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휴머니스트 유토피아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2021-11-08     이상헌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처음으로 거론한 20세기 초의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Julian Huxley)는 인간종이 인간 본성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해 인간종 자신을 초월할 수 있고 또 초월해야 한다는 믿음이라고 트랜스휴머니즘을 규정했다. 현대 휴머니즘도 우리에게 익숙한 생물학적 한계를 기술적 수단을 통해 극복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헉슬리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이른바 근본적인 인간 향상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간성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인간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옥스퍼드대 인간미래연구소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나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하면서 근본적으로 향상된 미래의 인류 혹은 포스트휴먼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멋진 세상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존 해리스(John Harris)는 인간이 더 나은 종으로 변할 때까지, 세상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때까지 인간의 진화와 미래의 발전을 통제하는 것은 일종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유토피아에 관한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상상하는 미래가 정말 유토피아일까?

 

인간 향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머니즘이 기술을 통해 인간존재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믿는 지적·문화적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 향상을 가능케 하는 기술들의 영향, 기대되는 결과, 잠재적 위험에 대한 연구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연구를 통해 인류는 포스트휴먼으로 안전하게 이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스트롬을 비롯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그리는 미래의 인류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젊게 살며, 지적으로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하고,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돼 있으며, 거의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존재들이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다.

기술적 수단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성향을 향상하는 것, 이른바 도덕 공학을 지지하는 마크 워커(Mark Walker) 같은 이들은 기술적 수단을 인간에게 직접 적용하는 기획을 통해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도덕적 행동에 관련된 유전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개개인의 덕성을 향상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쉬운 사람들이 탄생할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지금보다 더 평화롭고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워커는 인간 본성의 나쁜 성향들을 제거해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그러한 자연적 성향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행동 성향에 관련된 유전자를 조정하여 인간의 품성을 좀 더 덕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일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좀 더 나은 삶으로,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므로 윤리적으로도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인간 향상은 이처럼 인간의 지적 능력이나 신체 능력의 급격한 개선뿐 아니라 의지 능력, 다시 말해 도덕적 능력의 개선에까지 이른다. 도덕적 품성의 함양은 인류 역사의 오랜 숙제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공부와 수양을 통해, 근대 계몽주의에서는 이성의 자각과 교육을 통해 우리가 좀 더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의 도덕적 품성을 얻는 일은 매우 어렵고 드문 일로 간주했다. 다양한 종교 전통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수행을 거쳐서만 그런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주장하듯이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수단을 활용해 인간이 더 나은 도덕적 품성을 얻거나, 도덕적 품성을 가꾸기가 훨씬 쉬워진다면 그런 세상을 유토피아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유토피아 대부분은 물질적인 풍요가 넘치는 공정한 세상을 그리고 있는데, 그 바탕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온화하고 순종적이며 도덕적인 성품을 가정하고 있다. 

 

결핍 없는 세상, 코케인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그리는 인류의 미래가 유토피아라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유토피아일까?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일종의 로고스에 의해 통치되는 진리의 왕국이었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공산주의적인 도덕 공동체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의 벤살렘 왕국은 번성한 기술 왕국이었다. 독일 철학자 하우스켈러는 트랜스휴머니스트 유토피아를 중세의 전설적인 이상향 ‘코케인(Cockaigne)’에 비유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도덕 공학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을 인류의 진보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장애로 인식하고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생물학적 운명은 인간의 고통과 불화, 불행의 원천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복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온갖 고통의 폐기를 모든 인간 행동의 궁극 목표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영국의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earce)는 쾌락주의 명법을 주장하며, 미래 인류는 고통의 생물학적 기체를 완전히 근절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케인은 서양 중세의 전설적인 이상향으로, 고대 그리스 문헌들에서 그 뿌리가 발견된다. 모어나 베이컨 등 근대 유토피아 사상가들이 그린 이상적인 사회처럼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고,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희망을 담아낸 일종의 몽상적인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코케인은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이 없고,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없는 곳이다. 그야말로 결핍이 없는 무한한 풍요와 만족의 세계이다. 코케인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소망의 나무, 누구나 늙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젊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젊음의 샘이 있다. 넘쳐나는 풍요는 코케인의 상징이다.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꿀과 우유, 포도주는 강물처럼 넘쳐난다. 성은 모두에게 완전히 개방되고, 모든 사람은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무한한 쾌락은 코케인을 상징하는 또 다른 단어이다.

