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사찰 안 산신

산신령, 호랑이와 함께 법당으로 들어오다

2021-11-24     윤열수
군위 인각사 산령각.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집안의 큰 어른을 찾는 것처럼, 우리네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찾는 곳이 바로 사찰 내 한적한 곳에 자리한 산신각이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며, 일찍부터 산을 다스리는 산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산신도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산신의 격을 갖춘 산신도가 그려지기 시작한 명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현재까지 조사된 내용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시대 후기인 1800년 무렵부터 산신도가 그려지기 시작해 1800년대 말에는 사찰 수만큼이나 많이 나타난다. 이 글에서는 한국 산신신앙의 흐름을 따라 산신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 후, 사찰 내 산신각에 모셔진 산신도를 중심으로 발생과정과 유형을 탐구해보도록 하겠다. 

영천 은해사 거조암의 예전 산신각 모습. 

 

산신각 형태의 변모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으로, 사찰에 산신각이 세워지기 시작한 때는 조선 후기부터다. 산신각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자연환경에서 발생한 민중 신앙물이었으나, 재래신앙인 산신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불교와 습합하고, 사찰 전각의 내외호신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사찰 내에 세워지게 됐다. 산신각 기록 중 가장 빠른 것은 인악(仁岳) 의첨(義沾)의 문집인 『인악집(仁岳集)』(1746~1796) 권2에 기록된 해남 은적암의 「산령각기(山靈閣記)」가 있다. 

산신, 독성, 칠성을 모시는 전각은 대체로 삼성각(三聖閣)이라 부르며, 그 밖에도 산신각(山神閣), 산왕각(山王閣), 산령각(山靈閣), 영산각(靈山閣), 산신당(山神堂), 산제각(山祭閣), 지령당(至靈堂), 성모각(聖母閣), 성산각(星山閣), 칠성전(七星殿), 북극전(北極殿) 등 여러 가지 명칭을 가지고 있다. 

산신각의 초기 현판 명칭에는 산령각이 많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다양한 이름으로 변한다. 특히 19세기 말에는 칠성을 중심으로 한 전각들의 명칭이 각(閣) 또는 당(堂)에서 가람배치 상위 개념인 전(殿)으로 변화하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각들의 명칭을 살펴보면 산신이나 독성 또는 칠성을 단독으로 모시는 전각도 있지만 대체로 칠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산신, 독성을 함께 모시는 삼성전(三聖殿)으로 사용하고 있다.

군위 인각사 산신각은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한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 형태로 신주를 모시는 교의(交椅, 제사용 의자)를 확대한 제의용이었다. 원래 사찰 산신각이나 명산 산신도량은 전각 밖에서 기도 드리는 형태로 대부분 작은 건물이었는데, 대중의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산신각은 점점 확장 불사의 대상이 된다.

 

산신도의 유형

산신은 작가의 활동 범위나 화원의 계보, 계열에 따라 다른 유형으로 나타난다. 또 지역이나 시대 변화, 시주(施主) 물품의 많고 적음, 크기, 채색, 형태, 동기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현재까지 조사 가능한 140여 축의 산신도 가운데 연대가 분명한 작품으로 은해사 성보박물관 산신도(1817년)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됐고, 의성 고운사 산신도(1820년),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1821년), 은해사 산신도(1825년), 경남 해인사 산신도(1831년) 등이 이른 시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꼽힌다. 사찰 내에 봉안된 산신도 중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그림들을 검토, 비교해 보면 그 특성을 알 수 있는데, 크게 제I형식, 제II형식, 제III형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산신도.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산신이 산의 영물인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다. 
산신 곁에는 시중드는 동자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제I형식

19세기 초 초기 산신도에서는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고, 신장탱화에 등장하는 신장상이나 명부전 지장시왕도와 같은 양식과 형식이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명문이 있는 산신도 중 가장 이른 작품은 화원 관보(寬甫)가 그린 은해사 성보박물관 산신도(1817년)다. 이 그림에는 산신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괴석 위에 약간 부자연스러운 반가부좌 자세로 걸터앉아있다. 산신은 한 손으로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고 다른 손에는 파초선을 들었는데, 머리에는 관(冠)을 써서 지장시왕도 속 판관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긴 눈썹에 가늘고 예리한 눈은 위로 치켜 올라가 있고 당당한 코와 긴 수염 사이로 야무진 입술이 엄숙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심산유곡의 괴이한 암석 위에 자라난 소나무와 대나무를 배경으로 하며, 옆에는 공양물을 든 작은 동자가 있다. 

이와 비슷한 양식의 작품으로 해인사 성보박물관 소장 산신도를 들 수 있다. 이 그림 속 산신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 앉아 오른손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데, 산신의 풍채에 비해 옷 밖으로 나온 팔과 맨발은 빈약해 보인다. 산신 뒤에 그려진 소나무에는 표주박이 매달려 있고, 산신의 옷자락 사이에는 불로초가 그려져 있다. 

