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스님과는 어깨춤을, 절에서는 소리와 빛깔을 타고

불교시

2021-07-28     임종욱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서화가(書畵家), 금석학자다. 그는 조선 후기를 풍미했다고 알려진 실학파의 일원이었지만, 학문의 방법론과 예술적인 실천으로 이 이념을 실현해 나갔다. 그 결과 그는 시서화(詩書畵)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기량과 성과를 보여주었고, 문화유산의 고증이나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이런 점 때문에 김정희는 시대적 제약을 넘어 인문주의자로서 그 가치를 평가받아 마땅하다.

김정희가 살다간 18, 19세기는 걸출한 선승들이 많이 등장해 신선한 충격을 주던 시기였다. 그들의 논리와 자세는 고루한 공리공담에 염증을 느끼던 진보적인 유가 지식인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실천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지향하는 바도 일치했다.

김정희가 남긴 한시는 제목으로 보면 모두 377수가 된다. 이 가운데 불교를 노래한 작품은 40수 정도다. 실제로 그의 한시에는 알게 모르게 불가의 용어나 표현, 사고가 저변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일지암에서 차의 중흥을 일으켰던 초의는 김정희에게 차를 보내는 등 긴밀한 유대감을 가졌다. 반으로 쪼갠 대나무로 크기가 다른 물받이 돌 3개를 연결해 물을 흐르게 한 유천(乳泉).

도반으로서 스님들을 대하다

작품에서 볼 때 김정희가 평생 교유한 스님은 15명 안팎이었던 듯하다. 이들 중에서 초의의순(草衣意詢, 1786~1866)과의 교분은 남달랐다.

초의의순은 조선 후기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다. 그의 정신과 관심은 워낙 닿아있는 방면이 넓고 진지해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당대 석학들과 교분했고, 개성 강한 시의 세계를 보여줬으며, 특히 우리 차에 쏟은 정성과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김정희 또한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좌절을 겪고 불우했을 때 많은 위로와 용기를 그로부터 얻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긴밀한 유대감을 가졌다. 김정희가 38편에 달하는 편지글을 초의에게 보낸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는 초의에 대해 꽤 많은 시를 남기고 있다. 이들 시에서 그는 진지하면서도 오묘한 논의와 생각들을 펼쳤다. ‘초의에게 주다(贈草衣)’란 제목의 5언 고시를 읽어본다.

竪拳頭輪頂(수권두륜정)      
두륜산 마루에 주먹 세우고
搐鼻碧海潯(휵비벽해심)      
푸른 바다 기슭에서 코를 벌름거리네.
大施無畏光(대시무외광)      
홀로 무외의 빛을 크게 베풀며
指月破群陰(지월파군음)      
지월로서 뭇 어둠을 깨뜨리는구나.
福地與苦海(복지여고해)      
복지이건 고해이건 가릴 것 없이
摠持一佛心(총지일불심)      
하나의 부처님 마음을 항상 가졌네.
淨名無言偈(정명무언게)      
정명은 말 없는 게의 노래이고
殷空海潮音(은공해조음)      
은공은 바다 밀물의 소리일세.
入佛復入魔(입불부입마)      
부처에 들고 또다시 마군에 들어가도
但自笑吟吟(단자소음음)      
다만 스스로 웃기만 할 뿐이지.
狸奴白牯知(리노백고지)      
살코양이 마음이나 백고의 지혜
機用互相侵(기용호상침)      
기용에 따라 서로 덤벼들었네.
春風百花放(춘풍백화방)      
봄바람에 온갖 꽃이 일제히 피니
明明到如今(명명도여금)      
밝고 밝아 오늘에 이르렀다오.

초의의 내면세계를 다양하게 구사한 선어(禪語)로 노래한 작품이다. 수권(竪拳)이나 지월(指月) 등 화두가 적재적소에 거침없이 쓰이고 있어 시의 맛을 더욱 기름지게 한다. 주먹을 불끈 쥐거나 코를 벌름거리는 행위는 곧 얽매임 없는 초탈한 경지를 비유하는 말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몸짓으로 비유하여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김정희도 초의를 인정하고, 또 자신도 인가하는 방식이다. 초의의 깨달음을 자신 역시 체득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사실 그렇기에 이어지는 내용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깨달음을 말한다면 그야말로 백일몽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시행 속에서 묘사되는 초의는 극상의 칭송 속에 구현되고 있다. 두려움이 없는 빛을 뿜어 손가락이 아닌 달[月]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지상 인간들의 어둠은 다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 공간이 극락의 세계이건 고해의 지옥이건 하화중생(下化衆生) 하려는 부처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소리조차 없는 게송으로 온 우주의 소리를 다 담아냈으니, 부처의 경지에 들든 마군(魔軍)의 손아귀에 빠졌든 웃음 한 번으로 그 경계를 다 무너뜨려 버린다. 본질과 쓰임의 구별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했다. 이런 초의의 선풍(禪風)은 결국 추운 겨우내 모든 생명이 얼어붙어 있다가 봄바람에 활짝 새 생명이 움터나듯, 무명(無明)을 깨치고 광명을 삼라만상에 부여한다고 비유했다.

