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인생상담] 존재의 아이

2021-12-06     임인구

세존께서는 사위성에 가셔서 걸식을 마치시고, 식사가 끝난 뒤에 기원정사에서 혼자 경행(經行)하시다가 라훌라가 있는 곳으로 가셔서 라훌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꼭 안반(安般, 수식관數息觀)을 닦아야 한다. 그 법을 닦으면 가지고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죄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중략…) 세존께서는 라훌라를 위해 미묘한 법을 자세히 갖추어 말씀해주셨다. 라훌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세 번 돌고 떠나갔다. 그는 안다(安陀)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 밑으로 가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가부좌하고 앉았다. 다른 생각 없이 마음을 코끝에 매어두고 내쉬는 숨이 길면 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길어도 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짧아도 짧은 줄을 알았다. 내쉬는 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차가와도 차가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따뜻하면 따뜻한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따뜻해도 따뜻한 줄을 알아서 온몸의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알았다.

(…중략…) 그는 다시 뜻으로 번뇌가 없어진 마음을 성취하여 괴로움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 알고, 다시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관찰하여 사실 그대로 알았다. (…중략…) 그리하여 ‘나고 죽음은 이미 끝나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을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사실 그대로 알았다.

그때 존자 라훌라는 이미 아라한이 되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여미고 세존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를 올리고 한쪽에 머물러 세존께 아뢰었다.

“저는 이제 구하던 것을 이미 얻었으며, 모든 번뇌가 다 없어졌습니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아라한이 된 사람 중에 라훌라만 한 이가 없다. 온갖 번뇌가 다한 이를 논하더라도 그 또한 라훌라 비구요, 계율을 잘 지키는 자를 따져보아도 곧 라훌라 비구이다. 왜냐하면, 과거 모든 여래(如來)·등정각(等正覺) 때에도 저 라훌라 비구가 있었고, 부처의 아들로 말하여도 그는 곧 라훌라 비구이다. 그는 직접 부처에게서 몸을 받아 법의 으뜸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_ 『증일아함경』 「안반품」 각색

 

숨쉬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는 것은 숨쉬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언가 숨 쉬는 데 있어 장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순탄치 않고 힘을 더 기울여 무리해야 한다. 무리하니 숨이 더 가빠진다. TV 및 유튜브를 보거나 SNS에서 남들 사는 모습을 보면 마치 숨만 쉬어도 박수를 받는 것처럼 쉽게 사는 것만 같다. 숨이 곤란해서 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 자신의 얼굴과는 다르게 활짝 갠 미소가 가득하다.

대체 차이가 무엇일까? 남들만큼은 노력하고 사는 것 같은데, 평생 걸려도 집 한 채 사기는 불가능할 듯한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간다. 내 집에서 발 뻗고 숨 한번 편하게 쉬어볼 수 있는 현실은 요원하다. 에이 모르겠다, 결국에는 도박 같은 요행수의 방편들에 자원을 투자해보지만, 내 손에서 벗어난 곳의 그래프들이 요동치는 일분일초 매 순간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긴장을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다가 불쑥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누구는 아빠 잘 만나서 뭘 해도 다 쉬운데 나는 모든 것이 다 힘들구나.”

붓다의 아들인 라훌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모든 게 갖춰진 왕국의 후계자로서 모든 것을 다 자기의 것으로 누렸어야 할 라훌라도 한 번쯤은 같은 탄식을 흘렸을 것이다. 12세 때 왕국의 후계자 자리를 유산으로 물려달라고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자신이 청한 유산 대신에 오히려 현재의 황태자 자리도 잃고 출가가 강요된 그 운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어쩌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빠를 잘못 만나서 숨쉬기에 더 큰 장애가 생기고야 말았다. 아빠의 변변치 못함은 내 행복을 막는 장애 요인이다. 어떤 때는 일부러 아빠가 나에게 그러는가 싶기도 하다. 마치 자신이 아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빠가 나도 불행해지라고 하는 그 모든 행동인 듯도 싶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자체가 장애[rahula]라는 뜻을 가진 라훌라는 이에 대해 정말로 무수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수한 생각은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된다.

“나는 저주받은 아이구나. 나를 낳은 이의 앞길도 가로막고, 세상에도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이구나. 나만 없으면 다들 행복할 텐데, 내가 모든 것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구나. 나 같은 건 없는 게 나았을 텐데, 태어나서 죄송하다. 이제는 모든 것의 민폐가 되어 어렵게 숨 쉬는 일을 그만 멈추고 싶다. 내일 아침에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정말로 무수하게 반복됐을 그 하나의 생각이 들릴 때, 붓다는 빠른 걸음으로 라훌라에게 달려갔다.

그림. 김진이

 

“나를 따르라”고 아버지는 말한다.

