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인생상담] 흙을 위해

2021-10-08     임인구

 

붓다에게 흙 한 줌 바친 공덕으로 훗날 8만 4,000개의 탑을 세우는 과보를 얻는 연기를 표현했다. 통도사 팔상탱 녹원전법상 중 소아시토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부처님이 걸식하던 중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봤다. 아이들은 흙을 모아 집과 창고를 짓고 보물과 곡식을 만들었다. 

한 아이가 부처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마음으로 공경하고 기뻐하여 보시할 마음이 생겼다. 창고에서 곡식이라 이름 지은 흙을 한 줌 쥐어 부처님에게 보시하려 했다. 그러나 키가 작아 미처 가지 못하여 한 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네 위에 올라가 이 곡식을 부처님께 보시하겠다.”

한 아이는 매우 기뻐하여 좋다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곧 다른 아이 어깨에 올라서서 부처님에게 흙을 바쳤다. 부처님은 발우를 낮추고 머리를 숙여 그것을 받아 아난에게 주면서 말씀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내 방바닥을 발라라.”

걸식을 마치고 절에 돌아오자 아난은 그 흙으로 부처님의 방바닥을 발랐다. 흙은 한 귀퉁이를 바를 정도의 양이었다. 부처님이 말씀했다.

“아까 그 아이가 기쁘게 흙을 보시하여 내 방 한 귀퉁이를 발랐다. 그는 그 공덕으로 내가 열반한 지 100년 뒤에는 국왕이 되어 이름을 아수가(阿輸伽)라 할 것이요, 그다음 아이는 대신이 되어 이 염부제의 모든 나라를 함께 맡아 삼보(三寶)를 드러내고 널리 공양을 베풀며, 사리(舍利)를 펴 염부제를 두루하고, 또 나를 위해 8만 4,000개의 탑을 세울 것이다.”

_『현우경』 「아수가시토품」 각색

 

흙이어서 서러운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제 감정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표현을 잘해야 하고, 일어나는 사건이 다 제 잘못인 것처럼 자책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문제구나 하며 이해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하고, 늘 억울한 희생자가 되는 일에서 벗어나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제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그 모든 걸 머리로는 다 알겠어요.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진다는 걸 다 알겠다고요. 근데 그렇게 다 한다고 그게 진짜로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근본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의미도 없는 일에 좋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힘들고 지쳐요. 상담도 지겨워요. 이젠 다 벗어나고만 싶어요. 차라리 죽고 싶어요.”

정적 속에서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가 들려오는 자리는 그동안 상담이라고 오해되어 온 활동이 끝나는 자리며, 가장 깊이 있는 진짜 상담이 시작되는 자리다.

불교와 상담의 공통적인 탐구의 방향성을 들자면, 그것은 ‘흑흑’이라는 의성어가 담고 있는 실제적인 의미가 ‘흙흙’이라는 사실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흙이 두 번이다. 강조되기에 부정이 어렵다. 이웃 종교인 기독교에서도 이는 부정하기 어렵게끔 당차게 선언한다.

“너는 흙이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 이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아, 우리는 정말로 죽는구나.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었구나.’

이것을 실존의식이라고 한다.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전격적으로 눈치챈 순간이다. 흙은 유한성의 직접적인 비유물이다. 어떻게도 부정할 수 없이 인간은 반드시 유한하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따라서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데 그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국가, 이념, 동지, 가족, 친구 등 우리 자신과 동일시했던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물은 전부 그 빛이 퇴색되어 어두워진다. 까만 정적 속에서 다만 새어 나오는 것은 ‘흑흑’이라는 작은 소리일 뿐이다. ‘흙흙’이어서 서러운 그 표현일 뿐이다.

이처럼 ‘흑흑’은 사실 ‘흙흙’의 정직한 자기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작지만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게 작지만 분명하게 듣고 있는 자도 있었다.

 

흙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煩惱卽菩提]

종교성을 죽음에 대한 감수성, 즉 죽음을 실감하고 받아들이는 성질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종교성의 발달은 다양한 차원의 의식 체험들을 많이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죽음에 대한 친화적 감수성의 발달로 이루어진다. 이 말을 달리하면, 우리는 죽음 자체와 죽어가는 운명 속에 놓인 유한자들에게 친절해짐으로써 종교적 깊이를 성취하게 된다는 뜻이다.

죽음과 죽어가는 유한자에게 친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적으로 삼고 있을 때 드러나는 마음의 표현이 바로 번뇌다. 번뇌는 먼지다. 곧 불결하고 사악한 오염물로 간주한 흙이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 자신이 흙이라는 사실을 미워할 때 생겨나는 것이 번뇌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워할 때 일어나는 번뇌다. 번뇌를 미워하는 일은 반드시 유한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일과 같다.

흙인 우리 자신을 흙이기 때문에 미워할 때, 거기에는 답이 없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섬기고 있다면, 더욱 답이 없다. 실제로는 미워하면서도,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미워하지 않는 척까지 해야 하는 까닭이다.

오히려 우리가 죽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인 유한자로서 자신의 면모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실감한다면? 그 모든 양상은 바뀐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유한자인 자신을 미워했는가?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한자의 운명을 적으로 삼고 있는 번뇌는 왜 생겨났는가?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뇌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절절한 마음이다. 남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면, 불쌍해 보이는 이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면, 대의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택하면, 치열하게 사는 열정으로 삶을 감싸면,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살면, 죽음이 자신을 지나칠 것이라 믿으며 발버둥 치던 마음이다. 유한자로서의 자신의 운명이 너무나 미워서 발버둥 치던 마음이다. 흙인 자신이 너무 미워서, 흙이 아니고자 발버둥 치던 마음이다.

