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조선시대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나라가 인정하는 스님의 조건 출가와 도첩度牒 제도

2021-10-27     양혜원
한양도성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후기 한성부 행정 구역 전체를 포괄하는 지도로, 붉은 점선을 통해 한성부 오부(五部)의 경계를 나타냈다.

 

백성 가운데 승이 3할

태조 4년(1395) 2월, 대사헌 박경(朴經) 등은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린다.

“나라의 도승(度僧)은 정해둔 수효가 없고, 백성 가운데에 승(僧)이 3할은 되는데, 그중에 부역할 수 있는 자가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대개 승은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배부르게 먹지 않고 일정한 곳에 거처하지 않으며 승당(僧堂)에서 마음을 닦는 자가 상(上)이요, 법문을 강설하고 말을 타고 바삐 돌아다니는 자가 중(中)이요, 재(齋)를 맞이하고 초상집에 달려가서 먹고 입는 것을 엿보는 자가 하(下)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옵건대 하급의 승을 국가 공사에 일하게 하여 무엇이 해가 되겠습니까?”

조선은 개국하고도 한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그대로 있다가 태조 3년 10월에야 한양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한양은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는데, 당장 궁궐과 성을 축조하기 위해 수만 명의 인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백성들을 차출해 부역을 시키다가 봄이 되어 농번기가 닥치고 이들을 더 잡아둘 수 없게 되자, 대사헌 박경 등이 승 가운데 하급 부류를 불러서 일을 시키자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위 사료는 불교사에서 살펴볼 만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여럿 중첩돼 있다. 여기서 스님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는데, 청정하게 수행하는 스님을 가장 높이 치는 점은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에서 누차 등장하는 언급이다. 다음으로 법문을 강설하면서 말을 타는 경우는 승직(僧職)을 가진 스님들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들을 두 번째 부류로 꼽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도들이 올리는 재를 설행하거나 초상집에서 명복을 빌어주고 사례를 받는 일을 주로 하는 경우를 가장 하류로 분류해, 이들은 부역 대상으로 삼아도 문제없으니 백성 대신 도성 건설 공사에 동원하자고 건의했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예나 지금이나 청정수행에 매진하는 출가자에 대한 존경은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더불어 눈에 띄는 내용은 ‘백성 가운데 승이 3할’이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란 부역을 질 수 있는 남성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중 3할이라니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은 수치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중국 『송사(宋史)』 고려전에는 ‘고려의 인구는 총 210만 명으로, 병사, 백성, 승(僧)이 각각 3분의 1씩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저런 과도한 수치 안에는 다양한 성격의 승이 포함돼 있겠지만, 일단 이미 고려시대부터 출가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많은 승도(僧徒) 수는 새로이 건국된 조선이 직면한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한 가지였다. 그들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국가의 부역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므로 승의 과도한 증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부담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식의 비판은 일찍부터 있었다. 당나라 한유(韓愈, 768~824)는 백성 가운데 농공상(農工商) 셋이 생산한 것을 사농공상(士農工商) 넷이 나눠 먹다가 불교의 승이나 도교의 도사가 합세하면 다섯 혹은 여섯이 나눠 먹어야 하니 백성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다고 기록한다. 비생산층으로서의 승을 비난하는 고전적인 논리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주장이지만, 승이 사농공상 밖에 있으면서 그들의 생산물을 축낸다는 식의 이런 비판은 정도전(鄭道傳)이나 최만리(崔萬理)의 언급에서도 보이는 등 조선시대에까지 곧잘 인용됐다. 

이 같은 유학자들의 비판은 같은 비생산층이라도 유학을 공부하는 ‘사(士)’는 되고 승은 안된다는 논리여서 애초에 불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을 전제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유학자들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러한 불교 비판은 승이 백성의 3할에 이르는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개국 당시 승은 너무나 많고 흔한 존재여서 일거에 없애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5월 10일 무오(戊午) 1번째 기사 ‘예조에서 도승첩을 주는 법을 건의하다’ 부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戊午/ 禮曹啓給度僧牒之法 : 謹按《六典》, 兩班子弟, 下至公私賤口, 擅自削髮, 甚爲不當。 今後兩班子弟自願爲僧者, 父母親族具錄辭因, 告僧錄司, 轉報禮曹, 啓聞取旨, 然後徵丁錢五升布一百匹, 給度牒, 方許出家

예조가 도승에게 계첩하는 법: 삼가 《육전》에 따르면, 양반 제자들은 공사천리로 내려가 제멋대로 삭발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앞으로 두 반의 동생은 자진해서 승자가 되고, 부모 친족은 사인을 기록해, 승려에게 보고하고, 예조에게 전보해 계문취지를 취한 후, 정전 5승포 100필을 징집하여 도첩을 하고, 출가를 허락한다.  

