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 관세음보살의 미묘한 모습-관음의 여신화

관세음보살, 남성인가? 여성인가?

2021-09-30     조현설

◎일러두기 : 이 글은 『동아시아고대학』7(동아시아고대학회, 2003)에 게재된 논문 「동아시아 관음보살의 여신적 성격에 관한 시론」을 본 잡지의 편집 방향에 맞춰 필자가 수정·보완했습니다. 

 

『삼국유사』 속 관음의 현신

『삼국유사』 「탑상(塔像)」 편 <삼소관음중생사(三所觀音衆生寺)> 조에 흥미로운 관세음보살 이야기 두 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던 최은함이 중생사 관음보살한테 빌어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두 번째는 견훤의 경주 침략으로 급히 피하다가 관음보살의 가호를 간절히 빌며 아이를 발치에 두고 갔는데 보름 만에 돌아와 보니 살결은 새로 목욕한 듯하고 입에는 젖 냄새가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관음보살이 점지하고 품어 준 아이가 시무 28조로 고려 초기의 정치개혁을 추동한 최승로(崔承老, 927~989)다.

최승로의 일화에 출현한 관음보살은 삼신할미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민간의 오랜 전승 속에서 삼신할미는 아이를 점지해 주고, 태어난 아이의 건강과 수명을 지켜주는 여신이다. 신라말 중생사 관음보살은 삼신할미와 같은 모성을 드러내는 여신으로 형상화됐다. 

『삼국유사』에서 관음보살은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감통(感通)」편에는 광덕과 엄장, 불도를 닦는 도반이 등장한다. 둘 가운데 광덕이 먼저 득도한 뒤 서방정토로 떠난다. 엄장은 광덕이 남긴 시신을 묻어주고, 그의 부인한테 동거를 제안한다. 엄장이 정을 통하려 하자 부인은 광덕의 수행을 이야기해준다. 함께 산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동침하지 않고 밤마다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을 염했다고. 엄장을 깨우쳐 관법(觀法)을 닦아 서방정토로 이끈 여인은 다름 아닌 관음보살의 십구응신(十九應身,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관음보살의 19종 모습) 가운데 하나였다고 전한다. 

관음보살의 감응을 이야기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사들은 한결같이 관음을 여성으로 형상화한다. 그렇다면 관음보살은 여신(女神)인가? 그렇지는 않다. 관음보살의 원형은 남신(男神)이다. 불교 이전의 브라만교에도 관세음은 있었다. 리그베다(Rigveda)에 나오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 심지어 고목에서 꽃이 피게 하고 수소의 젖을 흐르게 하는 쌍둥이 형제신, 때로는 머리에 밝은 별이 달린 쌍둥이 망아지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남신이 관세음의 원형이다. 이 쌍둥이 신이 불교 이후 마두관세음보살(馬頭觀世音菩薩)의 모습으로 불교화된다.

그렇다면 관세음은 남신인가? 적어도 인도에서는 남신이었고, 불교 초전기에도 다르지 않았다. 보살계는 남성만의 깨달음의 세계이고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의 어원(Avalokit ́eshvara)에서 관음은 모두 남성이다. 5세기 인도에서 온 담무참(Dharmakṣema, 曇無讖) 스님이 번역한 『비화경(悲華經)』에 나타나 있는 관세음의 형상*도 남성이다.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삼국유사』의 관음처럼 여성화될 가능성을 품고 있었지만 불교 초기에는 여성화되지 않았다. 관음은 언제, 왜 여신이 됐을까?

(*전륜왕(轉輪王) 무정념(無淨念)에게는 아들 천 명이 있었는데 태자의 이름은 불구(不眗), 즉 관세음보살이고, 둘째 왕자의 이름은 니마(尼摩), 즉 대세지보살이고, 셋째 왕자의 이름은 왕상(王象), 즉 문수보살이고, 여덟째 왕자의 이름은 민도(泯圖), 즉 보현보살이다. 국왕 무정념은 후에 서방 안락세계의 무량수불, 즉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 되고, 관세음과 대세지 형제는 그의 협시보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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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관음, 언제·왜 여신이 됐나?

