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말라버린 삶에서 ‘평생의 공적’ 이루다

유배지 제주에서 피운 꽃

2021-07-28     석한남

 

<김정희 필 세한도(歲寒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손창근 기증. 추사는 제주 유배 생활의 신산한 마음을 담아 황량하고 쓸쓸한 <세한도>를 그렸다. 

추사, 유배를 떠나다

의금부의 문초(問招, 죄를 따져 물음)는 매섭고 잔인했다.

안동 김씨 가문이 경주 김씨 가문을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를 제거하기 위한 정치공작이었다. 10년 전 마무리 되었던 윤상도의 옥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추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 오히려 안동 김씨가 얽혀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상소 당사자인 윤상도 부자가 능지처참을 당했고, 탄핵 주체였던 안동 김씨 김양순(金陽淳)이 고령의 몸에 신장(訊杖, 죄인을 신문할 때 쓴 몽둥이)을 이기지 못해 죽었다. 

추사는 6차례에 걸친 문초에 36대의 신장을 맞아 초주검이 됐다. 그는 당시 우의정이었던 친구 조인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해남 이진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바닷바람이 살을 에는 1840년 음력 9월 27일의 일이다. 

 

절망과 분노의 시절

절도안치(絶島安置). 말 그대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귀양살이하는 집 둘레에 탱자나무 가시를 둘러 죄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최악의 유배형이다. 추사에게 내려진 형벌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한 가장 혹독한 형태였다.

그러나 실제로 추사의 유배는 이 형벌의 원칙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절도에 위리안치되었다고 하더라도 가문의 영향력이 건재하거나 향후 정계로의 복귀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한 예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유배지도 사람 사는 곳이니 실력과 배경이 있는 자들에게는 유배의 내용도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추사 주변의 후원그룹은 건재했다. 추사의 오랜 지기로 헌종의 숙부인 조인영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고, 또 한 사람의 절친한 벗 권돈인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정승의 자리로 올라서 있었다.

추사는 유배 초기부터 제주 여러 곳을 답사하며 삼별초(三別抄)의 유적지를 찾기도 하고 종종 한라산을 오르기도 했다. 권돈인에게 보낸 여러 편의 서신에는 이러한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이곳에는 감로수가 있어~ 마치 유천(乳泉)과 같고 단맛은 마치 고급 석밀(石蜜)과 같아 차가우면서도 향기가 있는데~ 멀리 가져갈 길이 없어 보내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此中有甘露水~ 如乳泉 甘如石蜜之上品 淸冽有香~ 無遠致之道 不得仰呈 極可歎耳).”

위리안치에도 불구하고 추사의 적거지(謫居址, 귀양살이하는 곳)에는 여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많은 제자와 지인들, 심지어 그를 감독해야 할 제주 목사(牧使, 관찰사의 밑에서 지방의 목을 다스리던 문관)까지 발 벗고 나서서 그에게 학문과 생활의 편의를 제공했다. 무엇보다 30세 나이에 만나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맺게 된 초의 스님은 추사의 유배 생활에 정신적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도 도시 최상류층을 구가했던 추사에게 제주 유배는 익숙한 부요(富饒, 재물이 풍부)에서 벗어난 절망과 궁핍의 시기였다. 유배 다음 해부터 본가 부인에게 보낸 몇 장의 언문편지를 보면 그는 반찬에 대한 투정을 유독 심하게 했고 잔병치레도 많았다. 그는 제주 유배 생활 내내 끊임없이 본가나 친지들에게 유배지의 불편함을 호소했으며 진장(陳醬), 민어, 겨자, 어란, 소고기 육포 등 고급 먹거리들을 계속 요구했다. 

차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추사는 초의 스님에게 자주 차를 재촉했고, 차를 더디 보낼 땐 정도가 지나치리만큼 차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유배 생활 초기에 그의 절망은 분노가 되어 나타났다. 그는 자기보다 이미 80여 년 이전에 태어나 세상을 떠난 당대 최고 명필인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를 폄훼하며 공격의 날을 세웠다. 원교가 소론이며 양명학자인 탓으로 짐작될 뿐, 그가 이렇게 험한 말로 원교를 비판했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또 고창 선운사의 백파(白坡, 1767~1852) 스님이 불교 중흥을 위해 선(禪)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선문수경’을 쓰고, 대흥사에 있던 초의 스님이 반발하자 이 논쟁에 끼어들었다. 그는 77세의 노승 백파의 논지가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반박하다 못해 나중에는 상식 밖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했다. 그는 백파가 늙어 망령이 든 증거가 15가지나 된다는 ‘백파 망증 15조(辨妄證十五條例)’를 써 보냈다. 