“너는 꼭 안반을 닦아야 한다. 그 법을 닦으면 가지고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죄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전한다. 숨쉬기 어려워하는 아들에게, 그 어려움으로 이제는 숨쉬기 싫어지기까지 한 아들에게, 숨쉬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법을 전하고자 한다.

이것은 흡사 “나를 따르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나 이는 단지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이가 따라올 수 있는 모범적인 모델링을 제시하겠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이웃종교인 기독교에서도 예수 또한 “나를 따르라”고 말한다. 예수라는 대상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을 듣는 이 바로 그 자신을, 바로 그 자신으로서의 나를 따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부모의 자원과 조력을 따라 성공하는 자식으로서 인생을 묘사하는 의미가 아니다. 부모가 그 자신을 따라 스스로 이룬 바처럼, 자식 또한 그 자신을 따라 스스로 이루는 길을 묘사하는 것이다. 부모가 없어도, 또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길이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일과도 같다. 부모로부터 세습될 수 있는 고급자원은 아무리 커도 부모만큼의 크기다. 그러나 이 유산은 부모보다 더 거대하고 장구한 것한테서 온 것이다. 그 자신을 따라 온전함을 이룬 그 모든 으뜸가는 인간으로부터 전승된 가장 고귀한 것이다.

라훌라는 이 가장 위대한 유산의 뜻을 눈치챈다. 그리하여 숨쉬기를 이해하라는 말을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해라”라는 아버지의 말로 알아듣지 않고, “너 자신을 따르라”는 붓다의 말로 정확하게 알아들으며 그 자신이고자 홀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한 기대와 원망, 의존, 환상을 기각하고 그의 삶에서 처음 단독자로 위치한다. 그렇게 삶을 내밀하게 마주한다. 삶을 이해할 적격한 채비를 갖춘다.

숨 가쁘게 시름하던 자신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붓다의 모습에, 왜인지는 몰라도 숨이 벅찼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자신이 정말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그 숨이라는 것에 담겨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숨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고통의 이유에 불과했던 숨은 이제 알고 싶은 관심의 소재가 되었다. 숨쉬기가 더는 저주받은 존재로서 자기증명이 아니라, 다른 무엇일 가능성으로 개방됐다. 내가 숨 쉰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던 기존의 판단을 중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다시 알게 될 순간을 비로소 맞이했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직접 그 사실을 알아볼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현상학적 실천이 시작되었을 때, 숨소리는 들려왔다.

 

네가 있어 모든 것이 기뻐한단다

“내쉬는 숨이 길면 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길어도 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짧아도 짧은 줄을 알았다. 내쉬는 숨이 차가우면 차가운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차가와도 차가운 줄을 알며, 내쉬는 숨이 따뜻하면 따뜻한 줄을 알고 들이쉬는 숨이 따뜻해도 따뜻한 줄을 알아서 온몸의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관찰하여 모두 다 알았다.”

라훌라는 알았다. 알았다는 것의 의미를 또한 알았다. 정말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알았다는 것은, 알려주는 대로 알았다는 것이다. 숨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그 자신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숨을 안다는 것은, 숨이 알려주는 것을 보고 들으며 알려주는 사실 그대로를 아는 일이었다. 안다는 것은 혼자서 수수께끼 풀듯 알려고 애써야 하는 게 아니라, 현상이 스스로 개방해 알려주는 대로 정직하게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앎은 알려주는 것과 아는 것의 상호적인 만남이었다. 혼자인 라훌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숨과 함께 있었다. 그러니 자기가 홀로 외롭고 힘들게 자기의 숨을 떠맡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훌라는 짧은 숨을 길게 만들 수도 없었고, 차가운 숨을 따듯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숨은 라훌라가 얼마나 대견한지 알려주고 있었다. 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멈추지 않으며, 라훌라를 무조건 귀하게 살리고 있었다.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따뜻하면 따뜻한 대로, 여실한 필요에 따라 각 상황에서 라훌라가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식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너는 살아도 된다”라고 속삭이듯이, 숨은 부드러운 만큼이나 강건했다. 어떤 장애에도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숨쉬기의 어려움은, 숨쉬기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든 라훌라를 살리기 위한 숨의 필사적 행위였다. 라훌라를 저주받은 아이로 결코 죽게 하지 않으려는 모든 존재의 한뜻이었다.
라훌라를 둘러싼 모든 것이 숨과 같았다. 모든 것이 라훌라의 존재를 한뜻으로 긍정, 또 긍정하고 있었다. 라훌라는 혼자였지만 정말로 혼자가 아니었다. 누구도 라훌라가 존재하는 일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존재는 그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사실 그대로 알았다.” 존재의 사실을 알았다. 그는 존재의 아이였다. 존재하는 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그가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세상이 기쁨에 떨었다.

“라훌라 만한 이가 없다. 그는 가장 존재해야 할 사람이다.”

존재의 아이가 자신을 따라 스스로 눈뜬 순간, 붓다는 그 순간을 그저 한정 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