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우리 얼굴로 다시 태어난 나한

미켈란젤로도 만들지 못한 3등신의 미소 창령사 터 오백나한의 미학적 요소들

2021-08-30     이진경
가사 덮어쓴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가사 덮어쓴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크기의 미학

경쟁하고 비교하는 것이 생명체의 운명이라서일까? 우리는 평범한 것을 배경 삼아 탁월한 것을 부각하고 그것을 삶의 모델로 삼는 일이 많다. 작고 미소한 것에 대해선 눈도 주지 않지만 크고 거대한 것은 ‘위대하다’며 경의를 표한다. 거대한 바위, 거대한 산, 거대한 폭포, 거대한 계곡…. 서양 미학의 중심 범주 중 하나인 ‘숭고’는 칸트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수학적 크기 또는 물리적인 힘의 크기로 발생하는 미적 현상이다. 거대한 것은 그 앞에 선 자신의 크기를 작고 미미하게 만들지만, 그렇기에 거꾸로 그 거대한 것에 자신을 ‘고양’해 그 거대한 힘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위대함을 추앙하는 세계에선 예술가들 역시 거대함을 위대함으로 색칠하는 숭고의 미학에 쉽게 숟가락을 얹는다. 서양만 그런 것도 아니다. 동양의 불상들에서도 부처의 위대함에 거대한 크기를 부여하려는 욕망은 빈번히 발견된다. 가령 일본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나, 카마쿠라 고도쿠인(高德院)에 있는 대불상은 그 욕망이 나름 멋진 형상을 산출한 경우라 할 것이다. 법주사의 거대한 불상은 크기에 대한 욕망이 철근 콘크리트에서 이상적 재료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압도적인 힘을 내세우는 종교와 이념은 사람도 삶도 그 힘에 복속시키며, 숭고의 감정이 제공하는 ‘고양’이란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채서였을까? 창령사의 나한들은 크지 않으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하지도 않는다. 나한이란 분명 더 배울 것도 없고 더 닦을 것도 없는 최고 경지에 오른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들이다. 최고의 경지란 중생보다 훨씬 탁월하고 위대한 크기의 힘을 지녔다는 의미다. 하지만 창령사의 나한은 이에 기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우리 자신의 힘과 크기에 대해 스스로 믿도록 하려는 양, 아주 작은 크기의 돌 속에 자리 잡는다. 

거대한 크기는 일상과 분리된 세계를 일상 속에 가시화하려는 욕망과 연결된다. 소소하고 평범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확연하게 구별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크기의 차이에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크기의 불상은 중생과 다른 성스러운 얼굴과 균형감 있고 빈틈없는 정연한 자세가 상응한다. 이와 반대로 ‘만만하고’ 평범한 크기의 소박한 창령사 나한상은 일상적인 얼굴과 빈틈 있는 자세가 짝을 이룬다. 어떻게 보아도 성스러운 분위기는 없으며, 과도하다 싶을 만큼 익숙하고 친근한 형상이어서, 유별난 성인(聖人)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근의 평범한 이웃들 같다. 그런 방식으로 피안 아닌 차안, 중생들 사는 세간 속에서 남들 편안하게 해주는 게 나한임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 저분들이 나한이듯 우리 자신 또한 본래 부처라지? 그렇게 자신의 부처됨을 믿고 부처처럼 산다면, 애써 깨달을 것도 없이 부처로서 사는 것이라지?’라고 믿도록 말이다. 

물론 가르침의 중심에 나한 개념이 있던 초기불교와 중생 자신이 모두 본래부처라고 가르치던 대승불교가 같지 않음을 지적하며, 이런 해석을 비판하는 분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나한이란 대체로 석가모니와 초기불교의 거처인 인도 출신이기에, 이토록 한국인을 닮은 나한이란 애초부터 잘못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비판하는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타지역에서 살았던 이국적인 나한들조차 자신들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나한을 자신들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키는 것, 이는 오해나 무지의 증거가 아니라 완전히 숙성시켜 자기화한 징표이다. 흑인의 몸과 얼굴을 하고 색소폰을 손에 든 불상을 보게 된다면, 그때는 흑인들의 세계에 불교가 깊이 스며들어 그들의 삶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승려형 나한상들, 국립춘천박물관.

