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 원당願堂에 나투신 백의관음

바닷길 관장하며 민중 보살피는 변산반도 백의관음보살

2021-09-30     송화섭
죽막동 수성당. 개양할머니를 성인으로 모신 사당이다.

서해의 해문, 변산반도

조선 후기 격포리에 수군이 주둔하는 격포진이 있었고, 위도 진리에는 위도진이 있었다. 격포와 위도의 수군 배치는 격포와 위도 사이가 해상교통의 요충지임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실록』은 변산반도와 위도 사이를 서해의 해문(海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격포리 죽막동에는 해변굴과 수성당이 있다. 죽막동은 ‘울창한 대나무숲 마을’이란 뜻의 지명으로, 죽막동 끝머리 돌출지형에 해변굴이 그 옆에 수성당이 조성됐다. 해변굴은 개양할머니 처소인 관음굴이고, 수성당은 개양할머니 사당이다. 수성당 터에서는 백제 시대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 해양제사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죽막동 해양제사유적은 국내 최고의 해양제사터로 평가받고 있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격포가 기항지이자 출항지였음을 알려준다.

『대동지지』에는 위도에서 배를 띄우면 1주일 만에 중국 항주만으로 건너간다고 기술돼 있다. 위도 치도리는 범선(帆船, 돛단배)들이 접안하기 좋은 포구이며, 대리는 범선들이 출항하기 좋은 포구다. 접안지가 무역선이나 어선들이 기항해 배를 대는 항구라면, 출항지는 범선들이 바람을 기다렸다가 계절풍을 이용해 출항하기 좋은 곳이다. 위도에서는 대리 전막 마을의 석금이 출항지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듯 치도리 원당에는 임경업 장군을 당신(堂神)으로 모시고 있으며, 대리 원당에는 원당부인령대신을 당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 원당부인령대신이 여신(女神)으로서 ‘원당마누라’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원당마누라의 도상이 백의관음보살상으로 그려져 있다.

수성당 내 개양할머니도. 개양할머니는 신생아를 품에 안은 송자관음이 투영돼 막내딸을 품에 안고 8명의 딸을 거느린 모습으로 그려졌다.

 

개양할머니와 원당마누라

죽막동 제사유적의 출토 유물은 대체로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의 제사용 토기가 주류를 차지한다. 이 시기는 백제의 동성왕·무령왕대로,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이후 중국 남조와 외교 관계가 활발히 전개되는 시점이었다. 발정(發正) 스님의 『관세음응험기』는 백제와 중국 남조의 해상교류를 보여준다. 534년 중국 양나라로 유학을 떠난 발정은 30년 뒤 귀국하면서 월주(越州) 바닷가의 관음도실(觀音堵室)에 들러 참배했고, 관세음 응험을 겪는다. 발정의 『관세음응험기』에는 구도자에게 밥을 제공하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이 할머니가 죽막동 수성당 개양할머니의 원형일 수 있다. 발정의 귀국 시점과 죽막동에서 출토된 해양제사유물의 연대가 6세기 중엽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개양할머니는 6세기 중엽 백제 시대에 중국 월주에서 건너온 해신할머니일 수 있다. 월주의 관음도실을 오늘날 중국 주산군도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으로 추정해 본다면, 백제 시대에 중국 보타낙가산의 관음신앙이 변산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발정의 『관세음응험기』에서 해신할머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으로 등장한다.

죽막동 주민들은 개양할머니가 하얀 옷[白衣]을 입고 앉아있고, 키가 우뚝하며, 8명의 딸을 거느리고 있다고 증언한다. 개양할머니는 해신할머니이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다. 죽막동과 바다 건너 이웃하는 위도 대리 원당의 주신은 원당마누라로, 부인(婦人) 영신이다. 그런데 실제 원당마누라 당신도는 백의관음보살상으로 그려졌다.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으며 남성상의 곡선미를 보여준다. 관세음보살의 여성화는 중국 당대 이후 이뤄졌다. 원당의 관세음보살상은 백의대사(白衣大士)로서 백제 시대 관세음보살상의 전통을 이어온 것일 수 있다.

육지에서 본 죽막동 관음굴. 개양할머니의 처소.

