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유산 연등회] 트랜스포머 is 등燈

“곳곳에 은빛 꽃이 화려하네”

2021-05-27     이윤수
끝에 등을 매단 기둥인 등간(燈竿). 연등회보존위원회는 전통을 복원하고자 등간에 전통등을 매달아 전시하기도 했다. 

“술 담긴 호리병은 마실 수 있을 듯, 
팔랑이는 부채엔 산들바람 불어올 듯, 
수박 사려! 외침 소리 항상 크게 나오고, 
자그맣게 따라가는 마늘은 이름 그대로일세. 
은거위는 목을 빼고 날개깃을 자랑하며, 
비단잉어 비늘 번뜩이며 지느러미를 치네,
겹겹이 등을 건 불나무 참으로 장관이니, 
곳곳에 은빛 꽃이 여기저기 화려하네.”

18세기의 문인 윤기가 노래한 관등 시의 일부다. 짧은 몇 줄만으로 호리병등, 부채등, 수박등, 마늘등, 거위등, 잉어등이 나무 위에 겹겹이 걸려 눈부시게 빛나는 연등회 풍광이 떠오른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 시대에도 연등회는 이렇듯 흥성한 등 축제의 현장이었다. 

연등(燃燈)이란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등불을 밝히는 것은 탐진치 삼독에 젖은 자신의 무명(無明)을 지혜로 밝힌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히는 축제라 해서 옛사람들은 연등회를 ‘등석절(燈夕節)’ 혹은 ‘등석’이라 불렀다. 등을 정성스레 만들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켜며 마음을 밝히고, 밝혀놓은 등불의 장관을 보고 즐기는 날이라서 ‘관등절(觀燈節)’이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은 1,300여 년의 연등회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축제의 우리식 이름인 ‘놀이’를 붙여 불렀다. 관등놀이·등놀이·연등놀이·등석놀이·파일놀이 모두 연등회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기기묘묘하게 등 만든 역사 속 장인들

고려 시대의 연등회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그래서 연등회를 주관하는 부서로 연등도감(燃燈都監)을 두었다. 연등회 관련 행사의 모든 임무를 수행한 곳이다. 연등도감은 충선왕 대에 선공사(繕工司)에 병합되었다.

조선이 건국하면서 조정에는 연등회 폐지를 청하는 유학자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연등회는 나라 안의 대표 명절이라 궁궐에서도 연등회는 이어졌다. 궁궐 연등회의 ‘등’은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에서 담당했다. 태종 12년에는 등 만드는 장인(匠人)이 기기묘묘한 솜씨로 500여 개의 등을 만들었고, 태종은 장인 26명에게 쌀 한 석씩을 하사했다. 

연산군은 사약 황소로, 공효련에게 명하여 다양한 등을 달게 했다. 사약은 내시부(內侍府) 액정서(掖庭署)에 딸린 벼슬로 궁궐의 열쇠를 맡는 직책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해본 결과 황소로와 공효련은 모두 등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이후 “기이한 기술과 부정한 기교로 연산군에게 영합한 인물”이라는 죄목으로 잡혔다가 사면받은 명단에 이들의 이름이 발견된다. 등 장인이 지닌 기이한 기술이란, 등을 만드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광해군일기』에는 화장(花匠) 김충익(金忠翼)이 등장한다. 그가 꽃등[花燈] 만드는 일에 동원돼 분주하다 보니 대례를 앞두고 지화 만드는 데에 참석하지 못하자 독촉했다는 한 줄이 실록에 전한다. 조화 장엄과 등 만들기에 있어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던 것 같다. 지화를 만드는 장인이 등 만들기의 장인을 겸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고종 때의 행사를 기록한 『진연의궤』에는 김인준(金仁俊), 김영천(金永天), 두 화장의 이름이 전한다. 화장 김인준 등 10명에게 각 목 1필, 포 1필을 시상하였고, 화장 김영천 등 2명은 각 목 1필씩을 받았다. 

