·가을에 암자로 돌아오니 때를 살펴 가야 한다. 선승 특유의 웃음이 맑은 스님이다. 방대한 불경을 뒤져 조선시대 『제월당대사집』에서 ‘의숭인장로낙발우원통암(依崇印長老落髮于圓通庵)’ 한 문장을 찾아냄으로써 이곳이 서산 대사의 출가지임을 고증했다. 하동 군수가 산에 찻길을 내어준다는 것을 암자는 걸어 다녀야 한다고 거절한 노장님이다. 차가 유명한 곳이라 꼭 들러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가면 좋다.

 

북사면 동편 암자들

지리산 북편 함양이다. 영원사에 차를 대고 ‘상무주암’에 오른다. 빗기재까지 1.8km, 30여 분 가는 길이 급하고 힘들다. 여기를 올라채면 길은 평탄하고, 땅에는 수북이 낙엽이 쌓여 레드카펫을 걷는 듯하고,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  

상무주암은 수좌들 사이에서 ‘천하제일의 갑지’로 꼽히는데 지리산의 은자 현기 스님이 40여 년을 버티고 있어, 그림의 떡이라 한다. 몇 해 전에 “어찌 홀로 그 오랜 세월을 사셨느냐?”고 물었더니, “글쎄, 한 사나흘 지난 것 같은데…”하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1198년 봄, 한 스님이 가사 한 벌, 바리때 하나 들고 상무주암에 들어왔다.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니, 참선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선객[痴禪]이 되겠는가, 글만 찾아 헤매는 미친 혜자[狂慧]가 되겠는가?”라고 사자후를 토하며 결사의 이론적 체계를 완성하니, 보조지눌이다. 그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유명한 결사문의 첫 문장을 여기서 쓴 뒤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두 자루의 심검(心劍)을 들고 송광사로 내려가 고려 불교를 나락에서 구하는 결사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금대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모습
금대암 

지리산은 북쪽 어느 정점에 서면 굽이굽이 흐르는 100리길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한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 조망이 압권인데 포인트가 3곳 있다. 하나는 원경으로 지리산 제1관문이라 하는 ‘오도재(悟道峙)’의 풍광이다. 능선의 곡선들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두 번째가 조금 가까이 조망할 수 있는 ‘금대암’ 자리다. 금대는 부처님 앉는 자리라는 뜻이니, 금대에서 바라보는 주능선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제일의 포인트가 상무주암 자리다. 상무주암에서는 오른손을 뻗으면 반야봉에 닿을 듯하고, 왼발을 내밀면 천왕봉에 닿을 듯이 가깝게 느껴진다. 공연 좌석으로 치면 상무주가 R석이고, 금대가 S석, 오도재가 A석쯤 되는 것이다.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다가 좌로 올라가면 금대암과 안국사가 있다. 차가 들어가는 곳이고 두 암자가 가까이 있어 두루 들러볼 만하다. 

안국사는 신라 말에 창건해 금대암 등 부속암자를 거느린 꽤 큰 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근래 재건했다. 안국사 마당에 서면 지리산 능선의 툭 트인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삼정산이 길게 앉아 장쾌한 멋을 준다. 용타 스님의 상좌이자 청화 스님의 손상좌인 현보 스님이 살고 있다. 전남대 72학번으로 5·18의 마지막 수배자 고(故) 윤한봉 열사와 동시대를 보낸 운동권 출신이다. 출가하고 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는 평생 거지였고, 칠십 넘어 이제야 탐(貪)을 좀 벗어나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거지가 됐다는 스님.  

“암자는 보림(保任)하는 곳이거든. 깨친 후에 자성을 보호하는, 말하자면 숙성시키는 곳이라. 숙성시간이 긴 술이 좋은 술이지. 진짜 거지가 되어보려고 들어왔는데 진짜 거지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고. 더 오래 숙성시키면서, 그러다가 내 생은 여기서 끝나겠지….” 
스님 말씀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북사면 서편 암자들

남원 실상사 권역이다. 실상사는 7암자 순례길의 시작이자 끝이다. 윤달 삼사(三寺) 순례만 해도 무병장수에 극락왕생이라는데, 하루 7암자는 그만 못할 까닭이 없다. 실상사→약수암→삼불사→문수암→상무주암→영원사→도솔암. 지리산 북부 삼정능선을 오르는 약 16km의 숲길이다. 이른 아침부터 빠듯하게 걸어야 다 돌 수 있다. 도솔암에서 거꾸로 내려오는 길도 좋다. 

실상사의 산내암자로는 약수암과 서진암이 있고,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백장암이다. 백장암에는 통일신라 9세기 ‘이형석탑(異形石塔)’의 걸작으로 불리는 국보 삼층석탑이 유명하다. 백장암은 우리나라 구산선문 가운데 선종이 제일 먼저 들어온 실상산문의 천년가람이다. 선종은 당시 ‘왕즉불(王卽佛)’의 교종을 비판하면서 ‘민즉불(民卽佛)’의 기치를 들고 들어온 혁명적 사상 같은 것이었다.

“저는 ‘행선(行禪)’입니다. 좌선(坐禪)이 아니고. 참선이 눈만 멀뚱멀뚱 뜨고 우두커니 앉아서 되는 게 아니라 걸어 다니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면서 송광사 은사스님이 ‘행선’이라고 지어줬지요. 그래서 늘 왔다 갔다 합니다.” 

행선 스님은 백장암 암주다. 여기 머문 지 5년. 여느 수좌처럼 홀로 안거를 나려고 백장암에 왔다가 눌러앉은 것이 아니라 다른 수좌스님들과 뜻을 모아 백장암을 ‘접수’한 것이다. ‘지금 승가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 타성에 젖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가는 길이 부처님이 걸었던 그 길인가?’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며, 7인의 스님들이 기존의 수좌 대열에서 이탈해 작은 ‘결사’를 벌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층암에서 백장암까지, 지리산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암자는 스님 혼자 수행하는 곳이라 가면 꺼릴 것 같지만, 속으로는 좋아한다. 스님도 사람이라, 외로움을 서로 덜고 오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 바퀴 돌아 어느덧 새해가 됐다. 연암난야 도현 스님께 새해의 의미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제는 섣달그믐, 오늘은 정월 초하루,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 그날이 설날이지”   

 

사진. 유동영

 

이광이
해남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대흥사에 자주 다녔다.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했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 도법 스님 밑에서 ‘자성쇄신결사’ 일을 도왔다. 법명은 효천(曉天). 글 쓰는 일을 주로 한다. 피아노에 관한 동화책 한 권, 도법 스님·윤구병 선생과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정리한 책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