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근대 불교와 산신신앙의 갈등

만해와 성철 스님의 산신 철폐론

2021-11-24     서재영
암자 뒤에 산신각이 있는 문경 봉암사 백운대. 사진 유동영.

산신은 우리나라 토속신앙이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종교현상이다. 우리나라 역시 국토의 70%가 산지로 구성되고, 마을마다 산을 끼고 있어 산신신앙은 토속신앙으로 자리 잡아 왔다. 산신신앙은 자연현상에도 영혼이 있다는 산악숭배(애니미즘)와 호랑이를 숭배하는 동물숭배(토템이즘)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여기에 한민족의 시조설화와 결부되면서 신격과 인격적 특성까지 부가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신의 아들인 단군은 지상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1,500년 간 다스린 후 산신이 됐다고 한다. 백발의 노인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기호노인(騎虎老人)의 모습으로 산신을 조성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산신은 산악숭배와 동물숭배를 바탕으로 하되 여기에 천신과 인격적 의미가 더해져 민초들의 신앙으로 널리 숭배돼 왔다.

 

토속신앙과 불교의 습합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입향수속(入鄕隨俗)이라는 전통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듯이 불교는 새로운 지역으로 가면 해당 지역의 풍속을 따르고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이런 자세로 불교는 국제적 혼성문화가 꽃을 피웠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다. 토착신앙과 마찰을 피하고 상생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종교로 성장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물론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됐을 때는 산신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점차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상생의 길을 걷게 됐다. 삼국시대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 일월성신(日月星辰) 등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들이 많이 행해졌다. 하지만 불교가 지배적 종교가 되면서 이 의례들은 불교의식으로 대체됐다. 토착신앙이었던 산신도 자연히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의 하나로 수용됐다. 심지어 고려 인종 때는 승려 묘청의 요청으로 백두산을 비롯해 한반도의 큰 산에 불보살의 이름을 부여하고 숭배하게 했다.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 산신신앙을 적극 권장한 셈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찰에는 삼성각이 건립되고 산신·칠성·독성을 모시기도 했고, 지역에 따라 산신각이 독립 당호로 건립되기도 했다. 나아가 『석문의범』 같은 의례집에도 각단예불 편에 산신청 내용이 수록된 것을 볼 때, 산신은 불교신앙의 일부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18세기 들어 불교가 쇠락하자 불교의 하위신앙으로 흡수됐던 산신과 민간신앙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 혼란기였던 19세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면 더욱 뚜렷해진다. 전국의 명산과 사찰은 물론 각 마을이나 심지어 집집마다 산신이 모셔지면서 민족종교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됐다. 

만해기념관에 있는 만해 스님 조각상. 

 

만해의 소회폐지론

불교가 쇠락하던 시절 산신은 기복신앙의 중심으로 민초들의 의지처가 됐지만 근대적 여명이 밝아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불교계에서 그런 반전의 서막을 연 인물은 만해 한용운이었다. 만해는 1910년 출간한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불교개혁 조치의 하나로 산신과 칠성 등 비불교적 소회(塑繪, 소조상과 탱화)의 철폐를 강력히 주장했다.

만해가 난신(亂信)이라 부르며 폐지를 주장한 소상은 소승적 수행자상인 독성, 별을 신봉하는 칠성, 망자를 심판하는 시왕을 비롯해 여러 천왕과 신중, 조왕, 산신 등이다. 만해는 사찰에 모셔진 수많은 소상에 대해 교리를 따져 불교적 근거가 없는 대상들은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소회의 종교적 기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교리에도 맞지 않는 각종 소상을 향해 길흉화복을 비는 것은 불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만해는 불교와 혼재한 미신적 요소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법이 왜곡되는 것은 물론 사법(邪法)이 정법처럼 횡행하게 된다고 보았다. 미신을 받드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면 수많은 난신을 섬기는 조선불교야말로 가장 번성해야 한다. 하지만 극도로 쇠락한 조선불교의 현실을 보면 난신은 고등종교의 길도 아니고, 바른 신앙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만해는 기복과 미신적 요소를 배제하고 불교의 정체성을 바르게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는 깨달음을 준칙으로 삼는 종교이며, 중생들을 바른 지혜로 인도하는 것이 근본이다. 더욱이 시대는 점차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온갖 난신을 신봉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불교는 철학적 종교로써 미래사회를 선도할 도덕과 문명의 원천인데 온갖 미신적 대상을 섬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역사적 질곡과 내적 빈곤이 만들어 낸 왜곡을 바로잡고 불교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성철 스님. 사진 주명덕,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봉암사 결사와 산신 철거

만해는 비불교적 소회의 일소를 강하게 주장했지만 사찰의 소임을 맡은 적이 거의 없기에 그의 지론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소 과격해 실현되지 못할 것 같던 만해의 지론이 실행에 옮겨진 것은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뒤였다. 성철 스님은 1947년 ‘부처님 법대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봉암사 결사를 단행하는데, 결사 대중이 내린 첫 번째 개혁조치가 바로 산신과 칠성 등 비불교적 소상들을 철거하는 것이었다.

