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한국 고대 산신신앙

삶의 원천으로서 산신, 불교와 융합되기까지

2021-11-24     최광식
태조, 고종 등의 어진을 그린 근대 화가 채용신이 그린 단군상.

산에 하강해 마을 형성한 건국자들

불교, 유교, 도교 등 외래 종교가 전래하기 이전에 한국인은 천신(天神), 산신(山神), 수신(水神)을 믿고 숭배했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천신이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와 농경 생활을 영위하게 하고, 자손을 낳아 국가를 형성하게 하고, 결국 산신으로 자리해 오랫동안 국가의 안위를 돌보고, 가족들의 건강과 생명의 탄생에 이바지했다.

단군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천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농경 생활을 시작하게 하고, 단군을 낳아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형성하고, 마침내 산신이 되어 가족의 건강과 신생아의 출산을 보호하는 보호령으로 남아 삼신신앙의 형태가 됐다. 천신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산신은 할머니나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보아 산신할머니나 삼신할머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 육촌의 육촌장들도 산으로 내려와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박혁거세를 추대해 신라를 건국했다. 알천 양산촌장 알평은 표암봉으로,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는 형산으로, 무산 대수촌장 구례마는 이산으로,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는 화산으로, 금산 가리촌장 지타는 명활산으로, 명활산 고야촌장 호진은 금강산으로 내려왔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주목할 점은 육촌장이 모두 산으로 내려왔다는 점과 육촌장이 자리 잡은 지역 모두 마을 이름 앞에 산 이름이 붙는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에서 온 유이민(流移民) 집단이 먼저 산에 올라가서 자기들이 살만한 곳이 어디인가 살펴보고, 특정한 산을 선정해 산 주위에 마을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금관국에 간 석탈해도 토함산에 올라 양산을 바라보니 호공댁이 길지여서 거짓 꾀를 내어 취했다고 한다. 그곳은 나중에 월성이 되는데, 탈해는 문무왕 대에 토함산의 산신이 돼 동악신으로 숭배됐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 감응해 대가야왕 뇌실주일과 금관국왕 뇌실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고 한다. 천신과 산신의 교감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는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 잘 나타나 있다. 천신은 동심원으로, 산신은 가면 형태로 표현돼 제의의 대상이 됐다. 한편 김수로왕은 김해의 귀지봉에 내려왔다고 기록돼 있다.

고대국가의 건국자나 시조들은 산으로 하강하고 산에서 그들이 거처할 자리를 모색한 후, 산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공통점을 보인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 정도가 산지로, 마을이 산을 등지고 앞에 시내를 끼고 있는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은 바람을 막아주며 비가 올 때 물을 모았다가 비가 오지 않을 때 물을 공급한다. 산에 있는 나무는 땔감을 제공하고, 그 열매와 뿌리는 식량자원을 공급한다. 이처럼 산은 삶의 원천이기 때문에 산을 공경하고 숭배하는 신앙이 일찍부터 싹텄다고 할 수 있다.

태백산 천제단. 삼국 통일 후 신라가 백산을 삼산 오악 중 하나인 북악으로 숭배해 온 이래, 지금도 많은 무속인이 제단을 찾아 기도한다.  중년을 넘긴 듯한 짙은 화장의 한 무리 여인들은 망경사에 짐을 풀고 배낭에 과일과 술을 넣어 제단으로 향했다.

 

국토 수호자로서 숭배된 산

산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숭배의 대상이 됐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삼산에 대한 신앙과 제의가 이루어졌다. 백제는 오산, 일산, 부산 등 삼산에 각각 신인(神人)이 살면서 서로 왕래했다고 한다. 오산, 일산, 부산은 모두 부여의 왕경을 둘러싸고 있다. 삼산이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국토방위와 도성 수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도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 등 통일 이전부터 설정된 삼산이 왕경을 둘러싸고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실성왕 12년(413) 구름이 낭산에서 일어나 누각과 같고 향기가 자욱해졌다. 그러자 왕이 “신령이 강림해 노니는 복된 땅”이라고 해서 이후 수목 베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김유신은 고구려의 첩자인 백석의 꼬임에 빠져 고구려로 가다가 나력, 골화, 혈례 등 호국 여삼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경주지역은 통일 이전 북쪽의 소금강산을 북악으로, 동쪽의 명활산을 동악으로, 남쪽의 남산을 남악으로, 서쪽의 선도산을 서악으로 숭배했으며 여기에 모두 산성을 축조해 왕경의 방호를 담당하게 했다. 신앙의 대상인 산악이 군사적으로는 방호라는 실질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화랑들은 삼산 오악뿐만 아니라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산악을 숭배해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에서 수련했다. 그중 김유신은 중악의 석굴에서 수련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국가의 제사를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했다. 나력, 골화, 혈례 삼산이 대사였고, 팔공산, 토함산, 계룡산, 태백산, 지리산 오악이 중사의 중심이었으며, 소사의 제장(祭場, 제사를 지내는 곳)도 대부분이 산악이었다. 산악은 왕실과 국토 및 그 지역 방호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중요시됐다.

