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산천 내 사랑아"

이남덕 칼럼, 추석맞이 TV화면을 보면서

2007-09-17     관리자

올 가을은 참으로 날씨가 좋다. 껴잡아, 고향 산천을 찾는 귀성객의 수가 '민족대이동'이라 고 할 만큼 2천만 명이 넘었다니 이게 대체 무슨 경사인가? 그들이 부모형제 일가친척을 만 나 선산에 성묘하고 함께 애환을 같이한 이웃과 친지들을 만나 반가워 할 일을 생각하니 상 상만 해도 흐뭇한 심정이다.
추석(秋夕)이란 것은 한자어이고 우리의 오래된 말로는 '한   l'가 '한  l>한가위'로 발 달한 것이니 세종대왕께서 한글(正音) 만드시기 전의 기록으로는 '嘉俳'라고 기록된 것이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기(新羅記)에 보인다.
왜 8월 15일을 '한가위'라 했을까. 한가위란 두 낱말 '한'과 '가위'의 합성이다. '한'은 '크다 '는 뜻으로 '*한아버지>할아버지, *한어머니>할머니'나 '한밭(大田의 古地名)'같은 낱말에 남아 있다.
뒤에 따르는 '-가위'는 '가운데'와 같은 어원을 가지는 말로  -'> 갑-(kap-)'이 그 어근 (語根)형이다'
 ->갑-' 어근의 뜻은 지금 우리가 쓰는 '가르다(分)'와 같은 뜻으로 명사로도 쓰이는 예가 제주도 방언에 ' 가르다'는 말이 심방(무당)들 말에 나오는데 '경계선을 가르다, 중간(가운 데)을 가르다.'의 뜻이니 15일(보름)은 한 달 중 중간 경계선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가위'란 말은 '큰 보름날~대보름'의 뜻이 이로써 분명하니 일 년 중 보름날은 열 두 번 있지만, 정월 과 팔월 두 달의 보름날은 '정월대보름' 그리고 팔월은 옛날 말 그대로 '한가위'라 하니 이 름은 다르나 그 뜻은 '큰 보름날'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했으면..."하고 덕담으로 일컬어왔듯이 기후도 너 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니 심신이 편안하고 맑기가 저 푸른 하늘과 같고, 산에는 나무 열매, 들에는 옥곡이 풍성하니 가난한 살림살이 수심이 싹 걷히는 것같이 느꼈을 것이다.
추석연휴 며칠 전부터 TV화면은 한가위 놀이 프로그램을 예고하고 축하분위기를 돋우더니 정말 연휴중에 흥겹고 경사스러운 장면을 만끽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 경사 중에도 북한의 잠수함이 무장간첩 몇십 명을 태우고 오다가 동해안 암초에 좌초되어 산으로 달아나 그들을 추격하여 사살도 했으나 일부는 도주하여, 도주한 잔병들을 추격 중이라는 뉴스가 시간시간 자막으로 또는 뉴스로 방영되었다.
그것도 공교롭게 한참 흥겨운 추석놀이 한마당이 펼쳐진 장면 장면에 중간 긴급 뉴스로 보 도되어 우리의 명암쌍곡선의 현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참으로 마음이 착잡하다.
모두들 명절맞이로 즐겁고 흥겨운 이 마당에 군경들은 이들 추격전에 6만 명이 동원되었고 수색 중 교전으로 목숨을 잃은 우리 쪽 장병도 4명이니 참으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는 마음아픔을 느낀다.
남북이 길 막힌 지 50년이 넘어, 한가위 명절이면 고향 찾아 '민족대이동'을 하고 있는 이 마당에 한 민족. 한 핏줄의 정이 이북을 고향으로 하는 실향민들 가슴에 얼마나 아픔을 줄 까. 그런데 무장간첩 남파소동이다.
중국사람들은 거기도 대륙과 대만으로 둘이 갈라져서 이산가족끼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었 는데 지난 87년 11월부터 고향을 찾는 대만의 '탐친(探親-친척 탐방)' 제 1진의 고향방문이 성사되면서 간단한 통행증만 가지면 서로 사이의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니 우리보다는 얼 마나 다행한가. 이 탐친 방문의 광경을 추석특집으로 TV화면에서 보면서 나는 부러움을 금 할 수가 없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큰아들, 가장이 장개석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본국 에 남은 그들은 '반동분자'의 가족으로 갖은 학대 속에 아들은 교육도 못 받고 아내는 병 끝에 세상을 떴다. 고생에 찌든 50세 된 큰아들이 그 아버지를 찾아 대만에 온 것이다. 아버 지는 그 동안 여기서 새 부인을 맞아 자녀들을 낳아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고향에 두 고 온 가족들을 못 잊어 했을 것 같은 그런 인품이다. 그도 이미 병(심장병)들어 방문 온 큰 아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공원에 구경나갔다가 몸이 쓰러질 듯해서 병원으로 가고, 뒤에 남 은 큰아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계모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
아버지와 온 가족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어도 지나온 세월이 회상되는지 며칠 동안을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더니 이제 서로의 따뜻한 마음이 통한 것이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나 큰아들, 그리고 새 어머니와 그리고 그가 낳은 이복형제들이 어떻게 인품이 자연스럽고 후 덕한지 그 마음씨가 전달되는 것이 너무나 감동스러웠다.
그보다도 남의 얘기 아닌 우리의 얘기를 해야겠다. 재일교포인 전월선(田月仙)이라는 여가수 의 '고려산천 내사랑'이란 실화 기록화면이다.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는 노광욱(盧光郁)씨인 데 청년시절에 치과 전공을 했으나 음악을 대단히 사랑했고 6.25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치과의사를 하는 분이라 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고향산천 내 사랑아

