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인가, 쇼토쿠 태자의 화신불인가?

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비불에 새겨진 백제 성왕

2021-06-29     지미령

 

호류지의 비불(祕佛), 구세관음보살상

1884년, 오카쿠라 텐신과 어니스트 페넬로사는 호류지(法隆寺, 법륭사) 유메도노(夢殿)의 내부 조사 문제로 호류지의 스님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스님들은 “이 안에는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592~628) 때 조선에서 유입한 상을 안치하고 있는데 200년 전부터 열지 않았다. 만약 문을 열면 벌을 받아서 지진이 일어나고 호류지가 붕괴할 것(『동양미술사강(東洋美術史綱)』 1957)”이라며 강하게 저항했다. 텐신과 페넬로사는 오랜 기간 이들을 설득했고 결국, 성공했다. 그들이 유메도노의 문을 연 순간, 목면으로 감싼 거대한 불상과 마주했다. 구세관음보살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구세관음보살상.

구세관음보살상은 일반적으로 구세관음으로 불린다. 높이 약 179cm의 목조상으로 투각(透刻, 재료를 완전히 뚫거나 도려낸 조각 기법) 보관을 쓰고, 가슴 앞에는 왼손으로 보주를 들고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다. 구세관음은 녹나무[楠木] 한 그루로 머리부터 연육부(蓮肉部)까지 전체를 조각한 후 금박을 입힌 목조상이다. 구세관음이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얼굴 때문일 것이다. 긴 얼굴과 살구씨 모양의 눈, 큰 코, 깊게 파인 인중,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듯한 입모양(알카익 미소), 좌우대칭의 의습(衣褶, 옷의 주름), 양 갈래의 머리 등은 전체적으로 토리파(止利派) 불상 양식이다. 하지만 토리파 불상보다 과장된 알카익 미소와 주색(朱色, 선명한 빨간 주황색)으로 칠한 입술로 여타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생동감을 준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구세관음이 주는 생동감을 원시적 사실성과 주술성이 드러났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구세관음은 긴 얼굴과 살구씨 모양의 눈, 입꼬리가 치켜 올라간 듯한 모양, 선명한 주황색으로 칠한 입술이 기묘한 생동감을 준다. 

구세관음상은 언제 제작되었나

구세관음의 제작 시기에 대한 문제는 결국, 이 불상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귀착된다. 구세관음 제작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구세관음이 제작된 시기나 발원자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본 지면에서는 구세관음 제작 시기와 관련해 대표적인 몇 가지 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구세관음을 쇼토쿠 다이시(聖德太子, 이하 성덕태자)의 화신불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구세관음의 양식은 넓은 범주에서 아스카불(飛鳥佛), 토리파 불상 양식에 포함되는데, 토리파 불상제작의 전성기가 스이코 천황 시기로 성덕태자의 섭정 시기와도 겹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세관음은 성덕태자 사후(死後), 태자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그의 부인 중 한 명이 발원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구세관음이 넓은 범주의 토리파 불상이라는 점과 성덕태자의 죽음을 연관 지어 추론한 것이다.

대표적인 토리파 불상인 호류지 금당의 석가삼존상.

대표적인 토리파 불상을 꼽자면, 아스카데라(飛鳥寺, 비조사)의 아스카 대불과 호류지의 금당에 안치된 석가삼존상일 것이다. 석가삼존상의 광배 명문에는, ‘621년 12월에 성덕태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 달인 622년 1월 22일에 태자가 발병했다. 이어서 태자의 부인인 호키기미노 이라쯔메(菩岐岐美郎女)가 발병했다. 태자의 다른 부인들과 왕자, 신하들이 쾌유를 빌기 위해 태자의 등신불인 석가상을 발원했다. 하지만 다음 달 2월 21일 왕후가, 22일에 태자가 돌아가셨다’라는 기록이 전한다. 명문에는 두 명의 왕후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성덕태자와 함께 죽은 호키기미노 이라쯔메이고, 다른 한 명은 석가삼존상을 발원한 소가 우마코의 딸, 도지코노 이라쯔메(刀自古郎女)이다. 즉, 호류지 금당에 안치된 석가삼존상은 성덕태자와 그 부인의 병 완치를 기원했지만, 태자와 부인이 죽으면서 두 사람의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석가삼존상은 태자가 죽은 다음 해(623년)에 완성되었다.

