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일본에 불법승佛法僧 삼보의 씨앗 심다

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백제승이 서쪽에서 온 까닭은

2021-06-29     백미선
법륭사(法隆寺, 호류지) 대보장원에 있는 일본 국보 ‘백제관음’.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와 우아한 얼굴이 신비로운 인상을 준다. 지미령 제공.

백제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538), 처음으로 왜(倭)에 불교를 전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원흥사가람연기병류기자재장(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에는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상(佛像)과 불경(佛經), 불기(佛器) 등을 전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제 백제와 왜는 정치적 교류를 넘어서, 불교를 중심으로 더 폭넓게 교류했다.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대 수용된 이후, 무령왕과 성왕대에 이르러 크게 성숙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불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일찍 일본에 불교를 전했고, 일본의 초기 불교에 백제 불교는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목조 건축·사리신앙 싣고 일본으로

성왕의 아들 위덕왕대(554~598)에 백제와 일본의 불교 교류는 더욱 활발해진다. 일본에서는 불교수용을 두고 숭불파(崇佛派)와 반불파(反佛派) 간의 대립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일본의 숭준천황(崇峻天皇) 원년(588) 숭불파인 소아마자(蘇我馬子)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불교가 안정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아마자는 법흥사(法興寺)를 발원하고, 백제 스님과 공인들의 도움으로 법흥사를 조성했다. 법흥사는 아스카데라, 즉 비조사(飛鳥寺)의 전신이다. 

백제는 위덕왕 35년(588) 일본에 사신과 스님들을 보내고 불사리(佛舍利)를 전해주었다. 아울러, 불교 사찰의 목조 건축을 담당하는 전문 기술자인 사공(寺工), 불탑의 상부를 제작하는 노반박사(鑪盤博士), 기와전문가인 와박사(瓦博士) 그리고 화공(畵工)을 보냈다. 백제의 스님과 공인들은 사찰 건립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통해 법흥사의 창건을 주도했다. 

일본의 추고천황(推古天皇) 원년(593)에는 불사리를 법흥사의 탑 기둥 주춧돌 안에 안치했다. 이때 안치된 불사리는 앞서 백제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백제에서는 사비 도읍기에 사리를 봉안하는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명문을 통해서 567년 백제 위덕왕의 누이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부여 왕흥사지 청동제 사리함 명문에서는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리를 봉안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법흥사의 불사리 안치는 백제에서 들여온 불사리가 백제의 사리 신앙에 영향을 받아 이뤄진 것이다. 이는 『부상략기(扶桑略記)』에서 불사리를 안치하는 의례에 소아마자와 백제인들이 모두 백제복을 입고 참여했다는 내용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위덕왕 42년(595)에는 혜총(慧聰) 스님이 일본에 파견되어 법흥사에 머물기 시작했다. 법흥사에는 백제의 혜총과 함께 고구려의 혜자(慧慈) 스님도 함께 머물렀고, 법흥사는 삼국의 불교를 담아내는 도량의 역할을 했다. 백제에서 새롭게 혜총이 파견된 것은 당시 일본에서 법흥사를 중심으로 불사가 확대되고 있었던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추고천황 2년(594) 천황은 황태자인 성덕태자(쇼토쿠 태자)와 대신 소아마자에게 명하여 삼보(三寶)를 일으켜 융성하게 했고, 이때 여러 신하가 천황과 어버이의 은혜를 갚기 위해 다투어 불사(佛舍)를 지었는데, 이를 사(寺)라고 한다고 전한다. 실제 이 시기 법흥사 이외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시텐노지)와 반구사(班鳩寺)가 창건된 사실이 확인된다. 반구사는 훗날 법륭사(法隆寺, 호류지)다. 그리고 추고천황 14년(605) 법흥사에는 장육불상(丈六佛像)이 조성·안치된다. 

이러한 불사 활동의 중심에는 혜총을 비롯한 백제 스님들과 기술자들이 있었다. 법흥사 조성에 참여했던 스님들과 기술자들은 사천왕사와 반구사 등 사찰 조성에도 관여한 흔적이 확인된다. 사천왕사는 추고천황 원년(593)에 성덕태자의 발원으로 나니와(難波)의 아라하카(荒陵)에 세워졌다. 이 사찰의 가람은 ‘중문-탑-금당-강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했는데, 이 같은 가람 배치는 부여와 익산 등의 백제 사찰과 일치한다. 반구사 역시 성덕태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로, 나라현(奈良)에 위치한다. 금당에 모셔진 금동약사여래좌상이 그 광배 명문을 통해 607년에 조성된 것이 확인되므로, 반구사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다. 법륭사의 몽전(夢殿, 유메도노)에는 구세관음보살입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 모습이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과 닮아있다. 그리고 추고천황 14년(605)에는 법흥사 장육불상의 공동 발원과 조성이 이뤄졌다. 장육불상을 조성한 기술자 쿠차츠쿠리노도리(安作鳥)는 5세기 후반 도래한 백제계 씨족으로, 장육불상은 백제 불상의 조성 기술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관음상, 지미령 제공.