관모나 의상, 특히 얼굴 부분에서 18세기 후반에 흔히 볼 수 있는 지장시왕도 속 시왕의 표정과 매우 흡사한데, 이러한 지장시왕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초기 산신도로 미국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갤러리(The Asia Society Galleries) 소장 산신도가 있다. 이 그림에는 호랑이가 등장하며, 소나무 배경 아래 의자에 걸터앉은 산신 머리 위에 두 권의 책을 올려놓았다. 호랑이와 소나무를 제외하면 시왕탱화나 현왕탱화와 매우 흡사하다. 이 그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탱화는 문경 김용사 현왕탱(1803년), 문경 혜국사 현왕탱(1804년), 삼척 영은사 현왕탱(1811년), 예천 용문사 현왕탱(1812년)과 시왕탱(1813년) 등이 있다.

판관산신, 영천 은해사 서운암 산신탱화. 화원 관보의 작품이다. 호랑이가 보이지 않는데, 산신이 소나무를 배경으로 괴석 위에 약간 부자연스러운 반가부좌 자세로 걸터앉아있다. 은해사 성보박물관 소장.

● 제II형식

제II형식은 신장탱화 가운데 동진보살상(童眞菩薩像)과 사천왕상을 기초로 제작한 산신도 유형으로 경북 의성 고운사 산신도(1820년),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1821년), 부산 개인 소장 산신도(연대미상)가 있다. 

의성 고운사 산신도와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는 주연 격인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머리에는 봉익형(鳳翼形) 장식에 삼지창이 꽂힌 무사의 투구를 썼으며 어피(魚皮) 갑옷을 입었다. 탁자에 두 다리를 벌린 채 정면을 노려보며 걸터앉았는데, 왼손에는 장검을 곧추세우고 오른손은 긴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좌우 어깨에 그려진 일월도가 선명하게 강조됐다. 

공양물을 받쳐 든 동자가 좌우에서 산왕을 모시고 섰는데, 신격화된 산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산왕보다 훨씬 작게 묘사했다. 동자는 두 갈래로 묶은 종종머리에 앳된 얼굴이다. 이마에는 황금색의 금강저를 두른 것이 특이하며, 병과 잔, 보자기에 싼 약함을 공양물로 들고 있다.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는 동자와 배경인 병풍을 생략했고, 고승의 영정(影幀)과 같은 구도다. 이 산신도의 명문은 심하게 훼손돼 있으나 구도, 필치, 채색 등이 의성 고운사 산신도와 같은 작가의 작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장산신, 의성 고운사 산신도. 산왕은 봉익형(鳳翼形) 장식과 삼지창이 꽂힌 무사의 투구를 썼으며 어피(魚皮) 갑옷을 입었다. 
왼손에는 장검을 곧추세우고 오른손은 긴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좌우 어깨에 그려진 일월도가 선명하게 강조됐다.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 ‘나무산왕대신지영’ 명문.

시왕탱화나 영탱에서는 반드시 화면 좌우 상단에 존명(尊名)을 쓰고 있는데, 산신도에서도 가끔 같은 형식으로 존명을 쓴 그림이 보인다. 의성 고운사 산신도는 ‘대권산왕지영(大權山王之影)’, 영남대 박물관 산신도는 ‘나무산왕대신지영(南無山王大神之影)’이란 명문이 남아있다. 이러한 명문들은 함양 용추사 산신도(1852년), 순천 선암사 선조암 산신도(1856년), 안성 운수암 산신도(1870년), 순천 송광사 산신도(1896년) 등에도 나타나 있어 산신각의 현판과 함께 명칭, 발생과정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 앞에서 살펴본 산령각, 산신당이 산신각이나 삼성각으로 변화했듯이 산왕대신의 명칭이 변해 후대에 산신령으로 부르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산신과는 판이한 이 두 산신도는 신중탱화의 위태천신(韋駄天神)과 사천왕 중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을 모방한 흔적이 보인다. 나무탁자 위에 걸터앉은 자세의 신장이 특이한데, 이러한 자세는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 「도상부」 3권의 견뢰지신(堅牢地神)의 도상과 같은 자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모든 신장은 기립하고 있는 편인 데 비해 산신이나 독성상에서는 모두 걸터앉아 있거나 호랑이에 편안하게 기대고 있는 자세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산신상의 얼굴 모습도 인자하고 평화로운 도인의 모습으로 변했고, 배경의 치장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마산신, 합천 해인사 산신도.