이 작품은 워낙 선어의 사용이 범상치 않아 일독했을 때 입에 껄끄럽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이 당시의 시단에서 김정희의 시가 어렵게 인식된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학적인 취향이 있긴 하지만, 초의가 일구어낸 깨달음의 경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김정희뿐이었을 것이다.

초의가 40여년 간 머물렀던 한국 차 문화 중흥의 상징 해남 대흥사 일지암. 
김정희는 초의에게 38편에 달하는 편지글을 보냈고 꽤 많은 시를 썼다. 

하늘과 빛깔과 소리와 사찰

김정희의 문집에 보이는 사찰은 그리 많지 않다. 확인된 것만 헤아리면 신계사(神溪寺)를 비롯해 부왕사(扶旺寺), 승가사(僧伽寺), 관음사(觀音寺), 중흥사(重興寺), 화엄사(華巖寺), 봉녕사(奉寧寺) 정도다. 이밖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찰도 나온다. 아마도 그리 사격이 높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절일 소지가 다분하다.

또 대개가 서울 근교에 자리한 사찰이라는 점에서 명찰을 탐방하겠다는 자발성보다는 스님을 만나는 등의 다른 연유 때문에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심이 옅지 않은 김정희였지만, 그의 생애가 한가할 때 산사를 찾을 만큼 마음의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김정희가 비교적 자주 찾은 사찰이 부왕사다. 그래서인지 부왕사를 다룬 작품도 두 편이다. 그 중 5언 율시 <부왕사에서(扶旺寺)>를 읽어보자.

看山何處好(간산하처호)      
산 구경은 어디가 좋은고 하니
扶旺古禪林(부왕고선림)      
부왕이라 불리는 옛 선림이라네.
日落峯如染(일락봉여염)      
해 저물면 봉우리는 물든 듯하고
楓明洞不陰(풍명동불음)      
단풍 밝으니 골짜기도 어둡지 않아.
鍾魚來遠近(종어래원근)      
범종 소리는 원근으로 울려 퍼지니
禽鳥共幽深(금조공유심)      
산새들도 그윽하고 깊은 경지를 함께 즐기네.
漸覺頭頭妙(점각두두묘)     
보는 곳마다 절묘함을 더욱 깨달으니
靈區愜道心(영구협도심)     
영험한 곳이라 도심도 흡족하게 열리는구나.

끄트머리에 서면 멀리 북한산 주요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오는 북한산 부왕사지. 
김정희는 비교적 부왕사를 자주 찾았고 시 몇 수를 남겼다.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부왕사는 계곡 사이로 정면이 환하게 열려 있어 산과 하늘, 평야와 강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승지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무성한 삼림으로 돌아갔지만, 김정희가 오를 때만 해도 절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을날 단풍이 무르녹고 노을이 가득할 때 올랐으니 보통 비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봉우리마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는 것은 과장이라기보다는 단풍 때문에 다가온 강렬한 느낌의 표현이다. 하루의 휴식을 알리는 범종 소리는 골짜기를 타고 봉우리를 올라 하늘로 날아가고, 새들은 약속이라도 한 양 산사 주변으로 모여들어 저들의 보금자리에 깃든다. 그것을 마치 함께 이 아름다운 광경을 즐기는 것으로 김정희는 슬쩍 눙친다. 마음이 부처가 되면 굳이 절이 아니라도 어느 곳이든 사찰이다. 보는 것마다 깊이 어려 있는 불성(佛性)을 느끼게 되니 더욱 마음이 들뜨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산사에 오르느라 흘러내린 땀을 씻으며 사바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야에는 속세의 먼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 하나 솔가지 한 가닥에서도 그는 범상치 않은 세계의 조화를 느낀다. 범종과 산새가 하나가 되어 천진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그 순간에 시인은 자연의 놀라운 신비를 순식간에 체득한다. 불심도 도심도 계기가 있어야 열리고 깨치는 법이다. 부왕사의 쏟아지는 저녁노을 속에서 김정희는 오랜만에 오도(悟道)의 열락을 맛보았던 것이다.

김정희가 자주 찾았고, 시를 남긴 북한산 부왕사는 이제 터만 남았다. 쓸쓸하게 남은 부도가 멀리 북한산 봉우리를 응시한다. 

김정희는 시인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지만, 워낙 그의 학문 세계가 호한(浩瀚, 넓고 크다)해서 시적 성과가 학력(學力)에 덮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의 시에는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들)가 대단히 풍부하게 전개되고, 시로써 이치를 논하는 관념성이 짙어 서정적 자아는 상대적으로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김정희는 기질적으로 선승(禪僧)이라기보다는 학승(學僧)에 가깝다. 그는 자연과 세계를 바라볼 때도 탐미적으로 되기보다는 탐색하고 분석해 이치를 찾으려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김정희는 조선 고증학의 태두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불교시가 마냥 난해한 논쟁이나 이론의 구축, 설득을 위한 그물망으로만 짜인 것은 아니다. 시적 화자의 정서와 결이 드러나는 작품도 때로는 눈에 띄고, 특정 구절이 시안(詩眼)이 되어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의 시에 이지적인 시야로만 접근하지 말자. 전고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긴장을 풀고 다가가면 그의 시에 화엄의 세계가 펼쳐져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일지암 편액.

 

사진. 유동영

 

임종욱
한문학자이자 작가. 동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제3회 김만중문학상 대상을 받았으며, 현재 남해에서 연구와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