 

관음신앙의 원형, 보타낙가산 해변굴 신앙

명품에 브랜드가 있듯이, 관음성지의 브랜드는 해변굴이다. 해변굴이 없는 관음성지는 보타낙가산 계통이라 할 수 없다. 현장 법사가 편찬한 『대당서역기』 권 제10 말라이코타국에 말라야산과 포탈라카산(Potalaka)이 있다. 포탈라카산은 남해가 보이는 높은 벼랑의 험준한 산마루와 동굴 같은 골짜기에서 물이 흐른다는 내용이 있다. 남인도 남해의 포탈라카산은 문헌상의 관음성지이지만, 실제 해변굴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관음성지는 중국 주산군도 보타낙가산의 조음동과 범음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해변굴을 갖춘 관음성지는 단 2곳 밖에 없다. 한 곳은 죽막동 수성당 옆 해변굴이며, 다른 한 곳은 양양 낙산사 홍련암 해변굴이다. 죽막동 수성당과 낙산사 홍련암의 해변굴은 자연 지형의 해식동굴이다. 보타낙가산 조음동의 해변굴은 죽막동 해변굴과 흡사하고, 범음동의 해변굴은 낙산사 홍련암 해변굴과 흡사하다. 홍련암과 죽막동은 해조음(海潮音)을 들을 수 있는 해변굴로, 관음성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해조음은 해변굴에서 흐르는 조수 소리를 말하는데, 조수 소리는 곧 수성(水聲)이다. 해조음이 관음이라면, 수성도 관음이다. 죽막동에서 개양할머니를 성인으로 모신 사당이 수성당(水聖堂)이라면, 해조음을 관(觀)할 수 있는 해변굴은 수성당(水聲堂)이다.

양양 낙산사 해변굴에는 홍련암을 건축해서 관음성지를 조성했지만, 죽막동 해변굴은 관음성지 원래 상태가 유지된 천연 관음성지다. 낙산사 창건 당시, 의상 대사가 해변굴에 들어가서 관음 진신을 친견하자, 관세음보살이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했다. 이러한 계시로 홍련암을 조성했지만, 죽막동 해변굴 주변에는 신우대가 관음죽(觀音竹)으로 조성됐고, 소나무가 관음송(觀音松)으로 무성하다. 관음죽과 관음송 속 해변굴이 관음굴(觀音窟)이다.

대나무숲이 얼마나 울창했으면 죽막동(竹幕洞)이라고 했을까. 수월관음도에 삼근자죽(三根紫竹)을 묘사했듯, 대나무는 관음성지의 상징이다. 보타낙가산에 자죽림이 무성하듯, 죽막동에도 해장죽(海藏竹)이 무성해서 관음성지의 경관을 갖추었다. 죽막동에는 해변굴의 원형이 유지되고, 관음죽과 관음송이 함께 어우러져 해변굴관음원(海邊窟觀音院)의 면모를 보여준다. 죽막동에는 관음성지의 원형을 보여주는 해변굴관음원과 원통전 같은 수성당이 신비로움을 더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관음성지라 할 수 있다, 죽막동 수성당은 보타낙가산의 원형을 갖고 있다. 부안 죽막동 해변굴관음원은 남인도 포탈라카산에서 중국 주산군도 보타낙가산을 거쳐서 한반도 죽막동 수성당으로 이어지는 관음성지의 정통성을 품고 있다.

 

남해관음으로 불리는 변산반도 백의관음

국내 최대 규모의 관음성지는 변산반도와 줄포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변산반도와 줄포만은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줄포만은 기항지, 피항지의 해양 환경을 갖추었고, 변산반도는 출항지로서 매우 좋은 해양 환경이었다. 줄포만에는 상선(商船)들이 기항하기 좋은 사진포, 국제교역항인 제안포, 수군들의 병참기지인 검모포가 있었고, 고려 시대 12조창인 안흥창, 자염 산지인 검당포 등이 위치할 만큼 통일신라말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해상교통이 활발했던 곳이다.

줄포만에 관음도량인 고창 선운사와 부안 내소사가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의 후불벽리면 관음보살도, 영산전의 백의관세음보살도, 관음전의 천수천안관음보살도에서 관음도량의 면모를 읽어볼 수 있다. 또한 내소사 관음봉 아래 자리한 대웅보전의 후불벽리면 백의관음보살도는 매우 뛰어난 회화적 가치를 갖고 있다. 줄포만은 서해의 항해 도중 기항과 피항의 해양 환경을 갖추었기에 관음기도도량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변산반도에는 출항지로서 죽막동 수성당과 위도 대리 원당이 위치한다. 죽막동 수성당에는 백의관세음보살의 화신인 개양할머니가 주신이고, 대리 원당은 원당부인령대신이 주신이다. 개양할머니당신도는 하얀 옷을 입은 키가 우뚝한 할머니가 딸 8명을 거느린 모습으로 그려졌고, 원당마누라는 바다에 핀 연꽃에서 연화화생(蓮花化生)한 백의관음보살상이다. 백의관음보살이 해신당의 주신으로 나투신 곳은 위도 대리 원당이 유일하다. 그만큼 대리마을의 원당이 항해 안전의 기도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안 내소사 관음봉 아래 자리한 대웅보전의 후불벽리면 백의관음보살도.

