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과 노비구니

스님의 그늘, 만성(萬成)스님

2007-09-17     관리자

대체로 큰절에 딸린 암자 중에는 큰 절 가까이에 비구니스님들이 거처하는 암자가 있다. 범 어사에도 대성암이 있어서 비구니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암자의 주인이 만성(萬成) 스님이었다.
이 만성 스님은 설봉 스님을 매우 깊이 믿고 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설봉 스님께서 만성 스님의 만성이란 법호를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 "만성(萬成)은 만행(萬行또는 卍行)을 성취한 다는 뜻일 터인데 그보다는 차라리 만성(萬聖)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하셨다.
그리고 그 풀이인즉슨 만성 스님은 그 만행이 일만의 성인에 버금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 다. 그것은 만성 스님이 참선수행하는 수좌들의 뒷바라지에 남달리 열성적인 점을 찬탄한 것이라고도 하셨다. 실제로 만성 스님은 공부하는 스님으로 인연이 닿는 스님이면 나이 고 하를 가리지 않고 시봉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우리 나라 옛말에 "비구니 며느리는 삼아도 비구 사위는 삼지 않는다."했다. 비구니는 그만 큼 시봉을 잘하고 비구는 대접받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이러한 옛말이 만 성 스님 같은 비구니를 두고서 하는 말이라고 느낄 정도로 스님은 시봉을 잘 하셨다.
설봉 스님의 법호 풀이가 있은 뒤부터 만성 스님은 만성(萬成)이기도 하고 만성(萬聖)이기 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는 관계없이 '만성 노장(萬成老長)'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스 님의 나이가 칠순인 탓도 있고 또 그 당시의 비구니로서는 가장 고령자였기 때문이며 덕이 또한 고령에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밖에도 대성암의 주인이므로 대성암 암주(庵主)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그 호칭이 마땅치 않게 느껴져서 그렇기도 했다.
지금은 암자의 주인, 즉 암주를 큰 절의 주지(住持)와 한가지로 주지라고 호칭하지만 예전에 는 암주를 주지라고 잘 부르지 않았다. 원주(院主)라고 부르는 예가 많았다. 특히 대중이 모 여 살지 않는, 혼자서 사는 독(獨)살이 암자의 주인을 주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사는 암자의 주인이나 사격(寺格)을 갖춘 큰절의 주인이나 다 주지라고 한다. 그것은 아마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시행한 사찰령(寺刹令)을 비롯해서 5.16군사혁명 뒤에 생긴 사찰재산관리법에 의해서 사찰과 사찰관리인인 주지의 등록을 시행하면서 행정의 편의상 암자의 주인이나 큰절의 주인을 주지로 통칭(通稱)하게 된 것이 아닌가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우리 나라 불교에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수행인의 분한(分限)이 모 호해지고, 따라서 수행에도 영향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불교교단에도 행정편의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현실로 보아서는 나쁜 영향이 더 많지 않은가 한다.
각설하고, 주지란 직책은 중국 백장(百丈) 스님이 지은 청규(淸規)에 의하면 백장 스님 때까 지만 해도 없었다고 한다.
청규(淸規)의 청(淸)은 청정대해중(淸淨大海衆)을 줄인 말이며 규(規)는 규구준승(規矩準繩) 의 준말이다. 따라서 청규는 수행하는 청정한 대중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백장은 대소승(大小乘)의 계율을 참조해서 독자적인 선문(禪門)의 청규를 지었는데, 그 청규 에 의하면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지 4백년, 달마(達磨)로부터 백장에 이르기까지 도(道)를 서로 주고 이어받았으나 주지가 없어 스승으로 주지를 삼았다고 하였다.
또 백장 이후에 백장의 옛 청규를 본떠서 만들어진 선원청규(禪苑淸規)는 부처님을 대신해 서 법을 전하고 교화를 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는 사람을 주지라고 하였다.
이로써 볼 때 주지는 한 절의 행정상의 주장(主長)이기보다 수행상의 주장이고 스승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만성 노장도 비록 작은 암자의 암주이나 그 절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 고 있었다. 때문에 대성암에는 적지 않은 비구니 대중이 수행을 하고 있었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이면 원근의 신도들이 암자가 비좁을 만큼 모였다.