이처럼 우리가 해온 그 모든 것은, 죽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던 이 마음의 표현들이었다. 그 발버둥의 세기만큼이나, 자기 죽음을 너무나 실감하기에 결코 죽고 싶지 않아 서러웠던 마음이 분명하게 있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마음이 있었다. 흙이 있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있었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부모나 자식, 연인이나 친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적 약자나 취약계층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가장 가엾은 자다. 부모에게 유기되고, 능력이 없고, 변변찮은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가엾은 자가 아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기에 가장 가엾다. 남들을 불쌍하게 여기면서 자기는 안 죽을 것처럼 사는 동안, 자기 죽음을 가장 빨리 망각하고 소외한 채, 정작 자신은 외로운 변두리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기에 가엾다.

그래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리는 진동이기 때문에 모든 소리는 언제나 고정된 운명을 뒤흔들어 바꾸려는 의도를 갖는다. 이 서러운 운명을 바꾸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흙은 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가장 가엾은 흙임을 알리는 ‘흑흑’의 소리를 내었다. 작지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같이 들었다. 가장 가엾은 흙의 소리를 자신도 분명하게 들었다. 흙이 내는 소리의 발견과 동시에 흙의 소리를 듣던 자도 함께 발견됐다. 

죽고 싶지 않아 마냥 서러운 마음을 듣고 있던 자신이 발견된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지 알려지지도 못한 채 무의미하게 죽어가야 하는 운명을 한스럽게 여기던 바로 그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있던 내가 발견된다. 붓다가 그 마음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내가 여기에 있노라’고 미소짓고 있었다. 

붓다의 전법을 원만하게 하고자 수닷타 장자는 동산을 뒤덮을 만큼의 금으로 사들인 동산에 기원정사를 지어 시주했다. 통도사 팔상탱 녹원전법상 중 포금매지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흙의 의미: 네가 가장 귀하다

흙인 아이가 흙장난하며 놀다 흙을 높게 들었다. 흙으로 쌓인 탑이다. 그리고 붓다는 그 흙보다 머리를 낮추어 흙을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렇게 붓다는 흙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몸소 증명한 자다. 나아가 그 가장 귀한 것을 붓다는 바닥(ground)에 바르도록 하였다. 그렇게 붓다는 흙이 우리의 근간(ground)임을 또한 증명한 자다. 가장 아래에서부터 가장 위까지 흙의 고귀한 의미를 드러내었다. 분명하게 붓다는 흙을 위해 가장 정성을 다하는 자였다.

그런데 흙을 위한 이 정성스러운 몸짓은 사실 아이에게서 시작했다. 흙인 아이가 흙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을 주었다는 것이다. 흙이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게 흙 자신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이것은 보시의 의미다. 보시는 훌륭하고 좋은 잉여자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아무리 미천하고 보잘것없게 생각하더라도, 그러한 자신을 그저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다 내어주는 그 행위 자체가 역으로 자신의 귀함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

작고 보잘것없는 아이는 이렇게 한 것과 같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드려요.”

그리고 붓다는 정확하게 그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알아보고 받아 들은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가장 귀한 것이 맞단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흙이고, 유한한 우리 자신이며, 바로 마음이다. 흙을 받쳐 들고, 유한한 우리 자신을 받쳐 들며, 마음을 받쳐 들었던 자가 바로 붓다다. 그렇게 가장 존귀한 이가 받쳐 든 것을 똑같이 가장 존귀한 것으로 이 세상에 분명하게 알린 자가 바로 붓다다. 흙이 흙을 받쳐 흙을 바친 행위가, 붓다가 붓다를 받쳐 붓다를 바친 행위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받침 없는 받침이고, 곧 바침 없는 바침이다. 스스로 그러한 일이다. 이것이 보시의 의미다. 받침 없이 받치고, 바침 없이 바치며, 바침 없이 받치고, 받침 없이 바친다.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 내어줄 능력이 있는 이가 그 능력으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내어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 미천함을 내어주는 일이다. 반드시 죽게 될 가장 가엾은 자신을 내어주는 바로 그 일이다.

  여기에서 역설이 출현한다.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이는 꽉 잡을 수 있는 이뿐이다. 가장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끝내 가장 죽고 싶은 상태에 도달하듯이, 삶을 가장 꽉 잡으려는 의도가 오히려 그 삶을 해방한다. 삶을 가장 꽉 잡으려는 의도를 우리는 자비라고 부른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흙으로서의 삶이다. 그리고 자비는 그 흙을 위해 살고자 하는 태도다. 흙이란 다 부질없는 것이니 쥐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흩어지게 될 그 흙을 정성껏 꽉 쥐려는 그 몸짓이 바로 자비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가장 사라질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모시는 그 상냥함이 대자대비한 붓다의 미소다.

그렇게 붓다는 가장 사라질 것으로 바친 우리 자신을 가장 귀한 미소로 받치고 있었다. 사라질 것이기에 바침이 없는 바침이었고, 소리 없이 가득 찬 공기와 같은 미소이기에 받침이 없는 받침이었다.

흙이 내던 ‘흑흑’의 받침이 없어지면 ‘흐흐’가 된다. 나아가 더는 바꿀 운명이 아니기에 소리도 없어지며, 모음도 없어진다. ‘ㅎㅎ’만 남는다. 아무도 알지 못할 어떠한 서러움 속에서라도 내가 언제나 알아주며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마음에게 알리고 있는, 그렇게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주위를 가득 메운 붓다의 생생한 숨결이다. ㅎㅎ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