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을 논하고 차를 나누며 우정을 쌓다

방외의 벗들

2021-07-27     박동춘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초상화를 그린 수묵화가 김호석 화백의 <초의 초상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경향(京鄕, 서울과 시골)의 스님들과 교유했다. 특히 그는 『법원주림』, 『원각경』, 『법구경』, 『전등록』, 『금강경』, 『종경록』 등 불서를 탐독하여 불교 이론에도 밝았다. 그는 조선 후기 가장 활발했던 선리(禪理) 논쟁이었던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의 논쟁에도 참여하여 초의 주장을 옹호하는 견해를 보인다. 이런 그의 견해는 선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추사는 추사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한 서예가로, 불후의 명작 <세한도>를 남겼고, 차 애호가이자 이론가로서 차에 대한 밝은 식견을 드러냈다. 추사를 평생 연구한 최완수 선생은 “일격화풍(逸格畵風)을 정착시킨 대화가이자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대학자”라고 평가했다. 추사의 학풍과 예술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꿰뚫어 본 것이라 하겠다.

 

그 겨울, 해붕과 초의를 만나다

추사는 수행 정진하는 스님과 다양하게 교유했던 대유(大儒, 학식 높은 선비)로, 초의와 나눈 우정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불 교유로 손꼽힌다. 추사와 초의는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처음 만난다. 이후 추사는 초의의 막후 후원자로 학문적인 지향과 이상을 공유했다. 초의 또한 추사가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마음을 다해 추사의 안위를 걱정하고, 차와 약재, 음식을 보내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초의의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 발문에서 초의는 추사를 만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지난 을해년(1815)에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완당이 눈길을 헤치고 찾아와 노스님과 공각의 능소생에 관해 토론하며 하룻밤을 (학림암에서) 묵고 돌아갈 적에 노스님께서 두루마리에 게를 써주었다(昔在乙亥 陪老和尙 結臘於水落山鶴林庵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之能所生 經宿臨歸 書偈於老師行軸).”

윗글에 따르면, 이들의 첫 해후는 수락산 학림암이었다. 당시 추사는 해붕 대사를 찾아와 공각(空覺)의 능소생(能所生)을 토론했다. 이 무렵 초의는 처음 상경하여 학림암에서 해붕 대사를 모시고 수행하면서 추사를 만났다. 해붕의 수행력에 깊이 감동했던 추사는 1816년경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붕 스님의 한결같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은 질박한 마음에서 생긴 정이니 끓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더구나 1826년 해붕 대사의 열반 후 제자 법운(法雲)이 추사에게 해붕 대사의 화상찬(畵像讚)을 청하자 「해붕대사영찬(海鵬大師影讚)」을 지어 불연의 소이(所以, 까닭이나 이유)를 갈무리했다. 특히 추사는 이 글에서 “해붕 대사는 눈이 가늘고 눈동자는 푸르며 재주가 많은 사람(鵬眼細而點瞳碧 財人)”이라고 했고,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요해한 최고의 수행자로 평가했다. 

해붕 대사 열반 후 추사가 쓴 「해붕대사영찬」.

 

차와 불교, 사상과 예술을 나눈 초의

학림암에서 처음 만난 추사와 초의는 서로를 흠모하고 아끼는 지기(知己)로 평생 교유하며 신의를 지켰다. 그렇게 초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선비나 그 자손)들과 교유를 폭넓게 확대할 수 있었다. 제주도 유배 시절 간난(艱難, 몹시 힘들고 고생스러움)의 어려움을 겪는 추사를 위해 차와 음식, 약재를 제공하며 추사의 안위를 보살핀 이도 초의였다. 초의는 자신과 추사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평소 공(추사)은 나와 더불어 신의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는 길에 머무르게 되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다. 산차 한 잔을 들며 밤이 새도록 속진의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 대사의 관심론(觀心論)과 혈맥론(血脈論)을 담론함에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몸에 형벌의 상처를 입었으나 매번 군은의 지중함을 칭송하고 백성들이 처하고 있는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인 것처럼 중히 여기니 참으로 군자라고 할 만하다.”

윗글은 초의가 쓴 <제주화북진도> 발문의 일부분이다. 이 글에서 초의는 추사와의 우정을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不忘相思相愛之道)”라고 했다. 실제 초의가 그린 <제주화북진도>는  추사가 무사히 제주도에 도착하기를 발원한 그림이었다. 일지암에서 하룻밤을 묵고 떠나야 하는 추사를 위해 해남 이포까지 따라가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초의는 제주도 화북진을 가보지 않은 채 상상으로 화북진을 그렸다. 초의가 그린 <제주화북진도>와 실제 제주의 화북진의 풍광이 다른 연유이다.

