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예술에 비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

2021-12-27     마인드디자인(김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월 27일까지 ‘생태’를 주제로 한 기획전 《대지의 시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인간 중심적 사고와 관점에서 벗어나 ‘공생’, ‘연결’, ‘균형의 회복’을 성찰하기 위해 마련됐다. 사진, 조각, 설치, 영상, 건축, 디자인 등 분야를 넘나드는 작품 35점을 전시한다. 김주리, 나현, 백정기, 서동주, 장민승, 정규동, 정소영의 신작과 더불어 올라퍼 엘리아슨, 장 뤽 밀렌, 주세페 페노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히로시 스기모토 등 국내외 작가 16명의 출품작은 동물과 인간의 관계, 자연과의 교감,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한 균형의 회복 등의 키워드를 탐구한다. 

 

박제된 자연에서 불인의 자연으로

전시된 작품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측면에서의 ‘생태적 사고’를 제안한다. 히로시 스기모토(1948~)가 80년대와 90년대에 작업한 ‘디오라마’ 시리즈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잘 보여준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서 이국적 동물들의 오묘한 모습을 완벽한 각도로 찍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동물 사진들은 사실 자연사 박물관의 디오라마(diolama)를 촬영한 결과물들이다. 

디오라마란 특정 역사적 장면이나 쉽게 볼 수 없는 자연환경을 재연해 박물관 관람자들의 이해를 높이는 교육적 기능을 위해 탄생한 전시 형식이다. 본래 삶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인간에게 가장 잘 보이도록 박제된 자연을 담은 히로시 스기모토의 사진은 자연을 분석과 이해가 가능한, 인간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하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편,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거대한 흙덩어리가 놓여 있다. 김주리 작가의 <모습 某濕 Wet Matter_005>이다. 생명을 환기하는 물과 오랜 시간을 거쳐 고운 흙 입자가 되어 습지를 구성하는 흙은 무슨 형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어떤 젖은 상태’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살기 이전의 모든 생명이 시작된 긴 시간의 흐름 속으로 관람객을 초대한다. 

그런가 하면 작가 백정기(1981~)의 <이즈오브 시리즈 ISOF Series>는 인간이 제작하고 소비하는 ‘풍경사진’으로 자연을 향한 인간의 시선을 탐구한다. 자연물에서 추출한 색소로 프린트된 작가의 풍경사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변을 일으킨다. 멋진 풍경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한 일반적인 풍경사진에 담긴 자연이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학습된 이미지로서의 자연이라면, 백정기 작가의 풍경사진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아귀를 벗어난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자연으로 재탄생한다. 

 《대지의 시간》 중 히로시 스기모토 작가의 작품 전시 전경. 
 《대지의 시간》 중 백정기 작가의 작품 전시 전경. 

 

미술관의 생태실험

미술관에서 폐기될 예정이었던 진열장을 이용해 신작을 구성한 정소영(1979~) 작가의 작품 역시 흥미롭다. 인간은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자연을 측량하고 연구했지만 이 과정에서 자연은 타자화돼왔다. 미술관의 진열장은 그러한 사고의 체계화, 대상화, 박제화의 산물이며, 분류체계에 대한 강박적 서사의 증거물이다. 작가는 진열장 내부에 소금의 주성분이자 제설제로 쓰이는 염화나트륨을 채워 인간의 시선으로 분절된 바다의 풍경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미술관과 전시회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생태적 물음을 던진다.

전시의 기획은 전시가 끝난 후 산업폐기물로 비용을 지불하며 처리해야 하는 가벽 조성을 최소화한 전시디자인으로 응답한다. 작품들은 맥락이 삭제된 채 단독 공간에서 보여지기 보다는 커다란 공간에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며 노닐고 있다. 가벽 대신, 전시장 중간중간에는 말캉한 공들이 배치되어 있다. 물질의 입자나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형태를 떠올리게 하는 이 공들은 관람자의 시야를 막기도 하고 전시장 전체를 비추는 어안(魚眼)형 거울이 되기도 하며 공간과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성(魚眼)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전시가 끝나면 공기를 빼내어 보관,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제작된 이 공들은 생태라는 주제를 전시회라는 구조 안에서 실험하기 위한 시도이며, 작품-관람자-공간의 상호의존성과 연결성을 강조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대지의 시간》 중 정소영 작가의 작품 전시 전경. 

 

인드라의 그물이 장엄한 세계를 상상하며 

존재론적 중심으로써 비인간생명체를 장악해온 인류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의 공포를 겪으며 생태적 사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론적 위계 구조의 꼭대기에서 한 계단 내려오려는 생태적 사고는 연기(緣起)에 대한 사무친 통찰이며 보살적 인간으로 거듭나려는 시도이다. 연기의 관점으로 상생과 자비의 예술을 펼쳐가는 다양한 작품과 깊은 고민이 담긴 전시의 구성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체험해 보기를 바란다.  

 《대지의 시간》 전시 전경

 

《대지의 시간(Time of the Earth)》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전시실 및 중앙홀 
● 기간 : 2021.11.25.~2022.2.27. | 10~18시 | 월요일 휴관
● 문의 : 02)2188-6000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달의 볼 만한 전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전시장이 휴관했거나 예약제로 운영 중일 수 있습니다. 방문 전 꼭 확인하세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UN/LEARNING AUSTRALIA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서울
2021.12.14 ~2022.03.06 | 02)2124-8800
https://sema.seoul.go.kr/

배움은 단순히 고정된 지식을 획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며 인식을 확장하고 일깨우는 탈학습과 재학습의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호주의 동시대미술을 통한 호주 배우기를 시도하는 전시. 

 

조선의 승려 장인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
2021.12.07~2022.03.06 | 02)2077-9000 
www.museum.go.kr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용문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등 조선시대 승려들에 의해 탄생된 불상과 불화가 337년만에 세상에 공개된다. 전통 불화를 도형적 기호와 오방색 컬러로 해석하는 설치미술가 빠키가 참여한 ‘새로운 길을 걷다’ 파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순간을 느껴볼 수 있다.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 서울
2021.11.11~2022.03.01 | 02)2022-0600
http://www.mmca.go.kr/

국민화가 박수근이 19세에 그린 수채화부터 51세로 타계하기 직전에 제작한 유화까지, 전 생애의 작품과 자료가 한자리에 소개된다. 전시장을 거닐며 박수근이 살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전후의 한국 사회, 서울 풍경,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10년째 기획·운영 중이다.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