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과잉 현실에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붓다의 인생상담 | 애증(愛憎)의 애(愛)편

2021-08-10     임인구
칠불과 여러 천인 성인들과 지신들이 싯다르타의 성불을 증명하고 있다. 통도사 팔상탱 중 수하항마상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마왕 파순은 그의 모든 딸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저 석가족의 아들 곁에 가서 그의 마음에 욕정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해 보라.”

마녀들은 아버지의 칙명을 듣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보살(싯다르타)에게 여자들의 갖가지 교태와 아첨하는 추파를 부렸다. 머리카락을 가리기도 하고 혹은 드러내기도 하고, 혹은 미소를 지어 흰 이를 내보이고, 혹은 자주자주 보살을 돌아보며, 혹은 두 팔을 안고, 혹은 손으로 유방을 만지고 희롱하며, 혹은 가슴과 등을 드러내고…. 이렇게 하며 보살의 얼굴과 심정에 욕심의 자태가 있는가 없는가를 봤다. 하지만 보살의 마음은 깊고 적정하며 본래 청정하여 탁함도 없고 때도 없었다. 그들은 보살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서 모두 부끄러운 마음이 났다.

마왕 파순의 군사와 딸이 여러 가지 형상의 온갖 몸으로 이렇게 보살을 위협할 때, 보살은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파순은 더욱 화가 나서, 내심 근심을 품어 근심이 온몸에 가득 차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다. 결국, 마군의 일체 군사들과 마왕 파순 등이 모두 물러나 흩어졌다. 보살은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마군 파순의 권속들을 항복시켰다. 

여래께서 샛별이 뜰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시고 나자, 세간에는 저절로 가장 큰 광명이 빛났고, 대지는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모든 선인과 천문 보는 이들이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했다. 

“세간을 벗어나는 가장 큰 법왕(法王)이 되려는 이와 세간 법답지 못한 왕이 되려는 자가 서로 다투다 법왕이 되려는 쪽이 법답지 못한 왕이 되려는 쪽을 꺾었다. 이 일은 이미 끝났다. 곧 큰 법왕이 되어서 오래지 않아 위 없는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이다.”

__  『불본행집경』 「마포보살품」 「보살항마품」 「석여마경품」 각색

 

관계 과잉과 과잉보호

“그녀가 저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제가 믿었던 그 사람이 저를 배신했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나요.”

“우리 아이가 저를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어요.”

“바깥은 너무나 위험한 곳이니 평생 제 주머니 속에 넣고 키우고 싶어요.”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끝까지 제가 지켜낼 거예요.”

이 모든 목소리는 애(愛)의 목소리다. ‘애(愛)’라는 한자는 심장을 손으로 꼭 안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마음(心)을 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관계는 애증(愛憎)의 관계며, 애가 드러내는 관계의 양상은 바로 이 마음을 안아 지키는 일이다. 관계에서 알려지는 마음을 소중하게 유지하는 일이다. 즉, 하나의 관계란 하나의 마음을 일정한 형태로 보호하는 문제와 관련 있다.

이러한 보호의 의도가 과잉될 때, 우리는 그것을 집착이라고 부른다. 과잉보호는 그 관계가 집착의 양상을 보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시에 어떠한 대상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을 통해 알려지는 마음을 그만큼 소중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곧잘 망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우리가 실제로 소중하게 경험하는 것은 마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마음을 경험하게 해주는 대상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 대상과의 관계 자체를 보호해야 한다고 여긴다. 과잉보호의 소재가 마음에서 대상으로, 대상에서 관계로 이행되는 셈이다.

이 현실 속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은 만큼, 또 그 마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다양한 관계들에 대한 보호 의지가 강해진다. 자신이 모든 관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과중한 책무감을 느끼며, 관계들을 보호하기 위한 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럴수록 관계가 사라지면 더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갖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관계와 관계의 대상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인생에서 행복감을 경험하게 해줄 관계를 많이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된다.

이런 모습을 관계 과잉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가 결핍될까 봐 그것을 과잉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과잉되게 만들면 그것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상태와 같다. 바로 이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착이 생겨난다. 두려움의 자구책으로 행하는 관계에 대한 과잉보호는 관계 과잉을 낳는데, 관계 과잉은 집착의 본질이다. 모든 집착은 결국 관계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이 애(愛)다.

 

마음 망각과 사랑 망각

애의 문제는 이처럼 집착의 문제다. 

그래서 ‘애착(attachment)’이라고 말한다. 이 애착은 또한 망각의 문제다. 그리고 모든 망각은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망각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애는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하는 기제다. 여기에서의 사랑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행복감을 얻기 위한 우리의 능동적인 태도 및 행위를 의미한다. 

