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 십육 혹은 오백 숫자와 나한

10대 제자와 6 재가보살 아라한 500명 숫자 연결고리는 법法

2021-08-30     오인 스님
영천 거조사 영산전에는 500나한보다 더 많은 나한이 봉안돼 있다. 

2016년 정토학회에서 나한신앙에 관한 발표 의뢰를 받고, 모처럼 청도 운문사 사리암을 찾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리암이 한국의 유일한 나한기도 도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리암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내려와 운문사 도량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운문사 경내에는 오백전과 응진전(16나한전)이 있고, 또한 칠성각에는 독성단이 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의문이 일었다. 운문사에는 왜 이렇게 다양한 나한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한신앙은 관음이나 지장신앙 등과 달리, 신앙 대상이 독존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도량은 어떠한지 궁금했다. 500 나한상으로 유명한 은해사 거조사(암)로 향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참배했던 도량이었음에도 그날 처음으로 영산전에 봉안된 나한상이 526구임을 알았다. 500나한과 16나한, 그리고 석존의 10대 제자였다.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숲속에 앉아서 500 나한전이 있는 사찰을 검색하니, 기림사 응진전이 있었다. 이곳에도 500나한과 16나한이 함께 봉안되어 있음을, 선행(?) 답사로 금방 알 수 있었다. 불단 앞쪽에 있는 16상의 크기가 뒤편에 있는 500상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사찰들은 500나한과 16나한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현황이나 그 연유에 대해 안내문 등에 소개하고 있지 않았다. 의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으며, 나한신앙에 관한 선행연구들 또한 대부분 16나한상이나 500나한도 등을 중심으로 한 도상학적인 연구 중심이었다. 16나한신앙의 소의경전인 645년에 현장이 한역한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이하, 『법주기』)에도 16나한의 존명과 권속, 주처, 역할 등에 관한 내용은 충분했지만, 500나한과의 연관성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 둘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은 불교경전에서 시작해야만 했다. ‘16’, ‘상수(上首, 우두머리)보살’(이하 상수), ‘빈두로’, ‘오백나한’ 등의 용어에 대한 경문을 2~3개월 동안 검색하고 정리했다. 첫 번째는 숫자 ‘16’과 ‘상수’에 대한 내용이다. 경전에 나타난 ‘16’과 관련한 인물들은 16재가보살, 16현사(賢士), 16정사(正士) 등이다. 16재가보살은 『대지도론』에서 ‘발타바라’를 상수로, 16현사도 구마라집(344~413)역의 『사익범천소문경』 등에서 역시 ‘발타바라’를 상수라고 했다. 다만 16정사의 경우는 축법호(231~308) 역의 『불설해룡왕경』에서는 ‘해박’을, 472년 길가야 역의 『불설대방광보살십지경』 등에서는 ‘발타바라’를 상수라고 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첫째, 16재가보살 등 용어는 7세기에 한역한 『법주기』 이전에만 사용됐으며 둘째, 그들의 상수는 발타바라, 또는 해박이다. 

이를 근거로 16재가보살 등은 16나한신앙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16나한의 상수는 발타바라, 또는 해박이어야 한다. 하지만 『법주기』 속 16나한의 상수는 빈도라발라타사, 즉 빈두로이며 빈두로는 16재가보살 등에서는 존명이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다. 

두 번째는 상수, 즉 발타바라와 빈두로의 관계성이다. 우선 빈두로는 견의(350~400)가 저술하고 437년에 한역한 『입대승론』에서 ‘빈두로존자, 라후라존자 등 16인의 모든 대성문은 여러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하여, 16성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16성문의 개념은 3세기 초 『대지도론』에서 설한 16재가보살보다는 조금 늦지만, 4~5세기에 16재가보살 등과 함께 성립하고 있었다. 이는 455년에 한역한 『치선병비요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울화병 치료법을 설한 내용에 ‘환자가 대승의 마음을 가지면 발타바라와 16현사를 친견할 것이고, 성문의 마음을 내면 빈두로를 친견한다’고 했다. 발타바라와 빈두로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데 발타바라는 대승, 빈두로는 성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500나한과 16나한 그리고 10대 제자 등 나한상 526구가 모셔진 거조사 영산전. 
거조사 영산전에 봉안된 526분의 나한은 같은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거조사를 찾는 기도객들은 대부분 자신의 얼굴과 닮은 나한에게 기도를 올린다.