남이나 북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던가
동아나 서이나 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그리운 자매들 아니던가
(후렴)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 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이 노래를 그렇게도 뜨겁게 감동적으로 부르는 전월선이라는 가수는 누구인가? 나는 음악에 대해서 소식이 깜깜해 몰랐으나 그녀는 한국말도 잘 못하는 재일교포 출신의 가수인데 타고 난 천분으로 가창력을 물론 '카르멘' 주역을 할 때에는 플라멩코 춤을 기막히게 잘 추는 무 용적 재능도 뛰어나고 연기력도 압도적인 오페라 가수라고 한다.
그녀가 어떤 인연으로 위에 든 '고려 산천 내 사랑아'를 부르고부터 그 노래에 사로잡힌 사 람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어려서는 조총련계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이북에 초청되어 노래 부 른 적도 있는데 얼마 전 한국공연을 했을 때는 '전향(轉向)'가수처럼 보도되어 씁쓰름했다 는 고백도 화면에서 보았다.
지금 우리들은 정치적인 색안경을 안 가지고는 사물을 보지 못하는 병에 걸린 것 같다. 고 려(한반도) 산천은 남도 없고 북도 없는 것을- 그녀에게 오직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만이 있 을 뿐이다. 그녀가 열고 있는 음악학원에서 중년이 된 사람들이 열심히 '고려 강산 내 사랑 아'를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미국교포들 앞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때 그 열창에 호응하는 재미동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아아 순수한 통일운동은 진짜 재일. 재미 등 해외동포들에 의해서 그 횃불이 올려지 는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작 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정치병에 아직도 시달 리고 있는데 말이다.
이 노래의 작사.작곡자 노광욱 씨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위의 TV방송이 있은 뒤에 나는 이화대학 때의 친구 교수인 이효재(李效再)선생에게 왜 그런지 이 감동을 나누고 싶어 전화 를 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노광욱 씨가 바로 자기 동생의 남편, 그 워싱톤 D.C에서 치과 의사 한다던 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6.25 전쟁 중 좌익단체인 음악가 동맹에 속했다가 9.28에 좌익이 북으로 패퇴할 때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본래 가지고 있던 치과의 기술을 가지고 미군을 따라 도미하게 되어 그의 말 로 '나는 여기도 반역자, 저기도 반역자, 반역자의 일생을 살아야 했다.'는 가슴 아픈 술회를 하는 것이 화면에 보였다.
아아,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이 좌.우 어느 편에도 편가름에 들지 않고 그 오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의 조국. 이 조국분단의 아픔이 깨끗이 가시지 않는 한, 아무리 풍성한 한가위를 맞이해도 완전한 행 복을 누릴 수 없음을 이 가을에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아아 아름다운 고려 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