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인생상담] 꼰대와 기막힘&귀를 여는 지혜

2021-09-10     임인구

 

붓다가 함께 수행했던 다섯 사문에게 첫 번째 설법을 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탱 녹원전법상 중 전묘법륜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대범천왕의 계속된 청으로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했다. 

“다섯 선인(仙人)은 모두 청정해 티끌과 때가 적고 번뇌가 엷고 지혜가 날카로워 내가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며 설하는 미묘한 법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저 다섯 선인에게 가서 처음으로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해야겠다.”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 유행(遊行)하는 다섯 선인 곁으로 다가갔다. 다섯 선인은 한결같이 앉아 있기 불편해 했고, 자신들도 모르게 함께 한 약속을 어기고 문득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선인 중 어떤 사람은 발 씻을 물을 긷고 가죽신을 가져왔으며, 어떤 이는 발우를 받아들었다. 

부처님이 법으로 다섯 선인을 가르치자 그들의 삿된 생각이 모조리 사라졌고 손에는 저절로 발우가 들렸으며 머리카락과 수염도 떨어졌다. 위의가 순식간에 이뤄지니 오랜 하안거를 지낸 비구 같은 위엄이 넘쳤다. 부처님은 그 다섯 비구를 잘 가르쳐 그들의 마음속에 각각 기쁨을 내게 하고, 바른 이치를 따르게 했다. 다섯 비구는 부처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너희 비구들이 만약 알고자 한다면 중도(中道)로 나가야 하니, 내가 깨달아 얻은 것과 같이 눈을 열고 지혜를 내기 위해 적정 또는 열반과 팔정도를 성취해야 한다. 곧  정견(正見)·정분별(正分別)·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너희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중도이니 내 이미 깨달아 얻어 안 것이다. 눈을 열기 위하여 지혜를 내기 위하여 적정을 위하여 모든 신통을 내기 위하여 깨쳐 알기 위하여 사문을 위하여 열반을 위하여 
마땅히 성취해야만 한다.”

__  『불본행집경』 「범천권청품」 「전묘법륜품」 각색

심맥경화: 기막힘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죠? 지금 기성세대들에게 너무 화가 나요. 자기들은 생존과 안전을 위한 이득을 다 챙기고 있는 데다가, 막 자기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주장하며 도덕적인 이득까지도 챙기려 하는 모습이 너무 꼴 보기 싫어요. 뭘 해도 저 같은 젊은 세대는 그 앞에서 아직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잘못된 인간처럼 얘기되고, 마치 자기들만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잘난 존재들인 것처럼 구는 게 혐오스러워요. 자기들은 뭘 해도 우아하고 도덕적인 정답이며, 저희는 뭘 해도 천박하고 이기적인 오답인 것처럼 인식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다 고생한 덕분에 저희가 이만큼 좋은 세상을 누리고 있고, 감사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해서 더 싫어요. 무슨 다 인생에 대한 현자들이고,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이 다 선생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도 섞기 싫어요. 입만 열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기 짧은 지식과 오래전 경험으로 정답처럼 가르치려고만 드니 숨이 턱턱 막혀요. 이런 걸 꼰대라고 하잖아요. 어쩌다 이렇게 꼰대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을까요?”

기가 막히면 화가 난다. 당연한 일이다. 화는 동맥경화로 막힌 핏줄을 어떻게든 뚫으려고 하는 생명작용의 분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기를 막히게 하는 이는 선생이다. 이유가 있다. 인간이 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를 통해 집단주의적 사유의 폭력성을 여실히 체험한 뒤 그에 대한 각성으로 실존철학의 영향이 커졌다. 더는 인간의 삶이 집단적 보편성이 아니라 개인적 고유성에 그 정당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사조가 무르익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앞선 삶’을 의미하는 선생(先生)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개인의 고유성이 중대한 의미로 떠오른다면, ‘앞선 삶’이라고 하는 개념은 애초 성립될 수조차 없다. 당연하다. 누구도 나 대신에 ‘나의 삶’을 앞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나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데 다른 누군가가 ‘앞선 삶’을 주장하며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은 장애물에 불과하다. ‘나의 삶’을 대신 책임지지도 않으면서, 뻔뻔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처럼 ‘앞선 삶’이 ‘나의 삶’을 가로막는 일, 이것이 기가 막히게 되는 일이다. 삶이 막히게 되는 일이며, 생명작용의 흐름이 막히고, 마음이 막히는 일이다. 막혀 흐르지 못하는 마음은 그 자리에 정체된 채 단단하게 굳는다. 결국, 답답해진다. 심맥경화(心脈硬化)인 셈이다. 이 시대의 선생들이 만드는 결과다.

