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진묵의 설화 속으로

주장자로 야단도 맞고 민중의 소원도 듣고

2021-08-30     김기종
진묵 대사의 설화 속 나한은 진묵을 부처의 화신으로 만드는 문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진묵이 수도했다는 운문암은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이 한 철쯤 공부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 일러두기 : 이 글에 사용한 진묵 대사 관련 나한 설화는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가 펴낸 『한국불교전서』에서 인용했습니다. 

 

진묵(震黙, 1562~1633)은 한국불교사에서 조금은 특이한 인물에 속한다. 그는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사서(史書)·문집 등 동시대의 어떠한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진묵의 설화는 전북 김제·완주·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신흥 종교인 증산교·원불교의 경전에서는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진묵의 삶은 그가 죽은 지 200여 년 후인 1857년(철종 8)에 간행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이하 『유적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주의 유학자였던 김기종의 요청으로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이 편찬한 것이다. 『유적고』에 수록된 17편의 진묵 관련 일화는 김기종이 마을의 노인이나 스님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야기들을 초의 스님에게 구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유적고』는 스님의 문집 및 고승전기와 다른, 19세기 당시 전주를 중심으로 구전되던 설화들을 한문으로 기록한 문헌설화집임을 알 수 있다. 

 

진묵을 부처의 화신으로 만드는 장치 

『유적고』의 설화들에는 진묵 외에도 신장(神將)·금강역사(金剛力士)·나한 등의 불교적 인물과, 유학자·계집종·사냥꾼·소년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적고』는 이들 인물과 진묵의 관계 맺음을 통해 진묵이 부처의 화신(化身)임을 보여준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시 민중들은 진묵을 ‘부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나한 관련 설화 역시 부처의 화신으로서 진묵 형상화와 관련이 있다. 

진묵 관련 설화 중 나한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세 편으로, 편마다 등장인물이 달라지는 『유적고』에서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그만큼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1) 맑은 밤이면 언제나 한 점 별빛이 멀리 동쪽 들 끝에서 반짝반짝 빛나곤 하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더니, 그것은 전주 청량산(淸凉山) 목부암(木鳧庵)에 있는 불등(佛燈)의 불빛이었다. 대사는 곧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목부암의 이름을 원등암(遠燈庵)으로 고쳤다. 그 땅은 본래 나한도량으로서, 16존자는 늘 대사를 시봉(侍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나한들은 그 등불 빛을 멀리 월명암까지 비추어서 대사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던 것이다.

(2) 전주에 한 아전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대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관청의 재물 수백 냥을 사사로이 써서 빚을 지고는 도망가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러 대사를 찾아왔다. 대사가 말하였다. “관청의 재물을 빚지고 도망가는 것이 어디 사내가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집에 돌아가 쌀 몇 말을 가지고 여기로 오너라. 저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반드시 좋은 방도가 생길 것이다.” 

아전은 돌아가 대사가 시킨 대로 쌀을 가지고 왔다. 대사는 시자(侍者)에게 밥을 지어 나한들에게 공양 올리게 시킨 뒤, 아전에게 물었다. “관청에 혹 빈자리가 있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감옥의 형리(刑吏) 자리가 잠시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봉급이 매우 적고, 또 일거리도 없는 자리입니다.” 대사는 말하였다. “일거리가 없는 자리라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가서 그 자리에 자청해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아전이 떠난 뒤에 대사는 주장자를 들고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나한들의 머리를 차례로 세 번씩 쓰다듬고는 말하였다. “저 아전의 일을 잘 도와줘라.” 이튿날 밤에 나한들이 아전의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너는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말할 것이지, 어쩌자고 대사님께 알려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를 봐서는 도와주고 싶지 않지만, 대사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아전은 뭔가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자청해서 감옥의 형리가 되었다. 그러자 옥송(獄訟, 형사상의 송사)이 계속 일어나서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였으므로, 한 달 안에 빚졌던 재물을 다 갚고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안 돼 새로 온 아전은 뇌물을 먹은 죄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인용문 (1)과 (2)는 『유적고』 제6화(話)와 제7화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위의 (1)은 진묵을 가까이 모시고 싶어 하는 16나한의 모습을, (2)는 진묵의 명령으로 전주의 아전을 도와주는 나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2)의 ‘나한도량’과 ‘나한당’은 19세기 당시 전주지역에 나한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들 설화의 ‘나한’은 진묵이 부처의 화신임을 나타내는 문학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나한의 공경을 받고, 그들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부처뿐이기 때문이다. 『유적고』에는 나한뿐만 아니라, 진묵을 공경하거나 그의 명령을 받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일화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진묵이 전주의 봉서사에서 향을 받드는 소임을 맡을 때 이야기로, 신중단(神衆壇)의 신장이 주지의 꿈에 나타나 향 받드는 사미를 바꾸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그 이유로, 부처를 호위하는 신중들이 도리어 부처의 예배를 받을 수 없다는 신장의 발화가 제시되어 있다. 또 제3화에서 산신령은 진묵의 명령으로 어머니를 괴롭히는 모기떼를 마을에서 쫓아버리고, 제4화에서는 진묵에게 술을 주지 않은 스님을 금강역사가 철퇴로 내려치고 있다. 

