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세 자발적 파놉티콘의 삶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2021-10-18     백승권

● 파놉티콘(Panopticon): 감시자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는 원형 형태의 감옥. 영국 철학자이자 법학자 제러미 벤담(1748~1832)이 고안한 감옥 건축양식이다.

 

높은 인지도, 기회이자 위기

강연을 많이 하다 보면 얼마쯤 얼굴이 알려진다.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면 꽤 많이 알려진다. 더러 길거리나 기차 안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고 ‘내가 유명해졌구나’, 저절로 느끼게 된다.

2018년 강원국 작가와 함께 미국 순회강연을 간 적이 있다. 한가한 낮시간 둘이서 LA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옆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한국인 모녀로 보이는 두 여성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강 작가의 팬들이었다. 그가 출연한 유튜브 방송을 보고 팬이 됐다며 이렇게 LA에서 만날 줄 몰랐다고 좋아했다. 즉석에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그날 저녁 열린 강의까지 찾아와 책에 사인을 받아 갔다. 강 작가와 함께 강연할 때면 확실히 그의 대중적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을 자주 만난다.

필자는 강의를 많이 하긴 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강 작가와 같은 일이 필자에겐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6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뒤 지인과 함께 작은 규모의 술집에 갔는데 거기서 필자를 알아보는 손님을 만나고 적잖게 당황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얼굴이 알려지고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은 기회이자 위기다. 강연 섭외가 늘고 강연료가 오른다는 점에선 기회다. 그러나 익명성이 주는 자유를 포기하고 말과 행동에 따른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선 위기다. 유명세에 따른 상황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조언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관리의 영역’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든다. 

 

혜민 스님과 현각 스님

작년 11월 혜민 스님이 tvN <온앤오프>에서 자택과 명상 앱 사무실 등을 공개했고, 시청자들의 거친 비난에 휩싸였다. 남산 뷰의 주택을 소유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IT 기기를 사용하는 스님에게 ‘무소유가 아니라 풀 소유’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스님은 논란이 계속되자 결국 대외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혜민 스님은 UC버클리대 학부와 하버드대 대학원을 나오고 햄프셔 칼리지 교수를 7년 정도 하다 한국에 들어와 마음치유학교, 명상 앱 등 새로운 사업을 의욕적으로 벌여나가고 있었다. 

이 논란을 점화한 사람은 숭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한 또 다른 하버드대 출신 미국인 현각 스님. 그는 페이스북에 혜민 스님 사진을 올리고 “연예인일 뿐이다, 일체 석가모니의 가르침 전혀 모르는 도둑놈뿐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뿐이야”라고 비난했다.

이 논란을 지켜보면서 두 스님과의 짧은 인연이 떠올랐다. 

2013년 도법 스님과 함께 미국 뉴욕 맨해튼에 소재한 유니온신학대학원 불교-기독교 컨퍼런스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이때 혜민 스님을 처음 만났다. 혜민 스님은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발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런 혜민 스님이 컨퍼런스에서 도법 스님 통역을 맡아준다고 해서 아주 고맙게 생각했다. 컨퍼런스 기간 내내 혜민 스님은 성심껏 통역 자원봉사를 해주었고 쉬는 시간엔 도법 스님, 법륜 스님과 법담을 나누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는데 혜민 스님의 출가 이유에는 꽤 진지하고 깊은 고민이 바탕에 깔렸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컨퍼런스의 다양한 순간들을 사진과 글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어느 날 혜민 스님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도법 스님과 다른 참석자들이 찍힌 사진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갔다며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즉시 그 사진을 내렸다. 미디어를 철저하게 관리하며 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대중에게 어떤 방향으로 자신이 비치거나 비치지 않아야겠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꼼꼼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하게 됐다.

현각 스님과의 인연은 도법 스님과 뉴욕 불광사를 방문했을 때 닿았다. 몇 마디 말과 동작으로 이 스님이 괴각(乖角, 성질이 비꼬임)스럽게 바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리저리 들려오는 스님을 둘러싼 우울한 이야기도 그때 받은 인상과 다르지 않았다. 

현각 스님은 자신이 부딪친 한국불교의 현실과 문제점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절규하듯 토해냈다. 그러나 그를 한국에 알린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20년 가까운 법랍에도 불구하고 하버드대 출신 미국인이라는 유명세 외에 그의 메시지를 떠받치는 그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가 겪은 실패와 상처가 안타깝긴 했지만, 그 실패와 상처로부터 절절하게 배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현각 스님이 수행자로서의 정체성을 아직도 갖고 있다면 혜민 스님을 경책할 때도 ‘배설의 언어’가 아니라 ‘할의 언어’를 쓰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멈추지 않은 채 보이는 것들 

두 스님의 논란을 지켜보면서 보이는 것과 실재하는 것 사이의 착종으로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대부분이 전통적 출가자의 상을 설정하고 혜민 스님의 색다른 모습에 비판을 가하는데 그건 온당치 않다고 본다. 전통적 출가자 상은 가능하지도 않고 유효하지도 않다.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건 시대착오나 위선이다.

무소유를 들어 ‘풀 소유’란 비판을 가하는데, 불교의 무소유는 ‘소유하고 있지 않음’이 아니라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내 것이라는 집착을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 것이든 아니든 중생, 즉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이다. 혜민 스님의 건물 소유와 명상 앱 운영도 그런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일이다.

적어도 불교계는 두 스님을 둘러싼 논란이 불교적 가치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질문해야 옳다고 본다. 불교는 표층부터 심층까지 모두 불교다. 기복과 안녕을 구하는 신앙부터 세상을 바꾸려는 실천불교까지, 무문관 토굴 정진부터 맨해튼 마천루 명상센터의 위빠사나 수행까지 경계를 두지 않는다.

다만 궁극적으로 중도연기의 가치와 중생구제의 실천에 부합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미디어에 비친 모습만으로 그런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더 지켜보고 난 뒤 따져도 늦지 않다. 안전한 훈고의 길만 가는 것보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뜻을 비틀며 다양한 비아냥조의 패러디를 내놓았다. 위빠사나, 즉 지관(止觀)을 아름다운 우리 말로 옮겨놓은 것인데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디어는 늘 멈추지 않은 채 보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유명해진다는 것은 그 시선의 감옥에 알몸을 맡기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냥 그대로 보여도 좋은 삶

두 스님은 하버드대 출신이란 사실을 부각해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 출신 대학을 따져 그 사람의 전부를 평가하는 것으로 따지면 우주 최강인 대한민국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대중의 관심을 종잣돈 삼아 인지도를 키웠고 미디어와 이해관계가 맞아 서로 당겨주고 끌어주면서 시너지를 만들어 왔다. 신문 인터뷰와 칼럼, 방송 출연을 통해 인지도와 영향력은 계속 커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순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논란이 벌어지고 여론이 싸늘해지면 미디어는 태도를 바꿔 대중의 비난과 공격에 영합하고 앞장서기까지 한다. 미디어를 ‘하이에나’에 비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관리가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을 만났던 사람들이 SNS나 댓글에 올리는 글 한 줄, 사진 한 장까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모든 동작과 언어와 표정은 전략적으로 조율되고 통제돼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유명세를 추구하는 삶은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에 갇히는 일이다. 파놉티콘의 변덕스러운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는 누구에게나 그대로 보여도 좋은 삶을 사는 길은 없을까? 더 유명해질 리는 없지만 이렇게 공연한 걱정을 한번 해본다.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