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부처 산신과 싸우다

불교 돕는 산신에서 부처 호위하는 산신으로

2021-11-24     이종수
경주 선도산. 정상에는 선도성모를 모신 성모사와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불이 온 경주를 굽어보고 있고, 아래에는 진흥왕릉을 포함해 여러 고분이 즐비하다. 경주는 신라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일군 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불교 전래 초기에 해당하는 4~5세기 사찰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왕경의 평지나 산 아래에 건립됐다. 산 중턱이나 산 정상에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불교신앙이 확대되면서 지방에도 사찰이 세워지는 6세기 이후다. 산 정상에는 대부분 암자나 석굴, 혹은 마애불이 조성돼 은둔 수행이나 신앙 공간으로 활용됐다.

산사의 확산은 원래부터 있던 산신신앙과의 충돌을 의미했다. 불교신앙과 토착신앙의 갈등은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 이차돈이 죽임을 당한 데서 드러나듯 삼국이 공통으로 겪었던 문제였다. 산신 숭배자와 산사 승려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왕실에도 뿌리내렸던 산신신앙

산신신앙은 고대부터 내려온 토착신앙이자 불교 전래 이전까지 토착민들에게 가장 강력했던 신앙이었고, 산신은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다. 문헌을 통해 전해지는 대표적인 고대 산신은 가락국 시조의 어머니로 전해지는 정견모주(正見母主), 토함산신으로 신봉된 신라 탈해왕(脫解王), 선도산신으로 신봉된 선도성모(仙桃聖母) 등이다. 정견모주는 가야산신으로, 하늘신 이비가와 정(情)을 통해 대가야국 시조 이진아시왕과 수로왕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탈해왕은 죽은 후 토함산의 산신이 됐다고 하며, 선도성모는 선도산의 산신으로 국가가 제향했다고 한다. 산신신앙은 백성뿐만 아니라 국왕에게도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고대 신앙이었다. 가령, 부여 해부루왕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 제25대 평원왕은 여름 가뭄이 들자 산천에 기도했다고 한다. 또 신라 제5대 파사이사금은 메뚜기가 곡식에 피해를 주자 산천에 두루 제사 지냈다고 하며, 제7대 일성이사금 역시 북쪽 변방을 순찰하고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왕실은 전국 명산을 3산・5악・24산으로 나눠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의 제사를 지냈다. 신라의 3산5악은 중국의 천·지·인 삼재사상과 화·수·목·금·토 오행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갖추게 됐으며, 그 성립 시기는 선덕왕 대(780~784)로 추정한다.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산신에 대한 제사가 이때 이르러 체계화됐다고 할 수 있다. 그 명산들은 다음과 같다.

3산: 내력산(奈歷山, 경주 낭산), 골화산(骨火山, 경북 영천에 있는 산으로 추정), 혈례산(穴禮山, 경북 청도에 있는 산으로 추정)

5악: 동악 토함산(吐含山), 남악 지리산(地理山), 서악 용산(龍山, 계룡산), 북악 태백산(太伯山), 중악 공산(公山, 팔공산)

24산: 상악(霜岳, 고성 금강산), 설악(雪岳, 간성 설악산), 화악(花岳, 가평 화악산), 감악(鉗岳, 적성 감악산), 부아악(負兒岳, 서울 북한산), 월나악(月奈岳, 영암 월출산), 무진악(武珍岳, 광주 무등산), 서다산(西多山, 진안 마이산), 월형산(月兄山, 제천 월악산), 도서성(道西城, 충북 진천), 동노악(冬老岳, 전북 무주), 죽지(竹旨, 풍기 죽령), 웅지(熊只, 창원 웅산), 악발(岳髮, 경북 울진), 우화(于火, 경남 울산), 삼기(三岐, 경주 금곡산), 훼황(卉黃, 경주 서부), 고허(高墟, 경주 중부), 가아악(嘉阿岳, 충북 보은),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 포항 청하면), 비약악(非藥岳, 포항 흥해읍), 가림성(加林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 가량악(加良岳, 경남 진주), 서술(西述, 경주 선도산)

경주 선도산 성모사.
성모사 동쪽 약 350m에 위치한 성모사 유허비.
경주 안강 금곡사 원광 법사 부도탑.

 

설화 속 불교와 산신의 대립과 융합

왕실에서는 3산5악24산 명산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무사와 번영을 기원했다. 그런데 불교 전래 이후 국가의 명산에 사찰들이 창건되면서 산신신앙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산신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사찰 법당에서도 안녕을 기원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부처와 산신의 위력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을 것이다.

특히 지방에 불교가 확산하고 산속에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한 6세기 이후에는 토속의 산신신앙과 외래의 불교신앙이 대립하기도 하고 융합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 나오는 원광 법사(542~640)와 삼기산 산신에 관한 설화는 삼국시대 산신신앙과 불교의 대립 및 융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원광 법사가 삼기산에서 수행하고 있는데 어떤 비구가 와서 암자를 짓고 시끄러운 소리로 주술 닦기를 즐겼다. 산신이 원광 법사를 통해 그 비구에게 다른 곳으로 가서 수행하라고 경고했지만, 마귀의 말이라며 듣지 않았다. 이에 산신은 산을 무너뜨려 비구가 살고 있던 암자를 덮어버렸다. 산신의 위력을 알게 된 원광 법사는 산신의 권유로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11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원광 법사가 삼기산의 산신에게 인사드리러 갔더니 산신은 자신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하며, 약속된 날짜와 장소에서 여우의 모습으로 주검을 나타냈다.