 

세간의 제도적 출세간 자격, ‘도첩승’

고려 말부터 조선 개국 후에 이르기까지, 승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는 이상과 같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가 통제되지 않고 증가일로에 있다는 데 초점이 있다. 승의 증가에 따른 사회적 문제는 조선뿐 아니라 불교 수용 이후 여러 왕조에서 꾸준히 제기되던 난제인데, 이는 승이 갖는 ‘출세간(出世間)’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출가자 승은 세간을 떠났으므로 원칙적으로 세간의 모든 것과 관계를 끊기에 출가자들이 지켜야 할 바는 ‘세간의 율’이 아니라 ‘출세간의 율’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위와 같은 원론적 출세간의 의미가 관철되기는 어렵다. 스스로 출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국가로부터 용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세간의 통치체제가 그들이 출세간임을 인정해 줘야 비로소 세간의 현실적 속박에서 벗어날 여지가 생긴다. 세간의 현실적 속박이란 예컨대 법률을 위반했을 때 받는 처벌, 군신 관계를 비롯한 여러 위계, 국역 같은 세간의 의무들이다. 

돌이켜보면, 승에 대한 세간의 통치가 가능한가, 승이 세간의 왕에게 예경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불교가 보편적 사상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에 심각한 논의 대상이었다. 출가자로서의 정체성과 왕에 대한 예경은 승속 간에 타협할 수 없는 가치였다. 동진의 사문 혜원(慧遠)이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서 출가자는 왕에게 예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북위의 사문 법과(法果)가 ‘황제는 현재의 여래’이므로 출가자가 왕에게 예경하는 것은 문제없다는 주장 등은 그러한 갈등을 잘 대변한다.

동아시아에서 불교가 확산함에 따라 불교 교단은 국가 체제 아래로 예속돼 간다고 평가되나, ‘출세간 승은 세간에서 나간 존재’라는 관념은 세속권력이 용인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인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출세간 승의 문제에 대한 제도적 해법은 세속의 왕화(王化)가 미치는 통치체제의 큰 틀 내에 ‘도승’의 법을 두고 승을 출가시킨 후 도첩(度牒)을 줘 제도적 출세간인 도첩승(度牒僧)을 배출하는 방식으로 정리됐다. 이는 승이 출세간임을 인정하되 세속 제도로 그 범주를 한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가 치성한 사회에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방법으로 고안된 제도라 하겠다. 

따라서 ‘도승’이란 나라에서 정해둔 절차에 따라 승을 출가시킨다는 의미의 제도적 용어다. 도승 하려는 자는 국가가 이를 허가하는 증빙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도첩’이라고 한다. 도승 할 때 도첩을 발급하기도 했기 때문에 ‘도첩제’라고도 부른다. 이 도첩을 소지한 승을 ‘도첩승’이라고 하며 도첩승은 세속의 부역에 차출되지 않는다. 이는 국가 제도가 ‘출세간 승’의 개념을 수용해, 제도적 출세간인 도첩승에게 면역의 특전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첩은 도승의 징표이자 역 면제의 효력이 있는 증서이므로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으며, 신분, 재력, 능력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을 충족해야만 발급됐다.