또 당대 예서의 대가로 손꼽히는 송하옹 조윤형(松下翁 曺允亨, 1725~1799)과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1760~1834)에 대한 비판도 빠뜨리지 않았다. 문자기(文字氣)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즉 책을 많이 읽지 못해 글씨에 깊이가 없다는 것인데, 이렇게 혹평을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인 유한지는 놀랍게도 바로 추사 외증조부 유한소의 6촌 아우였다. 제주 유배 초기만 해도 추사는 넘쳐흐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허련,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추사는 제자 허련을 시켜 소동파가 하이난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모습을 담은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에 자신의 제주 유배 모습을 투영시킨 그림을 그리게 했다. 

추사체의 완성

유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의 절망과 분노는 어느덧 학문과 예술의 성숙으로 옮겨 갔다. 1844년 그는 유배 생활의 신산(辛酸,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생스러움)한 마음을 담은 황량하고 쓸쓸한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그리고 <세한도> 한쪽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예서로 발문(跋文)을 달아 자신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같이 하니,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게 말라버린 사람에게 오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듯 하는구나(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유배 생활이 길게 이어지면서 수선화 법첩을 비롯한 추사의 많은 명작이 제주에서 탄생했다. 미술사학자 동주 이용희(1917~1997)의 말처럼, 그는 유배 기간 내내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 쓰고” 또 썼다.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이제는 그런 제3의 계기를 차단해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독특하고 개성이 넘치는 전혀 새로운 예술세계를 창조해 나간 것이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 환재 박규수(瓛齋 朴珪壽, 1807~1876)는 제주 유배 후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만년에 바다 건너 돌아온 후에 다시는 남의 행보에 얽매이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의 장점을 모아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니, 신비스러운 기운이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왔다(晩年渡海還後 無復拘牽步趣 集衆家長 自成一法 神來氣來 如海似潮)”라고 썼다. 

추사는 이 유배 생활을 통해 선천적인 그의 천재성에 완하삼백구비(腕下三百九碑, 팔뚝 아래 중국의 옛 비석의 서체 309가지를 모두 익혀 갖추었다는 뜻)를 갖추고,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학예연찬(學藝硏鑽)과 실험정신을 더하여 전혀 새로운 문자구조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추사는 옛 서한의 예서를 본받아 새로운 문자 세계를 구현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당당하게 피력했다. 

“나의 글씨는 비록 말할만한 것은 못 되지만, 70년 동안에 10개의 벼루를 갈아 구멍을 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조선의 지식인에게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은 유배의 롤모델이었다. 추사가 스승으로 섬긴 청나라의 지식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소동파를 흠모하여 평생 제사를 지냈다. 소동파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王安石)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4년간 황주(黃州)에서 유배 생활했으며, 잠시 관직에 복귀하였다가 다시 혜주(惠州)에서 3년, 하이난섬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소동파는 그의 시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畵像)’에서 이런 유배 생활을 평생의 공적으로 풀어놓았다. 

추사 김정희는 바다 건너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의 유배를 소동파의 유배 생활에 투영하고 싶었다. 그는 제자 소치 허련을 시켜 소동파가 하이난섬으로 유배를 떠나는 모습을 담은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에 자신의 제주 유배 모습을 투영시킨 그림을 그리게 했다. 추사는 제주 유배를 통해 ‘평생의 공적’을 이룬 소동파의 유배를 닮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추사체를 제주 유배지의 꽃으로 피워내었다.  

 

석한남
고문헌연구가. 한문과 고서화를 독학, 약 3만 자 정도의 고문을 외우고 있다. 초서로 쓰인 옛 편지 1,000여 편을 탈초(脫草)·번역(飜譯)했다. 기업체, 대학, 미술 교육기관, 공무원 연수원 등에서 ‘중용’, ‘장자와 쉼’, ‘우리 옛 글씨와 그림 읽기’ 등을 강의했다. 지은 책으로는 『명문가의 문장』,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지금, 노자를 만날 시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