● 제III형식

경남 해인사를 중심으로 남아있는 제III형식은 전라도 일원에서 활동했던 금어(金魚,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 스님인 금암당(錦庵堂) 천여(天如)의 작품계열로, 제I형식이나 제II형식처럼 지장시왕도나 신중탱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과는 다르다. 산신령 개념 가운데 기호산신(騎虎山神, 호랑이를 탄 산신)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 전국의 사찰 산신도에서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그림은 몇 점에 불과하다. 

합천 해인사 산신도(1831년), 미국인 칼 스트롬 소장 산신도, 여수 은적사 산신도(1850년) 등에는 도인에 가까운 수염 난 할아버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다. 사람이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그림으로는 풍간화상(豊干和像)을 그린 그림이 대표적이다. 또 조선 후기 신선도 가운데 장과로(張果老)나 동방삭(東方朔)도 흰 나귀나 흰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산신이 호법신이자 사자인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것도 이런 점에서 연유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순천 송광사 산신도를 살펴보면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모습인데, 호랑이 목에 방울이 달린 목걸이를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호랑이를 산신의 애완동물로 인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산신 가운데 남원 실상사 약수암 산신도는 산신이 걸터앉은 수레를 호랑이가 마차처럼 끌고 가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기호산신상은 군자국상의 권위를 산신령으로 신격화한 관념 속에서 발생한 양식으로 생각된다. 시대가 후기로 접어들면서 무신도 속에서도 호랑이를 말처럼 타고 있는 산신도가 많이 나타난다.

순천 송광사 산신도. 
남원 실상사 영원암 산신도.
남원 실상사 약수암 산신도.

금암당 천여는 해인사 산신도(1831년)를 비롯해 대체로 지장시왕이나 신중탱화를 많이 그렸다. 초기 산신도의 원형인 초본을 형성하는 데 신장탱화나 시왕탱화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도교의 신선사상에 바탕을 둔 천여의 산신도는 제I형식의 지장시왕도 영향과 제II형식의 신중탱화 영향을 수용해 융합한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며, 산신령, 호랑이, 소나무, 동자, 폭포 등으로 이뤄지는 일반적인 산신도의 완성형이라 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서운당(瑞雲堂) 도순(道詢)의 작품은 도교 신선사상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제I형식 지장시왕도의 영향과 제II형식 신장상의 영향을 수용해 융합한 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산신령, 호랑이, 소나무가 등장하는 일반적인 산신도의 초기 형식이라 할 수 있다. 1830년대의 기호산신도에서 30여 년이 지난 선암사 선조암 산신도에서는 산신이 호랑이에 기대앉아있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산신도상을 보여준다. 

 

 

● 그 외 형식      

산신도의 형식을 분류하는 데는 제III형식 외에도 하대로 내려오면서 여러 유파가 생겨나지만 새로운 양식이 발생하기보다는 약간의 부분적인 변화만 시도했을 뿐이다. 대체로 화원 활동 범위 내의 지역적인 분파나 계파에 따라 전해 내려오는 형식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형식으로는 도인형, 스님형, 학자형, 관운장형이 있다. 도인형은 대체로 흰 수염, 긴 눈썹, 훌렁 벗어진 머리 등에서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형인데 산신도 가운데 가장 많은 유형이다. 배경에는 소나무와 삼신산 공양물을 들고 있는 동자상이나 시동이 나타나며, 호랑이를 기대거나 쓰다듬고 있는 도상이다. 스님형은 젊은 스님이나 나한, 독성과 같은 근엄하고 자상한 형상으로 그려지는 도상으로, 산신령 자체가 불교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학자형은 성균관의 유생이나 서당의 괴팍한 접장과 같은 형상으로 책을 들고 있거나 책가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검은 복건에 검은 수염이나 젊은 학자풍으로 용감하고 씩씩한 기상이 돋보여 기원의 대상이기보다는 인자한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관운장형은 신장도나 시왕지옥도에 등장하며 산신도의 영향을 받았다. 부라린 눈은 위쪽으로 치켜뜨고 주름진 이마의 음영이 크며 턱수염이 가슴 아래까지 길게 늘어졌다. 특히 임진왜란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는 믿음 때문에 조선시대 후기까지 유행하게 됐다.

사찰 속 산신도는 1800년 이후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작품이 그려졌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의 작품이 나타났다. 초기 작품들이 신장이나 신선의 얼굴 형태와 같이 굳은 표정을 띠었던 것에 비해, 19세기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밝고 자연스러운 표정에 편안하고 자애로운 웃음을 띠고 있는 산신도들이 나타났다. 이는 불교라는 외래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심성이 산신의 모습에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윤열수

 

윤열수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 문학박사. 가회민화박물관 관장과 한국박물관협회 제11대 회장. 민학회 회장(2001~2004), 문화재청 문화재위원(2007~2011), 한국민화학회 회장(2008~2011)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