우리나라 관음의 여신화를 확인하려면 먼저 중국 쪽 사정을 살펴야 한다. 관음은 중국을 경유해 삼국에 수용됐기 때문이다. 

『북제서(北齊書)』의 「서지재전(徐之才傳)」에 특이한 기사가 실려 있다. 천통(天統, 565~569) 4년에 북제 황제 고위의 부친 무성제(武成帝, 561~565) 고담이 본 환영 이야기다. 고담은 주색이 과도해 병에 걸렸는데 이런 말을 한다. 

“처음에는 공중에 오색의 물체가 보였는데 점점 가까워지더니 아름다운 부인으로 변하더군. 여인은 키가 여러 길이나 되었고 꼿꼿하게 서 있었지.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관세음으로 변했다네.” 

당시 의술로는 최고였던 서지재가 “이는 색욕이 과하여 몸이 크게 허한 소치”라면서 처방을 했더니 병이 치유됐다는 이야기다. 왜 고담의 눈에 관음보살이 보였는지 알 수 없지만 관음이 미부인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인도의 스님이 번역한 경전의 관음은 남성이었지만 승려 숫자만 2백만에 이르렀다는 불교의 나라 북제 황제에게 관음은 여인으로 현현했던 셈이다.

환영이라 미심쩍다면 좀 더 분명한 자료도 있다. 『법원주림(法苑珠林)』에는 “제(齊)나라 건원(建元) 원년(479)에 팽자교(彭子喬)가 옥에 갇혔는데 관세음경을 외니 학이 자교 곁에 내려왔다. 다시 깨닫고 보니 어느새 학은 아름다운 부인이 되어 있었고, 자교의 차꼬(죄인의 발목에 채우는 형구)가 저절로 벗겨졌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이야기는 제나라에 관음신앙을 널리 퍼져있었고 관음보살이 민간에서는 여성으로 수용됐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더구나 신선들의 상징인 학이 관세음과 동일시되고 있었다는 데서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앙리 마스페로(1883~1945)의 이른 통찰처럼 불교가 도교를 타고 수용됐고, 관음이 서왕모와 같은 여선(女仙)과 동일시됐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궈웨이[過偉]와 같은 중국학자는 불교가 확산하는 과정에서 여성불교도가 증가하면서 이들의 소망에 따라 관음이 여신화됐다고 주장한다. 그 시기는 대략 5세기 무렵이다.

이를 확실히 방증하는 자료도 있다. 『수서(隋書)』나 『북사(北史)』 등에 따르면, ‘비기(秘記)’를 인용해 수나라 문제(文帝, 541~604)의 독고황후(獨孤皇后)를 묘장왕의 셋째 딸 묘선보살이라고 했다고 한다. 비기가 말하는 묘장왕은 누구이고, 묘선보살은 또 누구인가? 원나라의 문인화가 조맹부(趙孟頫)의 부인 관도승(管道升)이 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10년(1306)에 민간전설을 바탕으로 정리한 「관세음보살전략(觀世音菩薩傳略)」에 그 단서가 있다.

묘장왕(妙庄王)에게는 묘인(妙因)·묘연(妙緣)·묘선(妙善)이라는 세 딸이 있었다. 묘선이 바로 나중에 득도한 관음이다. 세 딸이 모두 시집갈 나이가 되어 묘장왕이 사위를 보려고 하자 큰딸과 둘째 딸은 흔쾌히 대답했지만 묘선은 뜻을 따르지 않고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묘장왕이 크게 노하여 그녀를 궁에서 쫓아낸다. 