한양도성 낙산구간. 조선시대 스님들은 백성 대신 도성 건설 공사에 동원됐다. 
한양도성 낙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초입부 성벽에 새겨진 글씨인 ‘각자성석(刻字城石)’. 성돌에는 ‘이패장(二牌將)’, ‘삼패장(三牌將)’ 같은 관직과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층 강화된 조선의 도승제

승이 넘치게 많았던 조선도 이를 통제하고자 도승제를 운영했다. 승도 수 과잉은 국역을 부담할 백성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한층 강화된 도승제가 법전에 수록됐다. 우선 조선 초 도승제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왕조의 첫 번째 간행 법전인 『경제육전』의 도승제를 고찰해야 한다. 『경제육전』에 수록된 도승제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소수의 관인 자제인 ‘양반 자제가 스스로 승이 되기를 원한다면 → 부모나 친족의 허락을 얻어 승록사(僧錄司)에 신고 → 예조에 보고 → 왕의 허락을 받음 → 정전(丁錢) 오승포 100필 징수 → 도첩 발급 후 출가 허용’하는 순서다. 이에 더해 도첩을 줄 때 재행(才行)을 시험했다. 

위 도승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도승 대상을 ‘양반 자제’로 한정한 부분이다. 조선 초 양반은 흔히 알고 있는 조선 후기 양반과 달리 문무반(文武班) 현직 관료를 의미하는 극소수의 존재다. 오승포 백 필이나 되는 돈을 낼 재력이나 승으로서 재행의 연마 등은 어려워도 후천적으로 대비할 수 있지만, 현직 관료의 아들이라는 신분 규정은 생득적인 것이라 대비가 불가능하다. 결국 법적 도승 대상 자체가 매우 소수로 도첩은 신분이 높은 집안의 자제가 출가할 경우 받을 수 있는 증빙이라는 점, 국가는 많은 수의 도첩을 발급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초 도승제는 높은 신분 기준과 까다로운 절차, 도승자의 재력, 자질 등의 요건을 복합적으로 요구했다.

그렇다면 도첩을 받지 못한 승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이른바 무도첩승이다. 현실적으로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지만, 도첩이 없으므로 ‘제도적’으로는 민(民)이다. 때문에 이들은 국가의 역에 차출된다. 교리적 출가에는 자격 제한이 없으나, 국가 체제 내에서는 신분과 경제력 등 세속적 자격을 갖춰야 ‘제도적’ 출가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실 도승뿐만 아니라 『경제육전』에서 확인되는 승과 관련된 여러 조문은 신분적 속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예컨대 도첩승은 승과(僧科)를 통해 승직을 받을 수 있었다. 승과는 과거시험이 열리는 해에 맞춰 치러지며 법전에 시험의 과정과 선발 인원을 규정했다. 승과에 합격해야 사찰의 주지로 나갈 수 있었는데, 이들은 국가 제도를 통해 선발된 출세간의 관리로 세속 관료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또 출가했다가 환속하는 경우, 관직에 나갈 때 과거를 면해주고 불교계에서 역임했던 승직에 준해 관리로 서용하도록 하는 특전이 부여됐다. 이 같은 내용을 미루어 도승 자체가 초입사례(初入仕例, 관직에 나아가는 첫 번째 시험)에 준하는 조건을 보증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초 이러한 제도의 대상이 하층민이라고는 상정하기 어려우며, 이러한 맥락에서 도승 대상인 ‘양반 자제’ 규정이 수긍되는 면이 있다.

한편 『경제육전』의 까다로운 도승 규정을 적용하면 도첩승은 필연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으며, 바로 이 점이 『경제육전』의 도승제를 규정한 이유라고 판단할 수 있다. 즉, 당시 도승 규정을 적용하면 승 가운데 소수의 도첩승과 다수의 무도첩승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민의 3할이 승이더라도 도첩승이 돼 면역의 특전을 받는 범위는 매우 좁아지게 된다. 이는 도첩 소지에 따라 제도적 출세간의 범주를 한정하는 것으로 제도적 출세간은 도첩승에 국한되며, 무도첩승은 제도적으로 세간에 속한다. 곧 제도적으로 보았을 때 무도첩승은 세간의 역 차정(差定, 임명하여 사무를 맡김)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법이 과다한 출가자를 강제 환속시키거나 절을 파괴하지 않고 불교계의 규모를 축소할 수 있었던 조선의 한 수였다. 

 

양혜원
한국불교사, 그 중에서도 조선에서의 불교, 국가와 불교의 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조선초기 법전의 ‘승(僧)’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로 법전, 지리지, 금석문, 각종 문집의 기록으로 불교가 사회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고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