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미륵의 삼회설법을 준비하다

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대지에 잠든 불국정토의 꿈

2021-06-29     이병호
왕흥사지 와편.

백제에서 불교를 처음 수용한 것은 384년 침류왕 때 일이지만 불교의 비중이 커지고 사찰이 본격적으로 조영(造營, 집 따위를 지음)된 것은 성왕(재위 523~554년) 치세 때부터이다.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를 단행한 다음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중국의 역사책인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이를 “스님과 비구니, 사원과 불탑이 매우 많다[僧尼寺塔甚多]”고 표현했는데 부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는 20여 개소에 달하는 백제 절터가 확인되기도 했다. 부여 정림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는 1,300여 년을 버텨 온 백제 때 만든 석탑이 지금도 당당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는 성왕이 마련한 불교 치국책을 토대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확립했고, 이를 다시 주변의 신라나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동아시아 불교 문화의 확산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함으로써 대다수 사찰이 불타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최근 부여와 익산 지역 절터에 관한 발굴 조사가 활발하게 실시되면서 찬란했던 백제 불교의 진면목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사비 천도 직후 새로운 도성의 랜드마크였던 정림사지는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지고 주위를 회랑으로 감싼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다. 정림사지 발굴 모습,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도성의 한복판을 차지한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곳으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자리한다. 지금도 백제 때 만든 5층 석탑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1층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자신의 전승기념문을 적은 명문이 남아 있다. 그로 인해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린 적도 있지만 고려시대 기와에 ‘정림사’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지금은 정림사지로 불리고 있다. 

정림사지는 3차례의 발굴 조사로 남에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지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감싸는 소위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곳에서는 백제 연화문수막새가 다량 수습되고 고려시대 이후에 속하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법등이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으로는 납석제삼존불이 있는데 그 조각 양식이 백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대·중·소형의 소조상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일부 두상편에는 녹유(녹색 유약으로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짐)를 바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소조상들은 창건기 목탑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림사지는 사비 천도 직후에 새로운 도성의 랜드마크로 세워졌으며, 성왕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로 생각된다. 

정림사지의 창건 시기나 목탑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백제 멸망기에 당나라의 전승기념문이 5층 석탑에 새겨진 것은 이 사찰이 백제 당시에 매우 중요했음을 방증한다. 정림사지에서 확인된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는 부여와 익산의 백제 절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될 뿐 아니라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에서도 동일한 모습이 확인되어, 정림사지가 일본 고대 사찰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백제 멸망기에 당나라의 전승기념문이 새겨진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정림사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사진 유동영.

 

누인 채로 발견된 석조사리감, 국립부여박물관.

왕릉 곁을 지킨 절 능산리사지

정림사지가 성왕과 관련된 절터라면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는 위덕왕과 관련된다. 능산리사지는 사비 시기의 왕릉군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에 연접해 있다. 이 절터 역시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한 가람 배치를 보인다. 목탑지 한가운데 비스듬하게 누인 채로 발견된 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은 “백제 창왕 13년(567)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554년에 죽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원찰임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서회랑 북쪽 공방지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뚜껑과 몸체, 받침으로 구성되는데 받침의 용은 승천할 태세로 꿈틀거리며 입을 크게 벌린 채 한쪽 발을 치켜들고 있다. 몸체는 3층의 연꽃잎을 중첩시키고, 뚜껑에는 74곳의 봉우리와 식물, 바위 등이 배치되고 다양한 상상 속 동물과 인물이 신선 세계처럼 연출되어 있다. 

윗부분은 다섯 명의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악사의 옆에는 다섯 마리의 새가 앉아 있고, 가장 상단에는 봉황이 배치되었다. 봉황은 턱 아래 여의주를 낀 채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서 있다. 금동대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백제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백제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도교와 불교사상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능산리사지는 고분과 사찰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중국이나 고구려의 사찰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발굴 결과 유구의 잔존 상태가 양호하고 다양한 종류의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동아시아의 고고학이나 미술사, 건축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금동대향로와 창왕명 석조사리감은 백제의 사상이나 조형 예술, 금속공예 기술을 재인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현재 부여 롯데리조트 옆 백제문화단지에는 능산리사지 발굴 조사 내용을 토대로 백제 사찰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 체험할 수 있도록 했으니 함께 참고하면 좋다. 