후에 묘장왕은 중병을 얻어 목숨이 오늘내일한다. 묘선은 노승으로 변신하여 왕에게 나가 “지친(至親)의 손과 눈이 아니면 고칠 수 없소”라고 전한다. 왕은 두 딸 외에는 지친이 없었으므로 곧 큰딸과 둘째 딸을 희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 눈을 빼고 손을 자르는 일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노승은 다시 향산(香山)의 선장(仙長)이 중생을 제도하니 그에게 구하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향산 선장은 수행자 묘선이었다. 선장은 자신의 손목을 자르고 눈을 빼 묘장왕에게 드린다. 묘장왕은 그것을 먹고 치유되었다. 그러나 손과 눈이 없는 선장을 보자 마음이 아파 하늘과 땅을 향해 손과 눈이 다시 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러자 잠시 후 손과 눈이 새로 나왔다. 아울러 한꺼번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생겨난다. 이분이 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부녀간의 정과 기쁨을 나누었다. 묘선은 부왕에게 불문에 귀의해 덕을 닦고 선을 행하도록 권유했고 묘장왕은 흔쾌히 대답한다.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심청 유형의 설화다. 그런데 아버지의 치유와 귀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막내딸 묘선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기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종의 관음 기원 신화인 셈인데 문제의 황후를 묘선보살로 추숭(追崇)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나라 시기에 중국화된 관음 신화가 형성돼 있었다는 뜻이다. 『비화경』의 ‘전륜왕-태자’의 관계가 ‘묘장왕-공주’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이를 관음보살의 중국화, 또는 여신화라고 부를 수 있다.

수월관음도, 일본 센소지 소장.

 

남성지배사회서 여성 위로해 줄 여신

한국 관세음보살의 사정은 어떤가? 조선 세조 때 제작된 『월인석보(月印釋譜)』 8권의 상절부(詳節部)에 그 단서가 있다. 『안락국태자경(安樂國太子經)』을 번역해 수록한 「원앙부인극락왕생연기(鴛鴦夫人極樂往生緣起)」가 그것이다. 위경(僞經)인 『안락국태자경』의 안락국 이야기는 인기가 좋아 「안락국전」이라는 국문소설이 읽히기도 했고, 무교에 수용돼 제주도 무가 「이공본풀이」로 구연되기도 했다.

범마라국(梵摩羅國)의 임정사(林井寺)의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서천국 사라수대왕을 찻물 긷는 유나(維那)로 부르자 임신한 원앙부인이 따라나선다. 대왕은 도중에 너무 힘들어하는 부인을 죽림국 자현장자 집에 노비로 팔고 떠난다. 자현장자 집에서 태어난 안락국은 학대에 시달리다가 부친을 찾아 임정사로 도망간다. 원앙부인의 왕생게를 매개로 아비를 만나 친자확인을 한 안락국은 어미를 모시러 귀환한다. 그러나 중도에 소 치는 아이들로부터 어머니가 자현장자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안락국은 보리수 밑에 묻힌 모친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낸 뒤 용선(龍船)을 타고 극락에 들어가 부처가 된 부모를 만나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연기설화의 의미심장한 대목은 자현장자에게 갖은 수난을 당하다가 마침내 살해된 원앙부인의 정체가 관세음보살이었다는 사실이다. 남성지배사회에서 종으로 팔려 강간의 위협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의 지경까지 내몰리는 여성들의 형상이 원앙부인에 투사돼 있다. 원앙부인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심정을 알아주고 위로해 줄 여신을 소망한다. 그런 역할을 맡은 여신이 무속에는 적지 않다. 『삼국유사』에 소개된 선도산의 성모여산신이나 무속신화에 등장하는 바리데기나 당금애기 등이 그런 여신들이다. 

그런데 이 여신들이 바로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라고 「원앙부인극락왕생연기」는 말하고 있다. 원나라 「관세음보살전략」에 보이는 여신화와 같은 현상이 비슷한 시기 고려·조선의 원앙부인 이야기에서도 확인되는 셈이다. 신라 최승로나 엄장의 설화에 이미 나타났던 관음 여신화의 기미가 고려말, 조선 초기에 이르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 동아시아 구술문학을 공부하면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다.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 『신화의 언어』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