나력은 경주에 있는 낭산, 골화는 영천에 있는 금강산, 혈례는 안강에 있는 얼레산으로, 왕경인 경주지역을 둘러싸고 방호하고 있다. 또한 팔공산은 중악, 토함산은 동악, 계룡산은 서악, 태백산은 북악, 지리산은 남악으로 국토의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싸고 방호하고 있다. 소사는 설악산을 비롯해 24곳이 설정돼 있는데 그중 22곳이 그 지역의 진산이어서 지역 방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노고단. 천왕봉과 반야봉은 우뚝 솟은 봉우리지만 노고단은 가운데 큼지막한 돌탑을 쌓아도 수백 명이 설 수 있을 만큼 평평하고 너른 마당이다. 두툼한 왼쪽 봉우리가 반야봉이고 그 오른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불교 전래와 선불 융합

불교가 전래하면서 천신신앙이나 산신신앙을 믿었던 사람들은 불교 사찰이 왕경에 들어서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려 했으나 천신과 산신을 숭배했던 귀족들이 반대했으며, 특히 이차돈은 귀족들이 천신을 숭배하던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으려고 하다가 결국 순교하게 됐다.

하지만 이차돈 순교 이후 공사를 재개해 진흥왕 대에 17년 만에 흥륜사를 완공하게 됐다. 이후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 등 전불칠처가람(前佛七處伽藍)이 토착신앙의 제장에 창건됐다. 이 과정에서 토착신앙인 천신신앙과 산신신앙은 외래신앙인 불교와 갈등을 벌이면서 차츰 융화되고 토착화됐다.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조를 보면 사찰에서 산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신라시대부터 나타난다. 진평왕 대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선도산 안흥사에 살았는데 불전을 수리하려고 했으나 재원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꿈에 선도산의 성모[山神]가 나타나 어떤 장소를 일러주며 그곳을 파보면 금이 나올 테니 그것을 가지고 절을 지으라고 했다. 비구니 지혜가 꿈에서 깨어나 그곳을 파보니 과연 금이 있어 이를 가지고 절을 지었으며, 선도산 산신의 말에 따라 불·보살과 천신, 오악신군(산신)을 함께 모셨다. 처음에는 갈등하고 대립했던 토착신앙과 불교가 차츰 타협점을 찾아 융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종래는 이를 무속신앙과 불교가 교대했다는 ‘무불 교대’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지만,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했다는 의미에서 ‘선불 융화’라고 표현해야 올바르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불보살과 함께 산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여러 조목에서 나타나며, 산신과 불보살이 서로 돕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①  원광 법사가 삼기산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산신이 나타나 신이한 이적을 보이며 중국으로 가서 공부할 것을 권하고 중국에 가는 계책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원광이 11년간 중국에서 공부하고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해 삼기산에 가서 잘 다녀왔다고 인사하니 산신이 원광 법사에게 수계를 받았다. → 법흥왕 대에는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벌였으나 진흥왕 대에 흥륜사가 완성되고, 이후 진평왕 대에는 불교와 토착신앙이 서로 돕는 모습을 보인다. 

②  자장이 만년에 강릉군에 수다사를 창건하고 살았는데 스님이 꿈에 나타나서 태백산의 갈반지에서 만나자고 했다. 태백산에 가서 그를 찾으니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 똬리를 틀고 있었다. 여기에 석남원을 창건하고 문수대성이 내려올 것을 기다렸다. → 산신신앙과 불교가 서로 돕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③  의상이 당나라 종남산에 들어가 공부하고, 귀국 후 태백산으로 가서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창건했는데 모두 산악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 일반적으로 교종 사찰은 왕경 지역에, 선종 사찰은 지방의 산악지역에 있다. 하지만 삼국통일 이후 교종 사찰들이 산악지역에 들어서며, 토착신앙인 산신신앙과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④  의상 대사의 제자인 지통에게 까마귀가 와서 낭지 스님의 제자가 되라고 전하고, 낭지 스님에게도 똑같이 전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됐는데, 이 산의 주인이 변재천녀(辨才天女, 불법을 노래하는 여신)라고 했다.

⑤  고승 연회가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은둔하고 있을 때 원성왕이 그를 국사로 삼으려 하자 도망가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연회가 한 노파를 만났는데 그녀는 앞에 만난 노인이 문수대성이라고 가르쳐 주고, 자기는 변재천녀라고 했다. → 여기서 변재천녀는 산신령의 성격도 지닌다.

공주 계룡산 중악단. 충남 신원사 대웅전 오른쪽 뒤편에 자리하는 산신각으로, 계룡산 산신을 모시던 제단이다. 본전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전국 최대 규모 산신각이라 할 수 있다.

 

불보살과 산신 모두 품은 사찰

오래된 사찰의 가람 배치를 살펴보면 맨 아래쪽에 장승, 중간에 대웅전, 맨 위쪽에 산신각이 배치돼 있다. 토착신앙의 신성 공간 상·중·하당 구조가 유지되면서 불보살을 모시는 대웅전이 중당에 배치된 것이다. 토착신앙 입장에서 보면, 산신각은 대웅전 뒤꼍으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대웅전 위쪽에 상당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지금도 절을 찾는 많은 신도가 불보살을 모시는 대웅전에서 예불을 드리고, 소원을 기원할 때는 산신각까지 올라가 산신에게 기도한다.

흔히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사찰이 도성에서 쫓겨나 산으로 옮겨가고, 민간신앙과 야합하면서 산신각이 사찰의 뒤꼍에 자리 잡게 됐다고 알고 있다. 또 지금 현존하는 산신각을 18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부터 사찰에서 불보살과 산신을 같이 모셨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이 언제부터 독립건물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시대부터 사찰에서 불보살과 산신을 같이 모셨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진. 유동영

 

최광식
고려대 명예교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고대의 토착신앙과 불교』, 『한국 고대의 국가와 제사』,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읽기 쉬운 삼국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