어느 나라 신화에서든 이상적인 세상을 그릴 때 코케인의 이미지와 비슷한 요소들이 다소 포함된다. 이상향은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이고, 현실은 늘 궁핍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시키기 어려운 현실, 혹은 극심한 계층 간 격차와 서민들에게만 부과되는 과중한 짐에 눌린 세상에서 그 극단인 욕구의 완전한 충족, 사치와 향락으로 넘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일은 자연스럽다. 14세기 중반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시 ‘코케인의 나라(The Land of Cockaigne)’는 당시 궁핍했던 영국 농민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코케인의 나라는 온갖 먹을거리로 넘쳐나는 곳이며 가난한 자들의 천국이다.

코케인에는 현실 세계에서의 법과 규범이 없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며, 도덕으로 억압하지 않는다. 지배와 종속의 관계도 없고, 생산과 분배도 없다. 종교와 정치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다툼과 분쟁이 없고 고통도 없으며 한없는 평화만 있다. 

 

기술로 건설하는 유토피아

트랜스휴머니스트 유토피아는 기술낙관주의자들의 코케인이다. 생명공학과 의료기술로 모든 질병을 퇴치하고, 인공지능과 로봇기술로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보통신기술과 사물인터넷으로 모든 인간과 사물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뇌 연구를 통해 정신 능력을 무한히 확장하고, 심지어 마인드 업로딩으로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인간은 무한한 만족과 행복, 고통 없는 무제한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진보하는 과학기술이 우리를 고통 없는 행복한 미래로 인도할 것이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용기를 내어 진심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인간에 대한 이중적 관점을 바탕에 깔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한편으로 인간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가정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에 대해 탐구해 자연의 진리를 밝혀내고 그것을 토대로 자연을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으로서도 자신의 본성에 관해 변화를 꾀할 수 있으며, 스스로 진화의 방향을 설정하고 감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마침내 자연이 준 모든 경계들을 넘어서 완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단순한 자연적 존재로 취급한다.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먹고 마시고 잠자고 욕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 본성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인간이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적 욕구의 충족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물질적 결핍이 경쟁과 갈등을 유발하므로 풍요를 극대화하면 경쟁이 사라지고 갈등이 극도로 줄어들 것이라는 상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모든 사람이 부자라고 할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로워져도 사람의 욕심은 감당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또한 욕망은 절대적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충족되는 성격이 강하다. 오늘날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제도나 정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인간 본성 문제이기도 하다. 물질적 만족이 행복의 기본 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닌 듯하다.

 

아미타불이 건설한 불국정토

서양의 유토피아에 상응하는 것을 불교에서 찾으면 아마도 극락일 것이다. 나중에 아미타불이 된 법장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염원했고 오랜 수행으로 완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서방 정토이다. 그곳에서 태어나는 중생은 한결같이 훌륭한 몸을 가지고 있어 잘난 이와 못난이가 따로 없다고 한다. 그곳은 무량수 부처님이 다스리는 곳으로 끝없는 기쁨의 땅이다. 그 세계는 무혹의 뿌리가 근절됐기 때문에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데서 오는 괴로움, 즉 삼독이 없다. 진정한 즐거움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제거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정토사상을 설법한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중생들의 행태에 대해 언급한다. 많은 중생이 선업을 쌓지도 않고 도를 닦거나 덕을 쌓지도 않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혼자 외롭게 어두운 세상을 갈 수밖에 없다. 죽은 후에 가는 세상은 선업이나 악업의 결과에 따라 받는 과보다. 그런데 중생은 선악에 대한 인과의 도리마저 모르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말하는 인간 향상에는 선업을 쌓는 과정과 노력이 생략됐다. 인간을 기계처럼 생각해서 기술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불국정토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을 향해 염원하고 선업을 쌓으며 마음을 정진해야 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은 불국토에 나고자 하는 사람이 닦아야 하는 세 가지 복에 대해 언급한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한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 자비심을 길러야 하며, 열 가지 착한 일[十善業]을 행해야 한다. 둘째,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 도덕 규범을 지키며 위의(威儀)를 어기지 않아야 한다. 셋째, 보리심을 내어 깊이 인과의 도리를 믿고 여래의 말씀을 독송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청정한 업을 행함으로써 중생은 불국정토에 이를 수 있다.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을까? 나 자신을 다스리고, 타인을 자신 못지않게 배려할 수 있는 세상은 우리 마음을 바꾸는 일에서 시작한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족하더라도 마음속에 악마를 키우고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면 그곳은 지옥이 될 것이고, 몸이 조금 고달프더라도 마음속에 선인을 키우고 마음을 극락으로 향하게 하면 그곳은 곧 극락이 될 것이다. 물론 마음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말은 일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정토사상과 같은 내세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현생에서 선업을 많이 쌓으면 다음 생에서는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 모두 마음속에 선인을 키우고 마음을 극락으로 향하게 할 수 있기를 빈다.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