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

아르코미술관 ‘정재철:사랑과 평화’ 리뷰

2021-09-29     마인드디자인(김해다)
아르코미술관 <정재철: 사랑과 평화> 전시 중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 전시 전경.

지난 7월부터 8월까지, 동숭동에 있는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정재철 작가의 유고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가 열렸다. 한때 목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90년대 후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예술가들에게 입주할 공간을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거치며 세계를 뒤덮은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사는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 그리고 사물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작고 직전까지 약 20년간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몸을 매체로 작업했다.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었던 그. 예술로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줄 방법을 찾으려 했던 한 유랑 작가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았다.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카슈가르(중국), 사진, 2005.

길을 종이 삼고 몸을 붓 삼아

정재철 작가의 대표적 작품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는 근대 이전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교역 경로였던 실크로드를 따라 국가 간 경계를 넘으며 소비문화의 상징인 폐현수막을 나누어주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우연한 만남, 교류, 사건과 상황을 만들고 기록한 작업이다. 전시장은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각종 기록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오브제, 사진, 영상, 텍스트 기록물이 흩뿌려진 전시실에서 작가의 경험을 온전히 전달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본질은 몇 년에 걸쳐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 작가와 각 지역 사람들의 경험과 순간들 그 자체이지 않은가. 관람자가 그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순간에 자신만의 메시지를 생성해내는 것이야말로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전시장의 모호함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는 시간과 일상에 대한 작가의 태도,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한 예술가의 방식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여행했다.

 

정재철, 1차 실크로드 프로젝트-루트맵 드로잉 1, 2006, 
장지에 연필, 채색, 248×483cm. 부분 이미지.

걷기, 한 걸음 한 걸음 충실하게

여행자가 되어 길을 나서는 일은 그에게 예술적 실천이자 태도이며 방식이었다. 크고 무겁고 견고한 마스터피스가 아니라 먼 길 떠나는 여행자들도 충분히 지고 다닐 수 있을 법한 작은 오브제들과 노트, (현수막) 천, 영상 기록물들로 채워진 소박한 전시장에서, 일상의 순간순간을 정성으로 대했을 작가의 마음을 느꼈다. 어느 한 시점에 한 장소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는 기록들, 날짜와 지출 내역, 프로젝트 일정 등과 더불어 자신이 보낸 시간을 꼼꼼히 손수 글로 남겨 놓은 작가의 노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는 썼다. 여행이란 “현재를 (특별한) 새로운 과거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게임”이라고. 그리고 그 게임의 룰은 일상의 생경함을 제거하고 다만 분별하려는 습에 맞서 오직 “충실하게 다음 발걸음을 떼놓는 것”이라고. 

“영원한 것은 없다. 돌로 잘 만든 견고한 성채도 시간 앞에선 기울고 사람도 소도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은 시간의 궤적을 담고 흘러간다. 변화하고 있는 것만이 있었다. 변화하고 있는 공간에 시간이 꽉 차 있다. 어쩌면 시간과 공간이 나눠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것은 하나였을 것이다. 변화하는 공간 속에 시간이 담겨있고, 시간 속에 공간이 담겨있다. 서로 충만한 상태로-. 그리고 그것이 변화하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찰나조차도, 그 찰나에 충만한 공간조차도.”

- 2003년 1월 22일 故 정재철 작가노트 중

정재철 작가 노트 발췌 모음집 <사유의 조각들> (연구·편집: 이아영) 발췌

 

아르코미술관 <정재철: 사랑과 평화> 전시 중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 전시 전경.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

그의 작업의 근간에는 생태적 위기와 연대의 실종 등 환경적, 정치적 위기 상황에 대한 의제가 놓여 있다. 잠깐 쓰이고 버려지는 일회성 현수막에는 환경오염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해안가에 밀려온 수많은 해양 쓰레기들에 대한 리서치 기반 프로젝트인 <블루오션 프로젝트>(2013-2020)는 국가 간 경계를 넘어 인류의 공유지로서 바다라는 환경 자원에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다. 주목할 점은 흔히 현실과는 별개로 작동한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현실의 영역으로 초대하는 그의 방식이다.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폐현수막으로 공동의 그늘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던 수많은 사람에게 폐현수막은 크고 작은 울림이 되어 셀 수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으리라. 해안가 쓰레기를 “해양부유사물”이라 부르며 수집하거나 지역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워크숍을 운영했던 <블루오션 프로젝트> 역시 공동체 내에서 미술 언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실천이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에게 예술은 더 이상 완결된 형태로 흰 벽에 걸려 감상 ‘당하거나’ 보존 ‘당하기를’ 기대하는 사물이 아니었다. 아주 구체적인 삶의 장 안에 침투했다가 곧 증발해버리기를 자처하는 하나의 이야기일 뿐. 작고 소소하게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시작해,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다양한 범위로의 확장을 상상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그가 그렸던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는 이런 모습이었다. 

정재철, 3차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0,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33분 43초.

 

사진. 아르코미술관 제공

 

이달의 볼 만한 전시

 

감각의 숲

우양미술관 | 경주
2021.07.16~2021.10.31 | 054)745-7075 
www.wooyangmuseum.org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인간을 존재론적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위치시키고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거나 재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보다 연기론적으로, 생태적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예술가 7팀이 이야기하는 자연을 함께 만나보자.

 

친애하는 빅 브라더: 다시는 결코 혼자일 수 없음에 대하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
2021.08.13~2021.11.14 | 1899-5566 
www.acc.go.kr

광주 지역과 아시아를 근간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코로나19와 병존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사회 공익과 개인 존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시는 결코 혼자일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제공하는 전시.

 

윤석남: 내가 되는 그림

동탄아트스페이스 | 화성
2021.09.01~2021.10.13 | 031)290-4637 
www.hcf.or.kr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초석을 다지고 그 길을 개척해온 윤석남 작가의 전시. 여성의 몸으로 살아가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창작을 통해 자유를 찾아가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규명해 온 그의 초기작부터 미공개 신작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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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디자인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붓다아트페스티벌을 9년째 기획·운영 중이다. 명상플랫폼 ‘마인드그라운드’를 비롯해 전통사찰브랜딩, 디자인·상품개발, 전통미술공예품 유통플랫폼 등 다양한 통로로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문화콘텐츠 발굴 및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