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품은 지리산] 백두대간의 종착지

오랜 마음속의 어머니 지리산

2021-12-28     박두규

 

지리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를 품어온 산이다. 그 옛날 산 아래 세상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왔다. 절망의 끝에서 차마 버릴 수 없는 목숨 하나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 스스로의 어둠을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줬다. 지금도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자들이 지리산에 온다. 세상 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오랜 마음 속 어머니처럼 부르지 않아도 항상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품에 안아준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산 빛 너울이 아프다.

산 뒤에서 오르고 산 뒤로 지는 줄 알았던 해가 불현듯 솟았다 불현듯 사라진다. 찰나의 생멸에 오직 당당한 자 무엇인가?

 

지리산의 이름

우리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실제로 그 품이 넓어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약 483km2(1억 4,600여 평)이라고 한다. 이 산 속에 나무며 짐승이며 꽃이며 벌레들 그 무수한 생명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생명공동체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이 지리산 자락 골짜기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 자본의 폭력과 병든 도시를 외면하고 귀촌한 사람들까지 하나의 지리산이 되어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들은 산이 거느린 어머니의 품성을 배우고 숲의 모든 생명과 하나로 어울려 산다. 인간의 이기적 산물인 자본의 풍요와 편리함에 묻히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이런 이들이야말로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며 지이산(智異山)의 사람들이 아닌가. 

지리산은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지리산의 ‘지리’ 한자 표기는 智異, 智利, 知異, 地理, 地利, 地而 등 다양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쌍계사에 있는 국보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보인다. 이 탑의 비문은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썼는데 ‘지리산(智異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에도 다른 한자 표기와 함께 ‘지리산(智異山)’표기가 나온다고 하니 ‘智異山’ 표기가 오랫동안 일관되게 쓰인 듯하다. 특히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부르며 지혜의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 해 지리산의 ‘지리’는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에서 지(智)와 이(利)를 빌려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나 이는 후대에 불가(佛家)적 입장에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리산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상황에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게 됐다. 지리산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췄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고 했다. 또 도교적 입장에서는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린 금강산과 영주산(瀛州山)으로 불린 한라산과 함께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겼다. 

이외에도 오행사상과 함께 동서남북과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라는 의미의 오악(五嶽) 개념이 생겼다.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南嶽)이어서 남악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불복산(不伏山)이나 반역산(反逆山)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거부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되면서 토벌 작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구산(赤拘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지리산은 세파에 흔들리며 많은 이름을 남기게 됐다. 

금오산과 하동 앞바다가 드러나고 섬진강이 안개에 묻혔다. 남녘의 그것들이 나고 들고 하는 사이에도 북녘의 덕유산 자락은 덤덤했다. 덕유산에서 지리산을 보지 못했다.   

 

전쟁과 은둔

그 옛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나 고승 대덕의 길을 가려는 이들, 도망쳐 숨어들어온 노비,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잣거리의 사람들, 혹은 동학 이후 성을 바꾸고 숨어든 자들, 이런저런 사람들이 제각기 사연 하나씩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온 곳이 지리산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좌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많은 사람이 들어와 빨치산이 됐고 하나의 조국을 꿈꾸며 목숨을 의탁한 곳이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어느 자식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품는 어머니였다.

해방 이후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역사가 강하게 새겨졌다. 그 시절, 빨갱이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산으로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갓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됐다.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다. 넬슨 만델라가 27년 옥살이하고 대통령이 됐을 때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 넘게 옥살이하는 빨치산들이 수두룩했었다.   

살을 도려내듯 추웠던 그 겨울 지리산, 토벌대가 올라오면 ‘나무 하나에 군인 하나’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병력이 올라왔다고 한다. 토벌대와 총격전이 벌어지고 도주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돌고 돌아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면 널브러져 있는 토벌대와 동지들의 시신을 만나기도 했다. 꽁꽁 얼어붙은 죽은 동지의 입 속에 남아있던 밥덩이를 꺼내 먹으며 달려야 했던 절망의 시절이었다. 한 달이면 보름도 넘게 굶으며 배고픔과 추위 속에 쫓겨야 했고 잠깐 쉬며 앉아 있다 출발하면 움직이지 않는 동지들이 있었다. 어깨를 흔들면 앉은 채로 쓰러지던 벗들, 숨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 산 아래 늙으신 어머니 얼굴이라도 한번 떠올렸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빨치산들은 철저하게 고립됐다. 

북으로 올라갈 수도 산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들은 희망도 절망도 모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지리산만이 그들을 품어줬다.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과 북 누구 하나 그들의 생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들을 버렸을 때도 지리산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 된 조국을 꿈꾸는 일이 그토록 서럽고 사무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품어준 것은 지리산뿐이었다. 그들에게 눈보라 몰아치는 지리산은 환한 미소를 짓는 늙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다. 

 

생명의 공동체

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산은 늘 그곳에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우리가 세파에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갈등과 대립, 경쟁의 일상 속에서 산의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역사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안아주고 품어준 산이다. 지리산에 가서 하루라도 그 숲의 숨소리에 자신을 맡기면, 번잡한 현실의 고민을 잊게 해 스스로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현실살이의 바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현실 속에서 헤맬 때 자신의 지혜롭고 선한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 같은 산이다. 피폐해진 몸을 살려내고 잃어버린 자애로운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산이며 현실사회의 바른 역사와 삶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산이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이 가진 어머니와 같은 사랑과 자비의 품성으로부터 나왔다. 

지리산의 이러한 품성은 모든 것을 품어내고 삭여내어 새살을 만드는, 그렇게 끝없는 생명력을 분출하는 데서 생겼으며 그것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명의 ‘어울림 삶’에 다름 아니다. 크고 작은 능선과 계곡들의 어울림, 그 속의 작은 숲길과 고라니와 딱따구리와 구상나무나 얼레지 같은 꽃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까지 인드라망처럼 촘촘하게 엮인 생명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랑과 자비의 힘인 것이다. 동과 서가 어울리고 남과 북이 어울리며 온 누리가 하나 되는 세상은 이 모든 생명의 ‘어울림 삶’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속에서 진주처럼 만들어진 결정체, 바로 사랑과 자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리산은 그런 상징이 되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박두규 
시인. 1985년 『남민시(南民詩)』, 1992년 『창작과 비평』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 『두텁나루숲, 그대』, 『숲에 들다』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생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 『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가 있다.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공동대표, 지리산사람들 대표, 문화신문 「지리산 人」 편집인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