일본 불교의 승보에 계를 전하다

  혜총을 비롯한 백제 스님들은 비단 사찰 조성뿐 아니라, 그 사찰을 움직이는 사람에 대한 양성과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일본에는 아직 정식 스님이 없었던 까닭에 계(戒)를 받기 위해서는 백제로 가거나 혹은 백제 스님을 초청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원형석서(元亨釋書)』에 따르면, 혜총은 계학(戒學)을 체득했기에 소아마자가 계법 받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여기서 백제에서 온 혜총의 중요한 임무가 바로 스님 양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754년 동대사(東大寺)에 임시로 계단(戒壇)이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법흥사에서 수계가 이뤄졌다. 혜총은 스님 양성을 담당하는 한편 일본의 유력 황족과 호족 또는 그 자제에게 불교를 비롯한 선진 사상과 문화를 교육하는 일도 담당했다. 혜총이 성덕태자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혜총 등에 의해 법흥사에서 이루어진 스님 양성과 지배층에 대한 교육은 추고천황 16년(608) 수나라에 학문승과 학생을 보내는 성과를 거둔다. 이때 주목되는 스님이 관륵(觀勒)이다. 관륵은 백제 무왕 2년(602)에 일본으로 파견됐는데, 그는 역본 및 천문지리서와 둔갑방술 등 다방면에 능통한 스님이었다. 이후 관륵은 일본에서 최초로 승정(僧正)에 오른다(추고천황 32년, 624). 관륵은 법흥사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지식을 전했다. 관륵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백제 스님에 의한 교육 분야가 더욱 다양해진 것이다. 즉, 백제 스님들이 불교를 매개로 문화교류의 폭을 점차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그 장소가 법흥사라는 점이다. 법흥사가 스님을 비롯한 다양한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한 장소가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608년 일본에 온 수나라 사신 배세청(裵世淸)은 법흥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혜총과 관륵의 활동은 동아시아 불교사에 처음으로 일본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삼보(三寶)를 일으켜 앞다퉈 불사가 이뤄졌을때 반구사(班鳩寺)도 창건됐다. 반구사는 훗날 법륭사(法隆寺, 호류지)이며, 오중탑(五重塔)과 금당(金堂)이 중심인 서원(西院)과 몽전(夢殿, 유메도노)이 중심인 동원(東院)으로 나뉘어있다. 

삼론, 성실론, 법화사상도 전파

그렇다면 백제 스님들은 일본에 어떤 불교 사상을 전했을까.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通緣起)』에 따르면, 일본에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 세 가지 경전의 삼론종과 성실종이 동시에 전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 스님 혜총과 관륵 등은 모두 삼론종에 능통했으며, 성실에 통달했다고 전한다. 이미 혜총과 관륵 이전에 일본에 파견됐던 스님 담혜(曇慧)와 도심(道深) 역시 삼론(중론·십이문론·백론)과 『성실론』을 함께 연구했다고 하므로, 이전부터 백제에서는 이런 연구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길장(吉藏, 549~623)이 등장하기 이전에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삼론과 『성실론』을 함께 연구하는 풍토가 있었는데, 이때 백제에 삼론과 『성실론』이 함께 전해진 듯하다. 그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백제 불교가 양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백제 성왕이 양나라 무제와 활발히 교류할 당시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성덕태자도 양나라 광택사 법운의 뜻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어서, 백제 스님들을 통해 양나라의 삼론과 『성실론』이 전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백제에서는 삼론과 『성실론』이 『법화경』과 함께 수행되고 있었다. 양나라로부터 삼론과 『성실론』을 받아들였을 당시, 이미 백제에서는 『법화경』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대 불교의 특징은 『법화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져 법화사상으로까지 대두된 점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삼론과 『성실론』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위덕왕대 불교 수학의 경향을 고려할 때, 혜총 역시 『법화경』을 수학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혜총이 일본에서 활동한 시기에 백제가 일본에 전한 불교 문물은 불사리 및 구세관음상 등 『법화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특히 7세기 전반 비조 불교의 성과로서 찬술된 『삼경소』가 주목된다. 『삼경소』는 『법화경』, 『승만경』, 『유마경』 등 경전에 대한 의소(義疏, 문자나 문장의 뜻과 내용을 풀이함)인데, 이 가운데 『법화경』에 관한 『법화의소』는 혜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삼경소』에는 고구려 스님 혜자와 백제 스님 혜총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에서도 백제가 법화사상 관련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백제 성왕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538) 처음 일본에 불교를 전한 이후, 백제 불교는 6~7세기에 걸친 일본의 초기 불교 성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백제 멸망기 대규모의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한번 백제 불교가 일본 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차지한다. 『일본서기』와 『원형석서』 그리고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등에서는 일본으로 간 백제 스님 각종(覺從), 의각(義覺), 홍제(弘濟) 등의 모습이 확인된다. 이 시기 백제 스님들은 수행에 집중하며, 불교를 통한 교화 자체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6~7세기에 일본으로 간 스님들이 천황 및 지배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불교와 정치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과는 달리, 지방 불교의 확산에 많은 힘을 기울이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백미선
충남대 국사학과 시간강사. 충남대에서 한국 고대사를 전공했고 「사비시대 백제의 대왜 불교교류와 혜총」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웅진시대 백제의 지방관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주제로 백제사를 연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