변산반도 백의관음보살은 항해보호신이다. 백의관음보살은 하얀색 법의(法衣)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휘감은 변화관음이다. 백의관음보살의 발원지는 남인도 남해에 있는 포탈라카산이다. 그래서 변산반도 백의관음보살은 남해관음이라고도 부른다. 남해관음은 인도 상인들이 항해보호신으로 신봉했다. 인도 상인들은 말라카해협을 통과해 북태평양에 진출하면서 인도차이나반도 남해, 중국 남해에도 백의관음보살을 등장시켰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백천만 억 중생이 금·은·유리·자거·마노·산호·호박·진주 등의 보물을 구하기 위해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폭풍이 불어 배가 아귀인 나찰들의 나라에 떠내려갈 때,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다면 모두 나찰들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니”라고 하니, 해상들이 남해관음을 항해보호신으로 적극적으로 신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해관음의 특징은 거구의 신체다. 남인도에서 힌두신 비슈누와 결합한 남해관음은 세 발자국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 주산군도 보타낙가산에 출현한다. 남해관음은 우주 삼계를 세 발자국으로 건너뛸 만큼 큰 키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관음보살의 키가 80억 나유타 항하사 유순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큰 수치다. 남해관음은 고려 시대에 수월관음도로도 그려졌다. 수월관음도의 근원은 『화엄경』 「입법계품」이다. 수월관음도에서 선재동자와 비대칭으로 그려진 수월관음은 거구의 남해관음을 묘사한 백의관음보살이다. 거구의 백의관음보살은 중국 주산군도 보타낙가산을 거쳐 개양할머니로 화신해서 변산반도에 출현한다. 바닷물이 겨우 발목을 적실 정도로 키가 큰 개양할머니는 남해관음과 해신할머니의 결합으로, 이름처럼 바다를 열어주는[開洋] 항해보호신이다.

1123년 북송의 사신단이 주산군도 정해현 매잠에서 고려 개경 벽란도를 향해 사단항로를 타고 올라오던 중 고슴도치섬 위도에 중간 기항했다. 그만큼 위도는 서해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 해금·공도 정책(해상세력에 타격을 가하려고 일부러 해안을 황폐화시키고 일체의 해양활동을 금지한 ‘해금정책’과 아예 섬에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한 ‘공도정책’)이 시행된 이후 해양신앙은 위축되기 시작했고, 남해관음신앙은 어촌에서 민간신앙화했다. 대리 원당은 민간신앙화한 원통전이라 할 수 있고, 격포의 수성당은 민간신앙화한 관음전이라 할 수 있다.

 

대리마을 주민에 깃든 백의관음신앙

조선 후기 민간계층에서 거구의 남해관음은 마고할미로 인식되었고, 마고할미는 죽막동 개양할미에 투영돼 깊은 바닷속을 걸어 다니며 표류하는 어선을 구제하고 있다. 중국의 송자낭낭은 아기를 점지하고 출산, 양육을 담당하는 여신이다. 개양할머니는 신생아를 품에 안고 있는 송자관음이 투영돼 막내딸을 품에 안고 8명의 딸을 거느린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개양할머니도에는 마고할미와 송자관음과 벽하원군이 투영됐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 부른다. 위도 대리 원당에는 이마에 별을 단 북두칠성의 칠선녀를 그린 아가씨당신도가 걸려 있다. 송자관음상에는 남아선호의식이 반영돼 있고, 아가씨당신도에는 항해 안전의 길잡이인 북두칠성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위도 대리의 당제는 바닷길을 관장하는 백의관음보살에게 지내는 원당제, 바닷속을 관장하는 용왕에게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 바다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한 수중고혼을 위로하는 띠배보내기의 송액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위도 대리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이튿날 원당제와 용왕굿을 지낸다. 원당에서는 원당마누라(백의관음보살)에게 원당제를 지내고, 대리마을 포구에서는 용왕굿을 거행한다. 용왕제의 마지막 과정으로 띠배에 7개 제웅과 제물을 실어 띠배보내기를 한다. 용왕제는 풍어제인 동시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이다. 이 위령제는 수륙재와 같은 성격으로, 띠뱃놀이가 아니라 경건한 송액(送厄) 의식이다. 

 

사진. 송화섭

 

송화섭
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한국사 교수. 한국역사민속학회장을 역임했고, 「서해안 해신신앙 연구」 「한국과 중국의 할미해신 비교연구」 등 한반도 해양문화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