정직하게 이해해보면, 우리에게 사랑은 분명 일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애착의 대상에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사랑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며, 실패한 사랑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랑을 일로 삼는 애착’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하는 동안에는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착각’이 전제된다. 우리가 일하는 동안에는 뿌듯한 활력이 세포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일은 더욱 노골적이다. 애착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정말로 사는 것 같은 생명력을 아주 충만하게 경험한다. 마왕 파순의 딸들을 가득 안고 희롱했을 때 느끼게 되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애착은 자각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랑을 일로 삼는 애착’의 목적이 죽음을 망각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행위라는 점을 깨닫기 어렵게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을 향해 노력하는 듯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한층 어려워진다.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왜 죽음이라는 상실의 문제가 찾아오는지 마냥 억울하게만 된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을 망각한 결과다. 마음을 망각한 채, 대상에만 그리고 그 대상과의 관계에만 애착한 결과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을 애써 망각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마음의 속성이 공한 까닭이다. 마음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마음의 속성을 망각하고, 오히려 관계 속 대상의 영속을 꿈꾸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속도 꿈꾼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특정한 상태로 관계 속 대상을 보호하고 유지하려는 애착으로 우리는 자신이 영속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모든 애착의 대상을 향하여, 붓다는 땅을 가리킨 것이다. 땅에서 온 것이 땅으로 돌아갈 것을 알리며, 마음의 속성을 그대로 지시한 것이다. 사랑을 일로 삼는 애착은 결코 마음을 영속하게 할 수 없음을, 곧 우리 자신을 영속하게 할 수 없음을 그대로 전한 셈이다.

이 사실을 알아챈 애착의 주체들은 그래서 부끄러워진다. 대상을 위해서라는, 또 관계를 위해서라는 미명으로 열심히 활동해온 그 모든 행위가 실은 자기 자신의 영속을 위한 의도였다는 것이 노출된 까닭이다.

사랑이라고 말해왔지만, 단지 마음을 망각함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망각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사랑은 벌써 없었다. 

사랑은 이미 잊혔다. 마음 망각이 결과적으로 이끈 현실은 사랑 망각의 현실일 뿐이었다. 파순의 군세가 무력하게 흩어지듯이, 우리에게는 그저 공허한 허탈감만 남았다.

싯다르타가 자신을 유혹하는 젊고 예쁜 마왕의 딸들을 늙고 추하게 변화시켰다. 통도사 팔상탱 중 수하항마상 부분.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장.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해온 일이 이토록 공허하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는 낙이 없을 것이다. 다만 죽지 못해 사는 삶이 될 것이다. 허무주의의 출현이다. 그런데도 사랑은 가능할까? 우리가 정말로 이 공허감 속에서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사랑에 대한 탁월한 정의를 우리에게 전한다.

“사랑은 ‘너여 영원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너’는 어떤 이일까?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는 그 면모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너’는 바로 ‘죽어가는 모든 것’이다. 사랑은 이처럼 죽음의 반대편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죽음을 향한 것이다. 죽어가는 것을, 반드시 우리에게서 사라지게 될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라짐까지도 사랑하는 게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있었다가 없어지는 것, 바로 마음을 사랑해야 사랑이다. 이는 “이것 또한 사라질 것이다”에서 “이것은 한 번뿐인 기회다”로 전환한 감수성이다. 생멸의 현실에 대한 똑같은 묘사이지만, 후자(윤동주의 ‘서시’)는 그 현실을 사랑으로 담아내는 시선이 담겼다.

사랑은 마음을 담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적절한 표현이다. 애착(愛)은 마음[心]을 신줏단지 모시듯 안고만 있다. 반면 사랑은 마음을 과감하게 가슴 안에 담는다. 사랑은 즉, 마음을 먹는 행위다. 

우리가 관계 속 대상에서 경험한 마음을 우리의 안으로 적극 섭식함으로써, 마음과 대상 사이에는 분리가 생겨난다. 외부의 대상이 사라져도 우리는 그 마음을 잊지 않게 된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다. 사라진 그것이 우리 안에서 영원의 자리를 얻어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새롭게 기적적으로 찾은 것 같지만, 사실 원래 있던 자리다. 망각하고 있었지만, 늘 여기에서 계속 피어나고 있었고, 한 번도 잃은 적 없으며, 잃을 수도 없는 무엇이다. 관계에서 가슴으로 마음이 집을 찾아 돌아온 것과 같으며, 우리가 마음을 다시 찾은 것과 같다. 하나된 만남이 있고, 이 만남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이 안심된다.

파순의 세력이 의미하는 것은, 죽어가는 모든 것이다. 죽기 싫다고 발버둥치는 모든 것이다. 사랑하는 자, 곧 붓다가 한 일은 미소다. 괜찮다며 안심의 미소를 보내던 일이다. 이것은 일이 된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의 일이다.

자비가 마음을 망각하고 대상에 빠진 관계의 논리에 편입되었을 때 미움[憎]이 되었고, 사랑이 마음을 망각하고 대상에 빠진 관계의 논리에 편입되었을 때 애착[愛]이 되었다. 붓다는 죽어가는 것을 죽어가는 것으로, 마음을 마음으로 정확하게 또 상냥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이 관계라는 애증을 자비와 사랑이라는 원래의 것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애증으로 가득한 대상 앞에서, 그 관계의 애증을 스스로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바꾸어 미소짓고 있었음이다.

그렇게 붓다는 자비와 사랑을 다시 시작한 첫 사람이 되었다. 그 첫 사람의 첫사랑이 우리에게로 전해졌다. 2,500년 전으로부터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 건네진 붓다의 고백이다.

“괜찮다. 내가 보고 있다.”

사랑은 벌써 다시 시작되었다. 

 

임인구
마음과 시선 실존상담소 소장이자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불교 상담전공 초빙교수. 선불교의 현대적 적용으로서 상담을 꿈꾸는 불교 상담자, 실존상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