 

우정의 미학

이젠 우리마저 익숙해진 서양식 미감에 따르면, 최고의 조각상이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처럼 돌이란 재료를 지워 잊게 만드는 작품이다. 치맛자락은 계속 흘러내리는 듯하고, 팔이나 머리는 움직일 듯하며, 피부마저 처진 듯 보이는 상들. 서양 철학이 형상이야말로 본질이라며 질료를 형상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창령사의 나한상은 반대로 ‘이것은 돌이요!’라고 주장하려는 듯, 돌의 물성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사람의 윤곽선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신 둥그런 돌의 윤곽선 안에 인물을 집어넣고, 돌에 있는 주름과 뒤섞으려는 듯 얼굴이나 신체를 표현하는 선들도 최소화하여 감추듯 드러낸다. 형상이 사라져 돌만 남게 되기 직전의 순간이 이럴 것이다. 혹은 반대로 돌로부터 형상이 슬그머니 드러나기 시작한 순간이라 해도 좋다. 마치 돌이 나한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듯. 나한의 모습은 사실 돌에 들어앉는 돌의 모습 그 자체이기라도 한 듯. 나한이란 돌 속에 숨은 불성의 표현이라는 듯. 여기서 돌은 형상의 노예가 아니라 형상의 주인이다. 아니, 형상의 친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원래 주인도 노예도 없는 것이니. 질료는 형상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몸을 빌려주는 친구이고, 형상은 돌이라는 질료 속에 숨은 힘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손을 빌려주는 친구인 셈이다. 

사실 ‘서양’이란 말은 너무 광범위한 말이어서, 서양인 모두가 형상의 일방적 숭배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러시아의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인 타틀린처럼 ‘형상의 지배에 대한 질료의 봉기’를 꿈꾸었던 이도 있었지만, 그보다 오래전, 질료를 잊게 만드는 탁월한 형상을 조각했던 미켈란젤로 또한 형상의 일방적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노예> 연작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에서 그는 돌이란 재료를 확실하게 가시화한다. 이를 위해 완성과 완결의 등식을 깨고 완결되지 않은 완성품을 만든다. 마지막 유작인 <론다니니 피에타> 또한 그렇다. 미완의 형상 사이, 그것들의 틈새를 최대한 확장해 형상 때문에 지워지지 않은 질료를 드러낸다. 

반면 창령사의 나한상들은 형상의 빈틈을 만들어 그 틈새를 최대한 확장해 질료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물론 미미하고 ‘어설픈’ 선들은 몸의 형상이 미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명료하고 뚜렷한 것’을 추구하던 형상의 미학에서 벗어난다면, 오히려 이는 형상의 관념을 달리하는 미감의 소산이라 할 만하다. 이 나한상들은 완결에의 강박도 없지만 그렇다고 애써 완결을 중단하여 최대한 형상의 빈틈을 만들어 그 틈새로 질료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강도란 크기를 표시하는 말이지만, 크기가 크다고 강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탁월한 가수는 크고 높은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이 아니라, 작고 큰 소리의 미묘한 변화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피아니시모(악보에서 매우 여리게 연주하라는 말)의 매력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면 큰 소리로 귀를 시끄럽게 할 뿐이다. 붉은 감으로 가득 찬 감나무 이상으로 마른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은 붉은 감이 훨씬 강하게 우리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확고한 선이 아니라 미미한 선, 뚜렷한 선이 아니라 모호한 선, 깊이 패인 굴곡보다는 면에서 멀지 않은 스치듯 얇게 그려진 선의 매력. 이는 명료하고 뚜렷한 선이나 면과 달리 형상의 그늘로 질료를 가리지 않는다. 형상 옆에 나란히 질료를 드러낸다. 형상과 질료의 우정을 드러낸다. 

승려형 나한상들, 국립춘천박물관.

 

익살의 미학

나한상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익살과 웃음이다. 나한상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꼽는 게 나한상들의 웃음이다. 수많은 나한상이 웃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은 껄껄대는 호탕한 소리가 들릴 듯한 포대화상의 큰 웃음이 아니라, 여러 색조가 섞인 작고 소리 없는 웃음이다. 달마도에서 자주 보게 되는 코믹함의 감응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다 마주친 들꽃에서 얻게 되는 기쁨의 감응이다. 거친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삶의 능력을 조금씩 늘려가는, 어떤 과장도 없는 기쁨의 감응이다. 세파에 시달린 듯, 시간에 쓸려간 듯 얼굴은 이웃집 할머니나 할아버지 같은데도 웃음은 한결같이 어린애 같다. 삶이 그저 즐거운 어린아이의 무구한 웃음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삶, 한다는 생각 없이 행하는 신체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도를 깨친 이의 삶이란 이처럼 무구한 웃음을 짓는 삶일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넘어선 삶.

