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독창적 개성 넘어 인격으로 승화하다

철학적 인간학

2021-07-28     장승희
허련, <완당 김정희 초상>,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추사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로서 명성을 떨친 제자 허련이 그린 추사의 말년 모습이다. 

추사의 철학적 인간학

독일 철학자 셸러에 의하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인간에 관해서 모든 과학이 얻어낸 풍성한 개별지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기의식과 자기성찰에 관한 새로운 형식을 전개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인간학은 다양한 개별과학의 도움으로 삶의 제반 현상들을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본질과 의미를 규명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추사체의 특성은 ‘괴(怪)’와 ‘졸(拙)’인데, 이를 파악하려면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생애와 삶, 시대정신과 예술작품은 물론, 그에게 영향을 준 유교와 불교, 이를 통해 형성된 그의 학문과 예술 등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에게 가장 극적인 사건은 제주 9년의 유배 생활로, 괴(怪)는 유배 이전 귀족자제로서의 자부심과 자신감에 따른 개성의 표현이라면, 졸(拙)은 유배 이후 성찰하며 얻은 삶의 철학적 표현이자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괴에서 졸로, 추사체의 변화는 단순히 글씨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추사의 변화이자, 그가 세계와 조응하여 이루어진 ‘철학적 인간학’이라 할 수 있다. 

 

‘괴(怪)’의 인간학적 의미

추사는 자신의 글씨 맛은 괴에서 나옴을 분명히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구해 온 서체는 본시 처음부터 일정한 법칙이 없어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奇)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금체(今體)인지 고체(古體)인지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보는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해명해도 조롱을 면할 수 없거니와 괴하지 않으면 역시 글씨가 안 되는군요(要書體, 是初無定則, 筆隨腕變, 怪奇雜出, 是今是古, 吾亦不自知. 人之笑罵從他, 不可解嘲, 不怪, 亦無以爲書耳).”

괴(怪)의 뜻을 함축하는 ‘기이함’ 또는 ‘괴상함’이란, 일반인들이 수용하는 평범한 경지를 넘어선 특이함이다. 일상적인 아름다움[美]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보다는 추(醜)에 더 가깝지만, 격이 낮은 추가 아니라 미적 경지로 승화될 수 있는 격조 있는 추의 경지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추함’의 동의어들 거의 모두는 격렬한 거부감이나 공포,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혐오감의 반응을 포함하고 있다”라며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의 거의 모든 미학 이론에서는 어떤 형태의 추든 충실하고 효력 있는 예술적 묘사로 보상받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 역사적인 예술작품들 속에서 괴와 추의 미학이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통찰했던 셈이다. 추사체의 괴는 추의 미학을 넘어 ‘괴적인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과 통하고 있다. 즉 일반적이고 평범한 아름다움의 틀을 깬, 상식을 넘어선 비균형적인 균형, 비조화의 조화인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추사체의 괴의 특성은 삶과 연계되는데, 그는 당시 유교사회의 일반 상식을 넘어서면서도 결코 균형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감히 자황(雌黃) 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다. 자황이란 “시문을 첨삭하여 다듬는 일이나 변론의 시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고대 중국에서 글의 잘못된 글자를 이 물감으로 지운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추사는 모든 것을 청나라 연경 경험을 기준으로 재단하여 사람들에게 ‘잘난 척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듯하다. 상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행동과 개성을 보여서 남들에게는 오만하게 보였겠지만, 그는 천재성과 더불어 가족과 지인, 제자들을 두루 챙기는 온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괴는 괴이면서도 조화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격이 까다로워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더라”는 미술사학자 이동주 선생의 표현처럼, 추사는 붓이나 종이의 선택에서도 매우 까다로웠다.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만든 붓들은 쓸 만한 게 없소. 북혈와필(北穴瓦筆)·정초자용필(正草字用筆)·명월(明月) 주옥(珠玉) 등을 붓대에 새긴 것들은 더욱 거칠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공통된 논이 아니다” 등 붓과 종이를 가렸다. 붓도 쥐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만을, 종이도 질 좋은 종이만을 고집했다. 그의 까다로움에 더하여 추사가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한 오만함은 제주 유배의 길에 있었던 두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하나는 전주의 서예가인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을 평가한 데서, 다른 하나는 초의 선사가 머물던 대둔사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에 대한 평가와 대응에서이다. 물론 유배가 끝나고 돌아올 때 추사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추사가 조선 순조 18년(1818)에 쓴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9호).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서 해인사 중건에 관여했고, 추사가 권선문과 대적광전 상량문을 지었다. 법보종찰 해인사성보박물관 제공.

‘괴(怪)’에서 ‘졸(拙)’로, 그 인간학적 의미

괴를 넘어 졸의 경지에 이르러 추사체는 개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이루면서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 졸(拙)은 ‘손재주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고 멋대로 비어져 나오다’에서, ‘서투르다’의 뜻을 나타낸다. 또 못나다, 운이 나쁘다, 쓸모없다, 자신의 것에 대한 겸칭 의미로도 사용한다.