 

왕흥사지 출토 사리용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죽은 왕자를 기리다

왕흥사지는 부소산 서북쪽 낙화암과 고란사, 백마강 등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드무재산 자락에 위치한다. 이 절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법왕 2년(600)에 창건하여 무왕 4년(634)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근의 연차적인 발굴 조사로 목탑과 금당, 강당이 확인되었다. 

이곳 목탑지에서는 청동, 은, 금으로 만들어진 사리용기가 발견되었다. 청동제사리호는 원통형으로 보주형 꼭지가 달린 뚜껑이 있다. 그 바깥쪽에는 “577년 2월 15일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이곳에 사리를 공양하고 사찰을 건립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심초석의 주변에서는 8,000점이 넘는 사리공양구가 발견되었는데, 사리공양 의례에 참석했던 왕족과 귀족들이 공양한 물건으로 보인다. 왕흥사지에서 발견된 사리공양구들은 무령왕릉이나 능산리고분군 등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매우 유사하다. 이것은 목탑이 본래 석가의 무덤이기 때문에 사리를 봉안할 때 고분의 부장품과 같이 장신구들을 공양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왕흥사지는 그보다 10년 뒤에 건립된 일본 최초의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와 비교할 때도 중요한 곳이다. 두 사찰은 심초석의 안치 방식이나 사리공양품의 양상뿐 아니라 창건기 기와의 조합 양상 등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도 왕흥사지가 아스카데라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능산리고분군에 연접한 절터인 능산리사지. 역시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백제 가람 배치를 보인다. 죽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건립한 원찰로 추정된다. 사진 유동영.

미륵의 출현을 기다리다

미륵사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에 위치하는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이 왕비의 청을 받아들여 축조한 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미륵사지 발굴 결과 중앙에 목탑과 중금당을 두고, 그 동서쪽에 석탑과 동서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 가람 배치라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평가받는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 건축의 자재를 돌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외형을 하고 있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십자형 통로가 있고 한가운데 심주석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1월, 이 심주석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에는 금제 사리봉영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공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사리봉영기에는 639년 백제 왕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사찰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선화공주가 미륵사 건립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라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에 대해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백제의 독특한 사리 안치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고, 금제소형판과 금제구슬, 은제관식, 수정·진주·유리·마노·호박 등 장신구, 다양한 형태의 청동합 등 공반 자료들은 백제의 우수한 공예 문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유리구슬이다. 미륵사지 내부 공방지에서는 많은 유리 파편과 유리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도가니가 함께 발견되어 사찰 자체에서 유리를 생산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미륵사는 미륵의 출현을 기원하는 한편 미륵이 출현했을 때 정법을 펼칠 수 있도록 준비된 도량이고, 동시에 미륵과 미륵 성불의 본질에 대해 수행하고 깨닫기 위한 공간으로 창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륵사의 3원은 미래에 미륵이 출현하였을 때의 삼회(三會) 설법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고, 하나의 강당은 현재 이곳에 머무는 수행자들이 미륵불과 성불의 본질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백제의 불교 사찰에는 다양한 계통의 문화가 공존하며, 당시 가장 선진적인 문화가 반영된 국제성이 있다. 부여 정림사지나 능산리사지, 왕흥사지, 익산 미륵사지 등 백제 사찰에서 발견된 출토품과 유구들에는 백제적인 문화 특성과 외부에서 들어 온 새로운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신속하게 입수하여 독자적이고 세련된 자국의 문화를 구현해 내는 능력이야말로 백제 사찰, 나아가 백제 문화 전반의 가장 큰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백제는 그 과정에서 불교나 사찰 조영 기술을 매개로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임으로써 현실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백제의 대외 교류에서 불교가 가진 구체적인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 사람들의 정취가 담긴 부여 정림사지나 20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손으로 직접 보수 공사를 마친 익산 미륵사지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부소산 서쪽 낙화암과 고란사, 백마강 등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드무재산 자락에 왕흥사지. (사진 왼쪽 아래)가 있다.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리를 공양하고 건립한 절이 왕흥사였다. 사진 유동영.

 

이병호
공주교육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국립중앙박물관 미륵사지전시관장·전시과장·미래전략담당관 등을 지냈다. 백제의 사원과 도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고, 저서로는 『백제 불교 사원의 성립과 전개』, 『내가 사랑한 백제』, 『백제 왕도 익산, 그 미완의 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