성철 스님은 해인총림 방장이던 1982년 대중들이 모인 법석에서 봉암사 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20여 명의 수좌와 의기투합해 봉암사로 들어간 성철 스님은 첫 대중공사에서 결정한 것이 ‘법당 정리’였다. 사찰은 비록 불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정작 부처님을 모셔야 할 법당에는 칠성과 산신 등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결사 대중들은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을 전부 뜯어버리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만 남겼다. ‘무엇이든 잘못된 것은 고쳐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것이 결사의 정신이었기에 불법에 맞지 않는 소상들을 철거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그러나 당시 봉암사 신도들 또한 일반 사찰의 신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기복의 대상을 일소해 버리자 그에 따른 반발도 컸다. 그때 성철 스님은 꼭 불공을 드리고자 한다면 신도들 스스로가 공양물을 준비하고 부처님께 기도하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스님들이 제사장 역할을 내려놓자 자연히 신도들의 발길은 끊어졌고, 사찰의 재정은 어려워졌다.

봉암사 대중들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로 내려가 탁발로 양식을 구하고, 스스로 밭을 일구고 나무하며 사찰을 운영했다. 깨달음을 목표로 출가한 대장부들이 온갖 난신들 앞에 무릎을 꿇고, 타인의 욕망을 위해 ‘삯군 노릇’하며 복을 비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스님의 판단이었다. 이렇게 보면 산신과 칠성 등 미신적 요소를 일소하고 노동하고 수행하는 삶으로 돌아간 것은 수행자의 본래면목을 찾고, 불법의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조치였다.

봉암사 해인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이 대중설법 하는 모습. 성철사상연구원 제공.

 

믿음의 결핍과 바른 믿음의 확립

만해는 교리에 맞지 않는 소회의 일소를 주장했고,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통해 이를 실현했다. 산신, 칠성, 조왕, 용왕 등은 토착신앙이거나 도교적 요소에 해당한다. 독성이나 신중 등은 비록 경전에 근거하고 있지만 교리적 의미는 불법과 수행자를 외호(外護)하는 것이므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런 소상을 모셔놓고 절하고 복을 비는 것은 마치 주인이 하인을 향해 절하는 것처럼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물론 『화엄경』 등에는 무수한 부처님과 보살들이 등장하고, 그 이름과 모습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한 부처님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므로 이치는 하나라는 것이 만해의 지론이다. 따라서 설사 불보살의 소상일지라도 모든 상을 다 모실 필요는 없고, 석가모니불 한 분만 모시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만해와 성철 스님의 소회폐지론은 단지 미신척결이나 미신(迷信)과 정신(正信)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두 분의 관점은 대상을 향한 믿음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는 선적(禪的) 견지로 심화한다.

선은 자성자도(自性自度)를 지향하는 자력신앙의 전통이다.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보아 스스로 구제하는 것이 자력의 길이고 선의 길이다. 그런 점에서 참다운 믿음의 대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밖을 향해 치달리며 믿음의 대상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자성이 참다운 부처라는 자성불(自性佛)에 대한 믿음이 결핍돼 있기에 밖에서 믿음의 대상을 추구한다. 따라서 만해와 성철 스님이 온갖 소상을 폐지하자고 주장한 것은 신앙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믿음을 회복하자는 의미였다. 

바른 믿음의 부재가 미신에 의탁하게 만들고, 자성(自性)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 밖으로 신앙의 대상을 찾아 헤매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상황은 자성에 대한 믿음은 신화적 내용이 돼 버렸고, 불자의 믿음과 신행은 온갖 소상들을 향해 절하고 복을 비는 기복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산신과 칠성 등 토속신앙과 도교적 요소가 기복의 중심이 돼 있었다. 말세 중생은 근기가 낮아 스스로 구제할 수 없기에 타력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세관이 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말세관은 선적 믿음의 약화로 나타나고, 그와 비례하여 대상적 믿음에 대한 집착은 강고해진다. 따라서 만해와 성철 스님의 소회폐지론은 대상적 소상의 문제를 넘어 내면적 믿음을 회복하자는 데 핵심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는 “만약 모든 형상이 모두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게 되면 즉시 부처를 보리라”고 했다. 각종 소상은 중생의 근기에 맞춰 신행의 구심점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지 불상 그 자체가 부처의 실상은 아니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금불은 화로를 지나지 못하고, 목불은 불을 건너지 못하며, 흙불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했다. 불상조차도 하나의 형상으로 보라고 했는데 하물며 교리적 근거도 없는 온갖 난신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혹자는 문화적 가치와 상생의 전통 등을 이유로 산신과 칠성 등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자의 시선일 뿐 불교의 근본 입장이 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상생을 지향한 정신과 전통은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불교신행의 주객이 전도돼 있다면 마땅히 불교의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 옳다. 더구나 지금은 과학문명과 합리적 사고가 중심이 된 시대다. 산신이나 칠성 등을 전통문화로 보존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불교신앙의 중심으로 삼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만해와 성철 스님의 소회폐지론은 자기혁신을 통해 불교의 본래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며, 선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서재영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 성균관대 초빙교수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