추사의 괴가 졸의 인간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易)과 불교를 공부하고 체화한 덕이다. 추사는 권돈인(權敦仁)과 『주역』을 논하면서 “궁하면 통할 수 있고, 죽으면 살 수가 있고, 어지러우면 다스려질 수가 있고, 끊어지면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라며 자신의 처지에 적용해 위안 삼는다. 유배 초기에는 쉽지 않았지만, 그는 점차 『주역』의 논리에서 자기 극복의 힘을 찾기 시작한다. ‘지뢰복괘(地雷復卦)’를 통해 지금은 비록 쇠하여 어렵고 힘들지만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고 변화의 기운을 위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준비와 노력을 하고자 했다.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는 것이 바로 소식(消息)의 지극한 이치인데, 나의 경우는 궁함이 아직 궁함이 다 되지 못하고 변함이 아직 변함이 다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또 소식하는 한 가지 이치가 지금은 또 증험이 없어, 기수(氣數)의 주장(主張)이 한결같이 그 어긋나는 데 맡겨져서 그런 것이란 말입니까(窮則變, 變則通, 卽消息之至理, 而窮有未窮, 變有未變耶. 抑復消息一理, 今且無驗, 氣數主張, 一任其乖)?”

역(易)의 이치에 따르며 해배(解配, 귀양을 풀어 줌)를 고대했지만 그 소식은 이르지 않았고, 추사는 차츰 힘든 환경에 적응하며 마음을 내려놓고 상황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추사에게 성찰의 계기를 준 것은 불교였다. 유배 기간이 길어질수록 편지에 불교 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불교시도 부쩍 많아지는데, 불교 서적들을 읽으면서 불교적 사유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불이선란(不二禪蘭)>에는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추사의 염원이 담겨 있다. “난화를 치지 않은지 스무 해 / 우연히 본성을 훤히 그려 냈구나 /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 경지가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라네(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추사는 어린 시절부터 원찰 화암사에서 불교와 접하여 신앙심이 깊었으며, 기회가 될 때마다 사찰 현판이나 불교 관련 작품을 많이 남겼고, 스님들과 교류하며 불교시를 많이 지었으며, 백파 선사와는 선(禪) 논쟁을 했다. 그의 서독(書牘, 편지)에 쓰인 불교 용어들이나 읽은 경전들만 보아도 불교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추사에게 불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삶의 토대였으며, 그는 표면적으로는 유학자이자 고증학적 실학자이지만 사상과 예술의 저변에는 불교적 인식이 스며들어 있다. 추사는 동갑이자 형제와 같은 우의를 나누었던 초의 선사 외에도 많은 스님과 교유했고 게문(偈文)을 지어드렸다.

스님들과의 교류는 인간관계를 넘어 불심을 바탕으로 한 만남이었던 듯하다. 만년의 추사는 더욱 불도에 귀의하여 일흔 살에는 봉은사에 기거하면서 발우공양하고 자화참회(刺火懺悔)하며 살았고,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자로서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에는 그의 마지막 불심이 담겨 있다.

 

개성 시대에 던지는 화두 

‘추사의 철학적 인간학’은 자신의 타고난 환경과 개성, 그 개성을 보편성으로 승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추사체의 한 특성인 ‘괴(怪)’는 평범함을 거부한,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추사만의 삶이자 예술을 표현한 개념이다. 그 개성은 결코 조화와 균형을 깨뜨리지는 않았지만 자기만의 자신만만함으로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었고 다소 까다로운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것을 순화하고 인격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9년의 제주 유배 생활과 불교적 사유였다. 

추사의 괴(怪)와 졸(拙)은 추사체의 특성이자 인간 추사의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자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21세기 문명에서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타고난 기질과 적성을 살리면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가치 혹은 몰가치, 바람직하지 못한 가치 지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에, 추사의 삶과 철학은 우리에게 개성과 인간됨의 조화를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이다. 자기만의 기질과 개성을 지키되 그것을 인격적으로 승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러두기 : 이 글은 『유학연구』34집(충남대 유학연구소, 2016.02.)에 게재된 논문 「‘괴(怪)’와 ‘졸(拙)’로 본 추사 김정희의 철학적 인간학」을 본 잡지의 편집 방향에 맞춰 필자가 수정·보완했습니다.

 

장승희
제주대 교육대학 교수. 서울대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에서 3년간 수학했고, 서울대와 동국대에 출강했다. 저서로 『다산 윤리사상 연구』, 『유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 『불교사상의 현재성과 윤리교육』이 있다. 

【참고문헌】
민족문화추진회 역, 『국역 완당전집 Ⅰ-Ⅲ』, 솔, 1996.
민중서림편집국 편, 『漢韓大字典』, 민중서림, 1998.
움베르토 에코, 오숙은 옮김, 『추의 역사』, 열린책들, 2008.
유홍준, 『김정희』, 학고재, 2006.
유홍준, 『완당평전 1-3』, 학고재, 2002.
장승희, 「김정희, 불심을 바탕으로 조선문예를 빛내다」, 『불교평론』 제64호, 불교평론, 2015.
진교훈, 『철학적 인간학 연구(Ⅰ)』, 경문사, 1990.
http://db.itkc.or.kr(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 완당전집(阮堂全集)
http://db.itkc.or.kr(한국고전종합DB): 국역 조선왕조실록 > 철종실록
http://db.itkc.or.kr(한국고전종합DB): 한국문집총간(301) > 완당전집(阮堂全集)
http://dic.daum.net/index.do?dic=hanja(검색일: 2015.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