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퀴즈’가 말한 ‘문서의 신’의 글쓰기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2021-06-23     백승권

아버지의 죽음, 조용한 아이

필자는 사춘기 때부터 숫기가 없고 말수가 적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는 가급적 피했고 피할 수 없으면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구석 자리를 지켰다. 눈을 내리깔고 입을 굳게 닫은 채. 어른들은 진중하고 침착하다고 칭찬했지만 필자는 어떤 투명한 막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그러나 막을 찢을 엄두 따위는 내지 못했다.

중학교 때 시내버스를 탔는데 필자가 앉은 자리 옆에 두 명의 여학생이 서게 됐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들은 필자를 두고 가볍게 놀려대는 말을 조잘거렸다. 필자는 그것이 전혀 무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내려야 할 정거장을 한참 지나쳐 두 여학생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에야 하차했다.

원래부터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개구지고 사고도 많이 쳤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이면 그 앞에 나서 텔레비전 코미디와 쇼 프로그램을 흉내 내며 나름의 ‘원맨쇼’를 펼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갔다. 이미 기울어버린 가세가 아버지의 사망으로 버팀목이 무너지면서 바닥으로 주저앉아버렸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어머니는 일자리를 찾아 동생을 데리고 부산으로 이주했고 필자 혼자 고향 괴산에 남아 하숙생이 됐다.

한두 해 사이 필자의 삶은 주상절리처럼 급전직하했다. 하숙비가 몇 달씩 밀리고 주인집 아줌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아침마다 눈칫밥을 먹었다. 방과 후나 휴일엔 하숙방에 잠자코 머물기 어려웠다. 혼자 강으로 저수지로 낚시하러 다녔다. 한밤중 잠을 자다 깨어 어둠 속에서 한참 울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헤어졌던 가족이 다시 시골집에 모여 살게 됐다. 어머니가 부산에서 마땅한 밥벌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골에선 몸만 바지런히 움직이면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논으로 밭으로 일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필자는 몸이 약하고 천성이 게을러 학교를 마치고 나면 주로 집 울타리 안을 맴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시가 쓰고 싶어졌다

글쓰기는 이렇게 답답한 바보를 구해주기 위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불현듯 찾아왔다. 진종일 시골집 툇마루에서 눕거니 앉거니 심심해서 몸이 배배 꼬이는 저녁때, 머릿속에 환한 불이 켜졌다. 아니, 그건 섬광에 가까웠다 할 수 있다.

시가 쓰고 싶어졌다. 해질녘 풍경을 그린 시 한 편이 통째로 머리에 떠올랐다. 허겁지겁 종이를 찾았다. 쓰다만 일기장 뒤편을 펴고 단숨에, 일필휘지로 시 한 편을 썼다. 그날 이후 매일같이 시를 썼다. 어느 날은 두세 편을 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시를 쓴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청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뒤에도 시 쓰기는 계속됐다. 달라진 점은 누군가에게 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벽(壁)’이란 이름을 가진 문학회에 들어갔다. 시를 발표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들었다. 필자도 다른 사람의 시에 대해 느낌과 의견을 말했다. 1년에 한 번 청주 상당공원 학생회관 전시실에서 시화전을 개최했다. 가끔 여학생들이 시를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해오기도 했다.

대학 입학 후 신입생 대상 백일장이 열렸다. 신경림 시인이 심사위원이었다. ‘강’이란 시를 써서 장원이 됐다. 대학생 대상 문학상 공모에 시를 투고했다. 여러 곳에서 당선이 됐다. 문인 선배들이 문예지나 신춘문예 데뷔를 준비하라는 이야기를 했다. 필자의 삶은 영락없이 시인으로 귀착되는 것 같았다.