 

불통의 고집: 귀 막힘

이 기가 막힌 심맥경화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기막힌 일들은 언제나 귀 막힘으로 인해 생긴다. 

선생들은 귀를 막고 말한다. 자기들이 얼마나 ‘앞선 삶’인지를 뜨겁게 말하는 데 숨이 가쁘다. 이것이 고집이다. 고집은 다시 말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집은 미로 안에 있다. 자기 폐쇄적으로 닫힌 상황을 드러낸다.

이처럼 닫힌 구조에서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을 방황이라고 말한다. 방황이 모험이 아닌 이유는 같은 구조 안에서만 헤매고 있어서다. 따라서 방황은 지혜로운 모종의 답을 찾고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다. 이미 정해진 답을 들고 단지 미로 안을 헤매고 있는 상태다. 이 헤맴은 그저 고집에 불과하다.

귀가 막혀 있으면 헤맴이 일어난다. 점점 더 모르게 된다. 답을 정해놓았으니 더 모르게 된다. 남는 것은, 자기도 사실은 모르면서 고집스럽게 정해놓은 가상의 답만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일뿐이다. 자기도 확신할 수 없는 답을 남에게 가르치는 데 모든 열정을 쏟는다. 세상은 더욱 깜깜해진다. 무명(無明)에 싸인다. 늪과 같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 선생이 많으면 배는 늪에 빠진다. 허우적거리며 헤맬수록 더 어둠 속으로 침몰한다.

따라서 귀가 막혀 있으면 눈도 어둡게 막힌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이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불통의 현실이다. 입만 열려 있으니, 고집스럽게 “내가 너희들보다 

경험도 많이 했고 지식도 많이 쌓은 위대한 선생”이라며 소리만 지르는 현실이다. 사실은 늪에 빠져 살려달라고 외치는 절규다.

이처럼 선생들이 헤맴의 끝에 도달하게 된 것은 흐름의 끝인 늪이며, 곧 막힌 벽이다. 미로 안에 높다랗게 세워진 고집의 벽이다. 그리고 선생들은 이 고집의 벽 앞에서 다양한 태도를 제안한다. 모두가 한마음의 집단이 되어 무수하게 달걀을 벽에 던지면 언젠가는 벽이 무너질 것이라든가, 벽 앞에서 버티고 사는 것이 원래 우리 삶의 미덕이라든가, 간절하게 기도하면 우주의 기운이 모여 날개가 생겨날 것이라든가 하는 식의 가르침들을 벽 앞에서 외쳐댄다. 그러나 그 모든 가르침은 그저 그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리는 ‘화의 목소리’들이다. 그래서 그 가르침을 듣는 이도 화가 난다. 이처럼 불통의 고집은 서로 화만 나누게 되는 현실을 창조한다.

20세기 최고의 종교철학자 중 하나인 틸리히와 상담자 중의 상담자라고 불리는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가인 로저스. 둘이 함께 나눈 대담 속에서 종교적 방법론과 심리상담의 방법론 사이에 공통되는 핵심적인 원리를 도출해낸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경험들에 정직하게 자신을 열어놓는 태도’다. 이것은 경청의 태도를 의미한다. 틸리히는 이를 사랑의 태도와 연결해 이렇게도 말한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듣는 것입니다.”