옛 등은 남아 전하지 않는다. 해마다 재활용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불교 의례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행사를 마치면 소지(燒紙)하는 것이 관례였던 탓도 있다. 비록 이름이 남아 전하지 않더라도 분명 등 만들기에 기기묘묘한 솜씨를 발휘했을 역사 속 ‘등’ 장인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예를 올린다. 

1996년에 비로소 연등회의 상설기구인 연등회보존위원회(당시 봉축기획단)가 발족한다. 이때부터 축제다운 축제로의 변화가 시도되었다. 행렬 구간이 여의도 광장에서 동대문 운동장으로 변모한 것 외에도 동자승 캐릭터를 등장시켜 친근감 넘치는 연등회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 참여자들의 신명을 끌어내는 일에 주력했다. 

 

어떤 등들이 만들어졌을까?

고려 시대에는 보름 연등회와 4월 초파일 연등회, 팔관회, 특설연등회까지 설행되면서 등 문화가 풍요로웠다. 왕의 행차 때면 거리에 “5색 비단으로 감은 시렁대를 즐비하게 세워 빗살처럼 겹겹이 잇게 하고, 가마가 통과하는 큰길 좌우에는 등산과 화수를 만들게 하니 대낮과 같이 밝았다”라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등산은 산대 위나 누대 위에 만든 산에 등을 달아 놓은 것을 말한다. 반면 나무에 등과 장식을 매단 것을 불나무, 즉 화수라고 한다. 충렬왕비가 연 특설연등회에선 “구슬과 옥으로 등롱을 만들었는데 교묘하고 사치스럽고 화려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신돈이 마련한 4월 초파일의 연등은 “100만을 헤아리고 그 모양이 기이하고 교묘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이처럼 다종다양한 등 축제와 함께 기기묘묘한 등을 만드는 문화가 꽃을 피운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면 등 문화는 만개한다.
태종 시절 용과 봉황, 호랑이와 표범 모양의 등 500개가 궁궐에 걸린 데 이어, 성종 6년 4월 초파일에는 “장대를 많이 세우고 수십 개의 연등을 이어 다는데 새・짐승・물고기・용의 형상으로 등을 만들어(『성종실록』)” 놓았다. 연산군이 1506년에 경복궁 만세산 아래에 달아 놓은 등은 “청란등, 자봉등, 연꽃등, 모란등, 고소대등, 봉래산등, 금오등, 옥토등, 은즉등, 황룡등”이다. 홍대용이 1775년 4월 초파일 궁궐에서 본 등은 “양각등, 옥등, 비단등, 유리등, 진주등, 난간등”이었다. 종이등인 난간등을 제외하면 모두 뿔, 옥, 비단, 유리, 진주와 같은 재질이 다른 등들이다. 인원왕후 김 씨는 진주등을 손수 만들기도 했다. 

19세기 유만공은 『세시풍요』에서 “황금빛 푸른빛의 비단등”을 위시해 거위알등, 잉어등, 바가지등, 마늘등, 항아리등, 방울등, 큰북등이 마을에 어떻게 걸려있는지를 노래했다. 1811년 대마도로 사행(私行, 개인적인 여행) 간 무신 유상필의 일기에는 관등절을 앞두고 336명이 등을 만든 사연이 기록돼 있다. “정사가 황밀 10근을 주면서 매등에 5돈쭝씩의 초를 만들게 하고, 일본 종이를 얻어 등에 바르도록 했는데 상방은 정자(正字)등을, 부방은 아자(亞字)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정자등과 아자등은 낯선 등 이름이다. 19세기 초반에 통신사로 타국에 간 일행 336명이 연등회를 이틀 앞두고 ‘예년과 다름없이’ 등을 빚고 초까지 만든 것이다. 초입에 소개한 윤기의 시 관등부에서는 ‘모두 밀랍 촛불로 기름을 대신’한다고도 했다. 조선의 세시풍속을 집대성한 『동국세시기』에는 “수박등・마늘등・연꽃등・칠성등”을 비롯해 33개의 등이 등장한다. 규방가사 「관등가」에는 겹치는 등의 이름 22개가 거명된다. 등은 그 시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석류등과 수박등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다. 호랑이등이나 표범등은 나쁜 기운을 떨쳐버리는 바람이 담겨있다. 잉어등·용등은 학업성취와 입신양명을 위해, 학등이나 거북등은 건강과 장수의 기원이 담겼다. 이렇듯 ‘등’은 늘 그 시대의 염원을 담는 기구였다. 민속학자 송석하는 일제강점기, 개성 연등회에 등장하는 ‘등’ 이름을 29개로 소개하고 있다. 이 등들도 100여 년 전 『동국세시기』의 등 이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도 등을 만들고 등에 불을 켜며 즐기는 문화는 변함없었다. 