『상궁성덕법왕제설(上宮聖徳法王帝説)』에는 성덕태자의 아내 4명과 자녀들이 기술되어 있다. 두 명의 왕후는 석가삼존상 광배 명문에서 확인되었고, 다른 한 명은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 중궁사본)을 제작한 이나베노 다치바나(猪名部橘) 왕후이다. 마지막 한 명은 스이코 천황의 딸인 우지노 가이다코(菟道貝鮹)이다. 당시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태자의 주변인들이 불사를 발원한 점으로 미루어, 우지노 가이다코가 구세관음을, 정확히는 관음상(『동원자재장(東院資財帳)』의 기록)을 제작해 자신이 거주하는 궁전에 안치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반면 어니스트 페넬로사가 구세관음상을 옥충주자(玉蟲廚子)와 함께 ‘6세기 조선미술의 위대한 기념물’이라고 기술한 것을 시작으로, 야나기 무네요시(柳淙悅)는 구세관음을 양식적으로도 미적으로도 조선의 작품이라고 했다(『신조(新潮)』 1922년 1월호). 이를 계기로 구세관음과 백제와의 관련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구노 다케시(久野健)는 구세관음이 성덕태자 재세 시에 등신불로 제작되었고, 북위 양식을 기반으로 해서 남량 양식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백제 조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법륭사몽전관음과 백제관음(法隆寺夢殿觀音と百濟觀音)』 1973). 나아가 구세관음의 정수리가 승형(僧形)처럼 둥근 머리로 상투가 없고, 관리의 신분을 표시하는 대(帶)를 착용한 것에 주목하여 속인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며, 백제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이 부왕인 성왕(聖王)의 모습을 연모하여 만든 존상(尊像)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김상현 1999).
구세관음의 성왕설은 『부상략기(扶桑略記)』(12세기경)와 『성예초(聖譽抄)』(1786)의 ‘백제 위덕왕이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부친 성왕을 그리워하면서 만들었다’는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중 『성예초』는 오에이(應永) 연간(1394~1427)에 저술된 호류지의 고문서를 몇백 년 뒤인 1786년에 다시 필사한 문서이다. 그 안에는 백제 성왕이 죽어서 환생한 인물이 성덕태자라는 구절도 존재해서 다소 극적인 부분이 없잖아 있다. 18세기엔 옛 사료들을 당시 감각에 맞춰 극적 요소를 첨가한 사료가 많이 등장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페넬로사가 동양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고 각국의 미술을 구별할 수 있는 변별력이 부족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페넬로사에 대한 재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구세관음의 제작 시기에 대한 다양한 설들이 제기되는 연유는 현재 당시의 사료나 정확한 명기가 발견되지 않았고, 호류지가 자료 개방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세관음을 봉안하고 있는 유메도노.
유메도노 내부. 쇼토쿠 태자상 뒤의 닫힌 문 안에 구세관음이 있다. 

구세관음 명칭과 비불화(祕佛化)

구세관음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채 신비로운 불상으로 전하게 된 데에는 성덕태자 신앙과도 관련이 있다. 한정된 지면에서 성덕태자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어 여기에서는 구세관음의 명칭과 비불화되는 과정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

761년에 성립된 『법륭사연기병자재장(法隆寺緣起并資財帳)』(일명 『동원자재장』)에는 유메도노 본존을 ‘상궁왕(성덕태자)의 등신불 관세음보살 목상으로 얇게 금박을 입혔다[上宮王等身観世音菩薩木像臺軀金薄押]’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시대에는 구세관음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으나, 유메도노의 본존이 성덕태자의 등신불이라는 이해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법륭사동원연기(法隆寺東院緣起)』(739)에는 ‘팔각형의 원당에 성덕태자 살아있었을 때 만든 구세관음상을 안치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동원연기』에는 성덕태자 ‘재세(在世)’와 ‘구세관음’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책 말미에 천평(天平) 19년(747)이라는 서명이 있어 나라시대(710~794)의 기록으로 보이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그 시대엔 구세관음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헤이안시대(794~1185) 당시에 오래된 책 여러 권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종종 첨언도 하는 문화사적 흐름을 고려하면 구세관음 명칭은 헤이안시대에 처음 불렸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덧붙이자면, 670년 호류지 화재 당시 구세관음은 화재를 피해 다른 장소에서 보관해 오다가 호류지 재건과 함께 8세기 말경 현재의 유메도노에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오오에노 지카미치(大江親通)의 『칠대사일기(七大寺日記)』(1106)에는 ‘중존(中尊, 성덕태자)의 등신불 구세관음입상을 보장(寶帳) 안에 안치했다. 들어가지 않고 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지카미치는 34년 만인 1140년에 다시 나라의 일곱 개 사원을 순례하고 쓴 『칠대사순례사기(七大寺巡礼私記)』에는 ‘상궁왕원(유메도노)은 휘장이 있어 보기가 어렵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 34년 사이에 구세관음의 비불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의 신앙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헤이안 전기의 불교는 밀교화와 신불습합으로 대변되는데, 불상 제작 역시 영목(靈木)신앙과 비밀스러운 주술적 성격을 가진다. 헤이안 시기 신앙의 형태와 구세관음의 비불화 사이의 상호관련성 또한 고민해볼 문제이다. 

그런데 지카미치는 『칠대사순례사기』에 고로전(古老傳)을 인용해, ‘옛날 이 절이 황폐했을 때, 대승도인 교신이 수리했다. 휘장 안에 있는 상을 보니, 불상이 아니라 속인(俗人)의 등신상이었다. 관대를 하고 왼손에 보주를 들고 오른손으로 감쌌다. 생각해보건대 모습이 속인으로 보인다. 인(印)을 보니 구세관음이었다. 바로 성덕태자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지카미치가 속인과 형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이후, 구세관음을 속인의 모습으로 소개한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교신은 호류지 재건과 유메도노 건립에 관여한 스님으로, 위의 인용 구절에 대해 교신이 성덕태자를 구세관음의 화신불로 신앙화시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태자가 구세관음의 화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모습을 가져야 하고, 동시에 구세관음으로 변할 수 있는 증표가 있어야 한다. 이 증표를 인으로 본 것이다. 즉, 고로전은 화신불로서의 성덕태자 신앙이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누가 보아도 불상의 모습을 속인의 모습으로 주장하기 위해서 비불화가 진행되었다는 견해는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구세관음은 명성보다 그간 잘 다루지 않은 영역이었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불로 잘 공개되지 않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 흥미로운 불상을 이해하기 위한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글·사진. 지미령

 

지미령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구교수. 일본 교토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미술사를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인천대, 동국대 등에 출강했다. 일본 미술을 독특한 시각으로 연구하며, 아시아의 불교미술 교류에 관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