위의 원광 법사 이야기는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정리한 설화겠지만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산신에게 죽임을 당한 비구, 산신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떠난 원광 법사, 그리고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 법사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산신이다. 산신과 비구는 대립하지만, 산신과 원광은 융합의 측면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는 산신이 죽으면서 삼기산의 주도권을 불교가 이어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어, 토속적인 산신신앙에 기반해 산사가 세워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원광 법사가 대략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활동했으므로 위 설화는 7세기 전후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삼국유사』 설화 가운데 산신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낭지승운보현수조’와 ‘선도성모수희불사조’, ‘고려영탑사조’ 등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낭지승운보현수조>
지통이 일곱 살에 출가했는데 까마귀가 와서 “영축산에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어라”고 말해주어 영축산에 갔다. 산에 이르자 보현보살이 계품을 주고 사라졌다. 낭지를 만나 까마귀와 보현보살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산의 주인인 변재천녀가 까마귀로 변해 도운 것 같다고 했다.

<선도성모수희불사조>
비구니 지혜가 선도산 안흥사에 살았는데, 불전을 새로 수리하려 했으나 비용이 부족했다. 꿈에서 선녀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선도산 성모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돕고자 하니, 내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불전을 수리하라”고 했다. 지혜는 놀라 깨어 신사(神祠)의 성모상 아래에서 황금 1백 60냥을 파내어 불전을 수리했다.

<고려영탑사조>
고구려 승려 보덕이 평양성 서쪽 대보산 바위굴에서 선정에 들어 관(觀)하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땅속에 8면 7층의 석탑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땅을 파보니 석탑이 있어서 절을 짓고 영탑사라고 했다.

위의 세 설화 역시 산신이 승려를 도와주는 이야기다. 이때의 설화는 불교와 산신신앙이 대립하기보다 융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불교 측에서 만들고 정리한 이야기여서 그럴 수 있지만, 7세기 이후 불교가 토속신앙보다 우위에 서게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송광사 경내에서 보조국사 승탑 다음가는 자리라 하는 율원 뒷담의 ‘나무산신지위’ 석패.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등 몇몇 사찰 안팎으로 산왕지위(山王之位)라고 씌인 석패(石牌)가 있다. 조선 후기에 산신각이 절에 들어오기 전 산신을 모신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옥천 용암사 산신각 아래에는 돌로 조성된 칠성단이 밀양 만어사에는 물고기 형상의 바위가 미륵전 안에 있다.
옥천 용암사 산신각 아래 칠성단. 노승대 제공.
서울 옥천암의 바위. 바위. 노승대 제공. 

 

산에 불교적 신성성 부여한 ‘보살주처신앙’

이후 불교는 산신의 도움을 받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산에 불교적 신성성을 부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으로, 이 산에 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를 흔히 ‘보살주처신앙’이라고 표현한다.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 주처신앙이 한반도에 전래하며 신라의 명산이 『화엄경』에 나오는 산 이름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그 산에 보살이 상주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서는 7세기 선덕여왕 대에 자장(590~658)이 중국 오대산 태화지 연못에서 문수보살을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 자장은 문수보살이 “너희 나라 왕은 천축국 찰리종족의 왕이며, 미리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귀국해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고, 진신사리를 통도사와 태화사 탑에 안치했다고 한다. 천축국은 인도이고 찰리종족은 크샤트리아(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두 번째 지위인 왕족과 무사 계급)이므로, 신라 왕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손이라는 의미다. 즉 문수보살의 권위를 빌려 신라 왕이 부처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림으로써 국왕의 신성성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장의 이야기는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그런데 자장이 신라 국왕을 찰리종족이라고 주장했던 것과는 별개로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 오대산 보살주처신앙이 7세기 말에 성립해 신라에 전해졌다고 보기 때문에 신라 오대산 신앙은 8세기 이후에나 성립했을 것이다. 신라 3산5악24산 봉우리에 보살 이름이 부여된 것은 이보다 더 늦은 시기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에 산신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도력 높은 보살이 산에 상주한다고 믿었다. 가령 금강산에 법기보살이, 지제산에 천관보살이 산다고 믿었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반드시 금강산에 가서 법기보살을 친견했다.

조선 후기에는 산신의 신앙 공간인 산신각이 사찰 안으로 들어온다. 여러 문헌이나 건축물을 볼 때, 17세기 이후에야 사찰 내에 산신각이 건립됐다고 파악된다. 산신각이 사찰 안으로 들어오면서 산신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권속이 됐다. 

 

사진. 유동영

 

이종수
순천대 사학과 교수. 한국불교사를 전공하고, 동국대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와 순천대 지리산권문화연구원 HK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운봉선사심성론』(동국대출판부, 2011) 등이 있으며,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