1986년이 됐다. 시 쓰기는 제 꼬리를 물고 뱅뱅 돌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휴학한 뒤 단기사병으로 입대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을 겪으며 ‘거리의 운동권’이 됐다. 부천에서 야학교사를 했다. 사회과학 학습 모임에 들어가 “세계철학사”를 공부했다. 복학했지만 잠시 학교에 머물렀다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기 위해 문학을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시를 쓰지 않았고 책을 읽지 않았다. 시를 쓰거나 책을 읽는 꿈을 꾸면 ‘한심한 먹물’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부끄러워했다.

 

문학 글쓰기에서 실용 글쓰기로

동구권 사회주의 정부가 무너지고, 1992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됐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복학했지만 학교에는 마음이 없었고 구로공단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겨우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나자 밥벌이를 책임져야 할 위치가 됐다. 선배의 소개로 언론사 시험을 쳤다. 오로지 논술과 면접만으로 신입 기자를 뽑는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 가까스로 합격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버렸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대책 없는 젊은이의 생계를 열어주는 수단이 됐다. 맹렬하게 취재하고 신랄하게 글을 쓰는 기자가 됐다. 언론계, 재계, 정계 인사 등 세상을 움직이는 주류들을 만나면서 구로공단의 삶이 얼마나 ‘협소한 시야’에 갇힌 것인지 깨닫게 됐다.

기자로서 괜찮은 실적과 평판을 만들어나갔다. 그 덕분에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행정관으로 발탁돼 대통령 메시지 쓰는 일을 맡게 됐다. 기자 시절 못지않게 많은 글을 썼다. 거기에 더해 내각의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 비서관의 글을 리라이팅 하는 업무도 맡았다. 필자의 글쓰기는 문학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신문 기자, 청와대 행정관으로 이어지면서 전혀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게 됐다. 필자의 문학 글쓰기가 존재론적 세계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었다면, 실용 글쓰기는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향해 계속 확장되는 그 무엇이었다.

돌이켜보면 두 글쓰기 세계를 경험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실용 글쓰기를 해 보니 문학 글쓰기가 더 잘 보였다. 문학 글쓰기 경험이 있다 보니 실용 글쓰기가 더 깊게 보였다. 두 세계를 넘나들며 글쓰기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가수 서태지를 인터뷰했던 기자 시절의 모습. 출처 백승권 SNS.

글쓰기에서 말하기로

6월 23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프로그램에 ‘문서의 신(神)’으로 출연했다. 라디오 방송은 여러 번 나가 봤지만 TV 프로그램은 첫 출연이었다.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유퀴즈’는 최근 시청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필자는 청와대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직장 내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보고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메일과 시말서 작성법도 설명했다. 보고서 등 업무용 글쓰기 요령이 예능 프로그램의 테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두 개그맨 출신 진행자의 재치로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주제가 말랑말랑하게 전달됐다.

필자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들은 TV에 비친 필자의 모습에 낯설어한다. 낯설어하는 것으로 치자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제일 으뜸일 것이다. 어린 시절 숫기 없고 말수 적었던 필자가 인기 개그맨 사이에서 천연덕스럽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농담까지 척척 받아내니 말이다. 사실 필자에게 이런 기회가 온 것은 10년 넘게 실용 글쓰기 전문강사로 쌓아온 이력과 명성 때문이다. 10년 동안 강의를 하면 그 분야에 들여다보지 않은 이슈가 없고 설명해 보지 않은 테마가 없게 된다. 무슨 질문이 들어와도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경지가 된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문서의 신(神)’ 게스트로 출연한 모습. 출처 tvN.

방송을 마치고 여러 가지 감회가 들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글쓰기는 아마도 필자의 답답한 삶을 어떻게든 이겨내기 위한 자구책으로 갑자기 찾아왔을 것이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글쓰기는 필자의 삶을 세상 밖으로 나아가게 했고 세상과 만나게 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을 넘어 누군가에게 글쓰기를 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TV 예능까지 출연하게 됐다.

40년 넘게 글을 쓰다 보니 여기에 다다랐다. 글쓰기는 앞으로 필자를 어디로 또 데려다 놓을까? 그저 순명(順命)할 따름이다.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