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사대문 안의 능침사찰, 흥천사

2021-10-27     김남수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눈에 도성 안의 사찰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선 개국 직후(태조 3) 천도가 결정됐고, 이듬해 궁궐과 종묘, 관청이 한양에 세워졌다. 건국 세력은 새 수도에 사찰을 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천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 이성계의 뜻에 따라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정릉에 있는 흥천사(興天寺)의 전신이 그 시초일 것이다. 

정릉 신덕왕후 능. 사대문 안에 세워졌다가 태종 대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흥천사의 건립은 이성계의 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침사로 건립된다. 신덕왕후는 조선 개국 5년 뒤에 마흔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는 아내를 가까이 두고자 도성 내에 능을 조성하고 흥천사를 지었다. 사리각도 세웠다. 지금의 정동길로 추정되고, 경복궁과 지척의 거리였다. 사찰의 규모는 170여 칸에 달했고, 전지(田地) 1,000 결이 내려졌다. 금빛 채색이 찬란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왕위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던 신덕왕후에 대한 복수로 정릉을 도성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능의 석물은 청계천의 광통교 부재로 사용했다. 그렇게 100년 넘게 방치되다 격에 맞게 후에 복구했다. 

능침사 역할을 했던 흥천사는 어떻게 됐을까? 능이 옮겨진 뒤에도 태조의 원찰로 기능하다가 연산군 대에 큰불이 나고, 중종 대에 다시 불이 나서 사리각까지 전소해 폐허가 됐다. 정릉을 복원하면서 근처에 있던 암자를 옮겨 신흥사(新興寺)로 명했고, 지금의 흥천사가 됐다. 

흥천사 대방. 등록문화재 제583호로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건립됐으며 대원군 친필 편액이 걸려있다.

흥천사가 세워진 비슷한 시기에 지천사와 흥복사도 세워졌다. 태종 대에는 흥덕사가 창건됐다. 지천사와 흥덕사는 각각 1408년(태종 8), 1425년(세종 7)에 관청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흥복사는 세조 대에 원각사로 복원되지만 연산군 대에 기방으로 바뀌어 폐사됐다. 지금의 탑골공원이 그 자리다. 

정릉 비문. 1899년에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며 세웠다. 

 

사진. 김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