물론 모든 나한상이 웃고 있지는 않다. 입이나 눈이 웃지 않는 나한상도 적지 않다. 그래, 아무리 나한상이라 해도 어떻게 모두 웃고 있을 수만 있을까. 그런데 입도 눈도 웃고 있지 않은 나한상들에서도 우리는 웃음이 배어 나옴을 느낀다. 몸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웃는다고 했지만, 거조사(암)의 나한상처럼 웃음을 주는 포즈나 동작을 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다들 웃고 있다고 느껴진다. 심지어 위로 볼록한 선을 그리는 입과 내리까는 듯한 눈을 가진 나한상조차 웃고 있는 듯하다. 몸의 형태가 웃음을 주고, 몸에 새겨진 선들이 웃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조각들은 전혀 웃지 않는 표정도 웃는 것처럼 보인다. 웃는 표정이 아닌데도 익살스러운 것은 무엇보다 ‘웃기는 비례’ 때문이다. 머리가 3분의 1이고, 불룩 나온 배와 구부정한 다리가 나머지 3분의 1을 각각 차지하는 조각상은 그 자체만으로 웃음을 주기에 충분하다. 창령사 나한상의 신체 비례도 이와 유사하게 대부분 3등신이다. 나한상이 아프리카 조각과 다른 것은 대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모습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한상의 커다랗고 분명한 머리와 작고 모호하게 뭉뚱그려 놓은 나머지 신체의 불균형은 익살스러운 양감과 리듬을 준다. 작고 간단한 신체와 거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머리는 깔깔대는 웃음이 아니라 작은 미소를 준다. 작은 크기와 어울리는, 미소만큼 편하게 해주는 ‘친근한 비례’다. 

나한상의 익살은 신체의 형상을 만드는 선들에서도 배어 나온다. 선들이 웃고 있다. 카마쿠라의 대불처럼 선명하고 팽팽하고 엄격하고 단정한 선은 부드러운 윤곽선을 가진 상들마저 묵직한 진지함으로 둘러싼다. 높고 위대한 것을 향한 숭고의 감정은 조각상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보는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몰아낸다. 반면 구불구불하고 삐뚤빼뚤한 선, 새겨지다 만 듯 모호한 선은 익살스러운 신체를 빚고,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자아낸다.

두건 쓴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두건 쓴 나한상, 국립춘천박물관.

 

시간의 미학

시간은 물 같아서 자신이 스치고 지나간 모든 것을 자갈처럼 둥글게 만든다. 모서리나 튀어나온 것은 모두 그 헤아릴 수 없는 옷깃의 스침으로 살그머니 마모되며 부드러워진다. 사람의 신체와 얼굴도 그렇다. 알처럼 둥글게 오그라든 채 태어나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손발을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펼쳐지던 신체와 얼굴은 이내 시간의 옷깃에 쓸리며 닳아 둥근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물과 다른 것은 신체의 바깥만이 아니라 그 안쪽도 둥글게 마모시킨다는 점이다. 신체 안에 숨은 영혼을 둥글고 원만하게 만든다. 그것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남들을 재던 아상(我相)이 마모되며 얻어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서양의 형이상학은 모든 것을 죽음이나 소멸로 귀착시킬 무상한 변화와 싸우며, 변화가 사라지고 시간이 멈춘 불변의 영원성을 세우고 싶어 했다. 현실 속에선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을 위해 그들은 현실 저편의 세계를 상상했고, 그것을 현실의 모델로 삼아 철학적 위안을 얻고자 했다. 그 욕망은 시간에 마모되어 사라지는 둥글둥글한 원만함이 아니라 시간에 맞서 날을 세우고 스러지지 않을 형상의 영원성을 최대한 선명하게 세우는 감각을 낳았다. ‘명료함과 뚜렷함’에 대한 선호는 단지 데카르트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철학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창령사의 나한상들은 시간의 흐름에 닳고 닳은 신체를 갖고 있다. 쓰개치마(머리와 몸 윗부분을 가리어 쓰던 치마) 같은 망토를 뒤집어쓴 상은 망토 안의 얼굴 이상으로 몸 전체가 둥글다. 이마와 볼의 주름이 아래로 약간 굽으며 흘러내려, 눈과 입의 ‘곧은 선’이 웃는 건지 인상을 쓴 건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상마저 둥근 얼굴, 둥근 손, 둥근 신체가 감싸고 있다. 과일인지 구슬인지 두 손에 든 둥글둥글한 물체가 얼굴의 둥글둥글한 형상과 공명하며 신체를 둥글게 보이게 하는 나한도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신체란 보통 안정적인 삼각형으로 ‘요약’되게 마련인데, 여기 나한상들은 대부분 길쭉한 원처럼 둥근 형상으로 ‘요약’된다. 원이라 하지만 컴퍼스를 대고 빙 돌려 얻은 곡선이 아니라 그저 둥근, 타원처럼 길쭉하고 찌그러져 있으며 울퉁불퉁한 곡선이다. 몸이 그렇게 둥글둥글하니, 그 몸에 깃든 영(靈) 또한 그처럼 둥글둥글할 것이다. 시간의 신과 맞선 선명함의 미학이 아니라 시간의 신과 손잡은 원만함의 미학이 여기에 있다.  

 

사진. 국립춘천박물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식 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연구 활동 중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근대성에 천착해 『철학과 굴뚝 청소부』를 썼고 『삶을 위한 철학수업』, 『불교를 철학하다』, 『철학의 모험』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