명상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참선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기도는 무엇을 하는 일인가? 상담은 무엇을 하는 일인가? 바로 듣는 일이다. 자기가 정해놓은 고집스러운 답을 포기하고 한번 처음으로 투명하게 들어보는 일이다. 정말로 듣기 위해 귀를 열면 귀 막힘이 사라지고, 이내 기막힘이 사라진다. 삶이 다시 흐르게 되며, 마음이 자유롭게 된다. 소통이 회복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생이 아니라 바로 이 소통이다. 소통은 이해다. ‘앞선 삶’으로 ‘나의 삶’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이해받는 일이다. 즉, 삶에서 경험하는 내 마음이 이해받는 일이다. 지혜는 마음에 대한 가장 깊은 이해다.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지혜다. 가장 귀를 열고 소통하려는 이만이 이 지혜를 얻는다. 그를 바로 붓다라고 부른다.

붓다가 함께 수행했던 다섯 사문에게 첫 번째 설법을 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탱 녹원전법상 중 전묘법륜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마음의 연인을 깨우며: 누구의 목마름인가?

그래서 붓다는 사실 선생(先生)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동생(同生)이다. 마음의 말을 들으며 마음과 동행하는 이다. 붓다에게는 분명 목마름이 있었다. 마음과 동행하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었다. 소통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 목마름이 붓다를 일반적인 선생들과 다르게 만든다. 선생들은 자기의 목마름을 자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은 훌륭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며, 그 훌륭한 것들을 남들에게 제공한다고 착각한다.

선생 자신이 소통의 욕구로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선생이라는 입장은 대단히 뻔뻔해진다. 자기 우상화에 사로잡힌다. 스스로는 아쉬운 게 없으니 남들이 자신을 필요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기가 마치 숭고한 무아(無我)의 봉사자 혹은 희생자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정말로 무아인 것은 목마른 이뿐이다. 표현 그대로다. 가장 텅 비어있기에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장 비어있기에 유입이 가능해지며, 이동이 생겨날 수 있다. 가장 비어있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흐르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흐르게 하는 일이 바로 자신의 필요인 까닭에, 그 의도는 가장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동기화된다. 심지어는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던 이에게조차도 먼저 귀를 열게 된다.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했던 일이다.

붓다는 다섯 비구와 진정한 선생 자리를 놓고 경쟁하지 않았다. 그들 각각의 ‘나의 삶’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붓다는 다섯 비구가 처한 불통의 현실을 보았다. 그들 자신이 세운 벽 앞에 막혀 힘들어하고 있는 현실을 보았다. 그만큼 그들이 얼마나 소통의 기쁨에 목말라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한 일은 바로 이뿐이다.

“나도 당신과 같습니다. 당신처럼 소통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렇게 붓다는 자기들과 같지 않아 붓다를 미워하던 다섯 비구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 마음과 동행하여, 그 마음에 대한 가장 최고의 이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는 즉각적으로 현장에서 다섯 비구와의 소통에 성공함으로써, 다섯 비구에게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소통하고자 했던 붓다의 소망과 다섯 비구의 소망이 한 자리에서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그들의 삶을 마치 먼저 산 선생(先生)처럼 기능해서가 아니다.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을 경청하며 동생(同生)으로서 공감했기에 가능한 현실이다. 자신의 목마름을 통해 가장 주관적인 고유성으로 기능하려는 의도가 가장 보편적으로 통하는 현실을 창조했다. 소통의 신비다. 

우리는 ‘가장 나’일 때 나를 만난다. ‘가장 나’라는 것은 선도 악도, 좌도 우도, 흑도 백도 아닌 곳에 있다. 옳고 그름의 정해진 답을 포기하고 지금 여기에서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자 하는 의도가 마음과 동행하는 순간, 나는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중도의 다른 이름이며, ‘나의 삶’은 곧 ‘중도의 삶’이다. 이러한 ‘중도의 삶’의 핵심은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잘 듣는 일이다. 내가 목마르기에 나의 필요로 잘 듣는 일이다.

붓다, 그의 사랑은 우리네 마음의 자유가 목마르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고민을 잘 듣는다. 그는 꼰대 혹은 선생이 아니다. 마음의 상냥한 연인이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