그날이 초하루인지 보름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름 안거(安居)를 해제(解制)한 지 오래지 않은 때였다. 해제를 한 뒤 곧 큰절 범어사의 동산 스님은 시자와 스님 몇 사람을 데리고 전라남도 강진 만덕사에 가시고 선방 대중은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져 간 뒤여서 선방에는 나와 두어 사람의 수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만성 노장의 시자가 뛰어와서 하는 말이 간밤에 도독이 들었으니 어서 가보라는 것이었다. 가서 보니 의외로 만성 노장의 방에 도둑이 붙들려 있었다. 비구니 스님 들과 나이 든 여자신도들에게 둘려싸여 앉아 있는 40대의 도둑 선생은 고개를 두 무릎 사이 에 묻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묻는 우리에게 만성 노장이 한 말은 또 알 수 없는 것 이었다.
그때만 해도 초하루와 보름에 절에 가는 것은 거의가 불공 드리고 기도하기 위해서 갔다.
그래서 절에 가기전에, 지금은 그러한 풍속이 전혀 사라지고 없지만, 불공에 쓰일 공양미를 사서 싸라기와 뉘를 가리고 돌을 골라서 깨끗한 청정미(淸淨米)를 만들어 절에 가지고 갔다.
대부분의 여신도들은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갔는데 절에 가는 도중에 잠시 쉴 때라도 그 공 양미를 땅에 내려 놓는 일이 없었다. 두 무릎 위에 올려놓고 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정성 이 가슴에 스민다. 또 먼 곳에서 오는 신도는 하루 먼저 왔다.
그날도 많은 신도들이 하루 먼저 절에 와서 잠을 자는데 도둑이 든 것이다. 방마다 신도들 이 가득한데 이 도둑선생은 잘못해서 만성 노장의 방에 들어온 것이다. 들어올 때는 어두워 서 잘 몰랐으나 방 한복판에 들어서고 보니 사람들이 가득 드러누워 있어서 사람을 밟지 않 고서는 나아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참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도둑선생이 어쩌지 못하고 방 복판에 우뚝 서있는데 만성 노장이 잠에서 깨어 우뚝 선 검은 물체를 발견하고 도둑인줄을 금방 알았다.
이때 만성 노장, 도둑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허둥대지 말고 조용히 그 자리에 앉으시오.
곧 불을 밝히겠소."하였다. 도둑이 주춤주춤 자리에 앉은 다음, 노장은 불을 켤 생각은 하지 않고 도둑에게 물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
도둑, "배가 고파서 밥을 훔쳐먹으러 왔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노장, "그래 밥은 먹었습니까?"
도둑, "네 부엌에서 밥을 찾아 먹고 배가 부르니까 도둑질할 생각이 생겨서 그만... ."
예나 지금이나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넘지 않는 사람 있느냐 하지만, 요즘의 세태는 가진 자가 더 눈을 부릅뜨고 훔칠 것을 찾고 배부른 고관대작이 나랏돈을 훔치고 뇌물을 밝힌다.
배가 부르니까 도둑질할 생각이 났다고 하는 이 양상군자(梁上君子)의 말은 어떤 여운을 느 끼게 한다.
어쨌든 만성 노장이 도둑을 붙들고 도둑의 신상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사람들이 깨어나 도 둑은 달아날 기회르 잃고 말았다. 헌데, 이방 저방에서 도둑이 들어 금비녀가 없어지고 핸드 백이 털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붙들린 도둑선생에게 혐의가 갈 밖에, 그래서 만성 노장은 날이 밝는 대로 돈을 좀 주어서 보낼 생각이었으나 보내지 못하고 우리를 부른 것이 었다.
붙들린 도둑의 몸을 뒤졌으나 잃어버린 금비녀나 핸드백을 턴 돈 따위는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훔친 것을 어느 돌담 사이에 숨겼을 것이니 경찰에 끌고 가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 다. 물건은 도둑맞았고 도둑은 잡혔으니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북새통에 아랫마을 청룡리 지서의 순경이 한 젊은이를 묶어서 끌고 왔다. 거둥이 수상해서 붙잡아 조사하니 금품이 나왔는데 대성암에서 훔친 것을 자백해서 끌고 왔다는 것 이었다.
이로써 혐의를 벗은 도둑선생이 더욱 부끄러워 낯을 붉히고 안절부절 하는데 만성 노장 왈, "당분간이라도 우리 절에 있으시오. 우리 절에 할 일이 많다오." 하셨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