해발 500m에 있는 운문암 앞 풍경은 절경이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는 앞으로 무등산과 조계산, 모후산 등 호남의 명산들이 도열해 있다며 풍수적으로 여러 신하들이 운문암을 향해 인사하는 형국이라고 평했다. 진묵 대사는 물론 소요태능 선사, 용성 선사가 운문암과 인연이 있다. 
여러 신통력의 기록이 남은 진묵 대사는 천하를 유람했다. 변산 월명암은 조선 때 진묵이 중창해 17년 동안 머물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고 한다. 태고사, 운문암과 함께 호남의 3대 영지로 손꼽힌다.

그런데 『유적고』에서 나타나는 부처로서 진묵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처님’과는 거리가 있다. 인용문 (2)에서 진묵은 관청의 재물을 횡령한 아전을 도와주며, 이로 인해 새로 들어온 죄 없는 아전이 대신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유적고』 제12화의 이야기와 함께 ‘부처님’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제12화는 소금이 없어 노루 육회를 먹지 못하고 있는 사냥꾼들의 사정을 알고 진묵이 시자를 시켜 소금을 보내줬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 제3·4화의 내용까지 고려하면, 당시의 민중들이 생각한 ‘부처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곧 당시 민중들에게 ‘부처님’이란 선악의 여부와 상관없이 중생의 사소한 불편거리도 같이 걱정해주고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3) 대사가 일찍이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요수천(樂水川) 가에 이르러 그 사미가 말하였다. “스님, 제가 먼저 건너가서 물이 얕은지 깊은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미는 신발을 벗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뿐히 건너갔다. 대사도 그를 따라 옷도 벗지 않고 건너려다가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미는 얼른 와서 대사를 부축하였다. 대사는 비로소 나한의 놀림을 받은 줄 알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영산(靈山)의 어리석은 너희 16인이여/ 요수촌(樂水村)의 잿밥 먹기를 언제나 그치려나./ 그 신통과 묘용(妙用)은 비록 따르지 못하지만/ 대도(大道)는 이 늙은 비구에게 물어야 하리라.” 

(4) 영산은 영취산이고, 서역에 있다. 석가여래께서 1,200명의 아라한을 데리고 상주하시며 설법을 하던 곳이다. 대사께서 지금은 잠시 이 지방에 화현(化現)하여 계시지만, 원래는 영취산의 주불(主佛)이시다. 그리고 나한들이 비록 대사보다 먼저 오래전에 화현하긴 했지만, 원래는 대사께서 가르치신 제자였기 때문에 이렇게 어렵지 않게 희롱을 한 것이다. 늙은 비구란 대사 자신을 말한 것이다. 이전부터 항상 대도(大道)로써 가르쳤지만 옛일을 돌이켜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지금 또 이렇게 소소한 신통력으로 대사를 속이기 때문에 이같이 근본에 따라 가르치고 경계하신 것이다.

위의 (3)은 『유적고』의 제8화로, 인용문 (1)·(2)와 달리, 사미로 변한 나한이 진묵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미의 장난으로 인해 진묵이 옷을 입은 채 시냇물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인용문 (4)에서 초의 스님은 이 일화에 대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친밀한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그 근거로 초의는 진묵이 ‘영취산의 주불(主佛)’, 곧 부처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 여기에서도 나한이, 진묵이 부처의 화신임을 나타내는 장치 또는 증거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유적고』 소재 17편의 설화는 진묵을 부처의 화신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진묵의 부림을 받거나 진묵을 도와주는 산신령·금강역사·나한 등의 등장과, 유학자·계집종·사냥꾼·소년 등 다양한 인물과 진묵의 관계 맺음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설화 세 편에 등장하는 ‘나한’의 존재는 19세기 당시 전주를 중심으로 나한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의미하고, 또한 당시 민중들에게 나한이 매우 친숙한 존재였음을 알려준다.  

 

사진. 유동영

 

김기종
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BK21 한국어문학교육연구단 연구교수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연구단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불교와 한글: 글로컬리티의 문화사』, 『한국 고전문학과 불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