정리하면 5세기 무렵에 빈두로가 등장하는 16성문도 『법주기』 이전에 성립됐으며, 빈두로사상 또한 『법주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선형은 논문 「중국 남송대 십육나한도의 도상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빈두로신앙이 처음에는 소승적 요소를 많이 갖고 단독신앙으로 출발했지만, 이것을 대승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법주기』이며, 이 『법주기』에 근거한 것이 16나한신앙이다. 따라서 기존의 빈두로 단독신앙과 16나한 중의 빈두로는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최성은도 「천안 성불사 고려시대 마애십육나한상」에서 “소승적 개념의 나한이 『법주기』에서 대승적 성격을 띠는 나한으로 변화하였다”고 했다. 종합하면 『법주기』에서 소승의 독립신앙이었던 빈두로신앙이 대승적으로 발전했으며, 나아가 나한도 대승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빈두로신앙의 대승적 요소’ 또는 ‘나한의 대승적 개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이들의 논점을 수용한다면, 『치선병비요법』에서 발타바라를 대승으로 설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발타바라가 『법주기』에서 제6존자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 16성문보다는 16재가보살 등이 16나한신앙 성립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는 상수로서 빈두로의 등장이다. 빈두로를 상수로 설한 것은 승가바라(479~524) 역의 『아육왕경』이다. 대중이 모인 가운데 비어있는 첫 번째 자리를 보고 아육왕이 야사에게 묻자 야사는 “붓다의 제자 중에 능히 사자후를 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의 성은 파라타이고 이름은 빈두로입니다. 첫 번째 자리는 바로 그분이 앉으실 곳입니다”라고 했다. 이로써 빈두로가 상수로 자리매김한 것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 초이며, 이는 7세기에 성립되는 16나한의 상수에 경전적 근거가 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네 번째는 빈두로의 두 가지 성격이다. 경전에 나타난 빈두로의 역할, 즉 성격은 크게 두 가지인데, 호법과 복전(福田)이다. 우선 호법은 붓다가 신통을 보인 빈두로에게 내린 꾸짖음의 벌이다. 『잡아함경』에 붓다가 사위국에서 500 아라한들과 함께 부루나발타나국의 공양청을 받았을 때, 빈두로가 큰 산을 끌고 가는 신통을 부렸다. 그러자 붓다는 “너는 어찌하여 그런 신통력을 부리느냐? 내 이제 너에게 벌을 주리라. 너는 언제나 이 세상에 있으면서 열반에 들지 말고 나의 정법을 보호하고 지켜 멸하지 않게 하라”고 말했다. 또한, 『십송률』에서는 수제장자가 전단향 발우를 높이 걸어놓고 붓다의 제자들에게 가져가라고 하자, 빈두로가 신통력으로 발우를 가져왔다. 붓다는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람 앞에서 신통을 보였다고 꾸짖고, 빈두로를 구야니로 내쫓아 정법을 지키도록 했다. 

한편 384년에 승가발징 등이 한역한 『존바수밀보살소집론』에서는 빈두로를 ‘어리석은 중생은 좋은 복전이 될 수 없다’며 복전을 설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457년에 한역한 『청빈두로법』으로 계승되었는데, 빈두로가 수제장자에게 신통을 보인 것에 대해 붓다는 말법시대에 사부대중의 복전이 되도록 했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십송률』에서 설한 호법이 복전 성격으로 전환된 것이다. 

다섯 번째는 빈두로와 500나한의 관련성이다. 과연 16나한의 상수인 빈두로와 500나한의 공통성은 무엇인가? 바로 ‘법(法)’이다. 500나한은 붓다 재세 시는 물론 전생담에도 자주 등장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500나한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16나한과 관련해서는 1차 결집에 참여한 500나한에 주목했다. 

결집은 ‘법전(法典)’의 성립이며, 이는 빈두로의 두 가지 성격 중에서 ‘호법’과 일치한다. 따라서 500나한과 16나한을 함께 봉안하는 것은 ‘법’이라는 공통성을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점에 대한 근거는 영천 거조사(암)에 전하는 『오백성중청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문헌은 1805년에 영파성규가 편찬한 의식집으로 10대 제자, 16나한, 그리고 500나한의 존명과 봉청(奉請, 법회 때 부처님, 보살 등을 도량에 청하는 의식) 절차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500나한 제1존자의 존명이 법해(法海)이다. 이 존명이야말로 동아시아 불교권인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한국불교 나한신앙의 특징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한다는 확신이 든다. 이와 같은 관점이라면 한국의 나한전은 ‘법전(法殿)’이 될 것이다. 

답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불국사를 참배했는데, 나한전에는 16나한만이 봉안되어 있었다. 사중스님이 말씀하기를, “지금의 나한전 앞에 빈 공터가 있는데, 예전에 어떤 전각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대로 두고 있다”고 했다. 나한전 앞의 안내문과 본고를 읽는다면, 어떤 전각을 지어야 할지 명확해질 것이다. 부디 불연(佛緣)이 닿기를 바란다.  

 

사진. 유동영

 

오인 스님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 중앙승가대를 졸업하고 일본 불교대학에서 「동아시아에 있어서 오대산 문수신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승가대 비구니수행관장, 동국대 겸임교수, 조계종 교육아사리, 조계종 승가고시 실무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전국비구니회 문화부장, 서울시 전통사찰위원, 경북 문화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