1815년 첫 만남 이후 간난과 기쁨을 함께했던 이들의 교유는 신분과 이념을 뛰어넘는 교유였다. 차와 불교, 사상과 예술을 통유했던 이들이 나눈 격의 없는 해학과 유머는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70여 통의 편지에 담겨 있다. 지극히 초의차를 즐겼던 추사는 초의가 만든 차의 미흡함을 신랄하게 지적하거나 다삼매(茶三昧)를 이룩한 ‘초의차’의 완성을 극찬했다. 초의차 완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인물이 추사였다. 초의차의 진미를 알아본 추사는 초의와 함께 조선 후기 차 문화를 부흥한 중심인물이다. 

<제주화북진도>. 초의가 제주로 유배 떠나는 추사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그렸다. 가보지도 않은 제주의 화북진을 그릴 정도로 추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선리는 논박했지만, 차로 교유한 스님들

추사와 불교적인 견해가 달랐던 백파도 추사와 가까이 교유한 수행승이다. 백파의 입처(立處)를 인정하지 않았던 추사의 마음은 『완당전집』 「여초의」 제11신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대(초의)가 멀리 (대둔사로) 돌아갔으리라 여겼기에 그동안 학림암에 있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교활한 백파 노승에게 얽힌 것이로군요. 이 노인은 강설이 화려하고 소초에도 익숙하며 구변이 바다를 뒤집을 만하지만 선리에 대해서는 진정 그 깊이를 모르겠습니다. (…중략…) (초의) 그대의 선은 부처에서 연원한 것이고 또 대둔사에서 연원한 것입니다. 이외에 (참고할 만한) 다른 선이 없는데, 어찌 행장을 꾸리지 않으십니까.”

윗글은 1838년경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 일부이다. 당시 초의는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상경해 학림암에 머물렀고 백파도 함께 수행하고 있었던 듯하다. 추사가 보기에는 초의의 선리에 대한 견해는 부처에게서 연원했고, 대둔사에서 연원한 것이니 선리의 연원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둔사로 돌아가기를 채근한 것이다. 이 글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백파가 시와 문장에 재주가 뛰어나고 도도하고 당당하며 경험한 것이 많아서 일일이 견줄 수가 없다’라고 백파를 평가한 것이다. 비록 추사가 백파의 선리를 비판했지만, 문장에 재주가 있음을 인정했다. 훗날 추사는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碑)’와 음기(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기록)를 쓰면서 백파를 조선의 대율사로 꼽았다.

이외에도 추사는 호의(縞衣, 1778~1868)와 철선(鐵船, 1791~1858)과도 교유했다. 완호의 제자 호의는 차를 잘 만들었던 스님이다. 이런 사실은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편지에 “질 나쁜 중국차를 마시느니 장춘차를 취하겠다(與其喫中國糠粃, 有寧取長春茶)”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장춘차는 호의가 만든 차이다. 제주 유배 시절, 호의의 장춘차가 추사에게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의에게 쓴 편지가 눈에 띈다.

초의의 제자 향훈(香薰)도 추사와 교유하며 차를 보냈다. 추사는 그 고마움을 ‘다삼매(茶三昧)’라는 글씨에 담아냈다. 차로 맺은 추사의 유불 교유에는 쌍계사 육조탑의 만허(晩虛)와 나눈 우정도 있다.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을 통해 만허가 만든 차를 맛본 추사의 감동을 편지에 담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자.

“차품은 과연 승설의 향기로운 여향이 쌍비관에서 맛본 것처럼 남습니다. 조선으로 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이와 같은 차를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남 사람이 지리산 산승에게 얻은 것인데 산승 또한 개미같이 어린 차 싹을 금탑에서 모아 만든다 하니 실제로 많이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내년 봄에 다시 차를 청한다 해도 산승은 모두 깊이 감출 것이니 (이는) 차세를 내라는 관리가 두려워 쉽게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남 사람과 산승이 좋아하고 숭상하니 (차를 구하는 일을) 도모해볼 만합니다. 그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이리저리하면 서로 기쁘게 바꾼다고 말할 겁니다.”

차 문화가 쇠락했던 당시에도 만허처럼 차를 잘 만드는 스님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국 연경의 완원(阮元, 1764~1849)이 사는 쌍비관에서 용봉승설(龍鳳勝雪) 차를 맛본 추사는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勝雪道人)이라 했다. 그런데 만허가 만든 차는 40년 전 용봉승설의 여향을 다시 일깨워준 차였다. 그러므로 만허의 차를 얻기 위해 글씨를 쓰고자 했던 추사의 발상이 참으로 진지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추사는 차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속진을 씻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차의 오묘한 이치를 몸으로 알았던 추사가 스님들과 깊이 교유한 것은 당연한 일인 셈이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이자 한국전통문화대학 겸임교수. 응송 스님에게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음으로써 초의 스님이 정립한 전통 차인 ‘초의차’의 이론과 제다법을 이어받고, ‘초의차’를 계승하는 ‘동춘차’로 한국 다도의 맥을 보존·전수하고 있다. 저서로 『초의선사의 차 문화 연구』, 『추사와 초의』, 『조선의 선비 불교를 만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