근대의 연등회 등 풍경은 1938년 4월 8일 자 「조선일보」 기사로 살필 수 있다.

“경성이나 개성 같은 도시에서는 등을 만들되 비단[紗]이나 종이로써 형형색색이 기묘를 다하였다. 가가호호 자기 집에만 달 뿐이 아니고 큰 도로에 줄을 매고 줄줄이 달았다. 종로에는 육의전에서 출자하여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나 높은 등붕(燈棚)을 세우고 수백 개의 등을 높고 낮게 층층이 달아 휘황찬란하게 불을 켰다. 사대문 밖도 역시 그러함에 드디어 사방 향읍에서 그것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종일관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기사를 편의상 끊어서 정리했다.)

이 시기에는 전기로 등불을 밝혔다. “구식 연화등, 사등(紗燈), 모등(牟燈), 장등(長燈)에다가 신식의 전기등 장식까지(「동아일보」, 1928년 5월 26일)” 걸렸으며 “집집마다 꽃등, 오색등을 달아 수복안녕을 축원(「매일신보」, 1929년 5월 16일)”했다고 한다. 

4월 초파일이 가장 흥성했던 개성을 묘사한 「조광지」에는 “남대문 추녀 밑으로는 백촉전등을 가설”했으며 “동서남북의 네거리에는 꽃등으로 줄을 지어 달게 한다. 양편 상가의 하늘을 뒤덮고 나란히 달린 울긋불긋한 색등”이 장관을 이뤘다고 하니, 개성의 초파일 연등회를 두고 ‘개성놀이’라 불렀던 건 지당한 일인 것 같다.

촛불을 켜고 걷던 행렬은 다양한 실험 끝에 LED 조명으로 바뀌었고, 매해 더 빛나는 조명으로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등을 내려 들던 연등회에 1998년에는 ‘기역(ㄱ)자’형 등대가 등장한다. ‘등’을 가슴 위로 드는 행렬로 바뀐 것이다. 마침내 2000년에는 두 개의 등을 달 수 있는 ‘티(T)자’형 등대로 인해 연등행렬이 가일층 화려해졌다. 어린이들이 한글등을 들고 행렬하고 있다.

 

연등회답게 하는 게 왜 ‘행렬등’일까

해방 이후 오늘날 연등행렬의 바탕이 되는 등 행렬이 처음으로 거행됐던 것은 1955년이다. 서울 조계사에서 종로3가, 을지로3가, 시청을 지나 안국동을 거쳐 조계사로 돌아오는 짧은 구간이었다. 1960년대가 되면 행렬에 “수박등 초롱등 접시등(「조선일보」, 1962년 5월 12일)”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등이 등장한다. 절에서, 집에서 다양하게 만들었던 등이 행렬 현장에 등장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도 등 만드는 풍속을 이어왔다는 증거다. 

1967년에는 연등회를 앞두고 ‘등’ 경연대회가 열렸다. 행렬등에 해당하는 작은 등에는 개인상을, 오늘날의 장엄등에 해당하는 큰 등에는 단체상이 주어졌다. 오늘날엔 정성과 독창성이 깃든 작품이 선정기준이지만 이 무렵만 해도 ‘등은 웅장하고 장엄한 새로운 형을 환영’했다. 1975년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자, 휴일을 즐길 참여자를 배려해 이듬해부터 연등행렬 출발지가 여의도 광장으로 바뀌게 된다.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장장 9km로 이어지는 연등행렬은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도로변에 등 구경 나온 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 시기 행렬등은 단체마다 모여 만든 연꽃등이나 단체로 주문한 주름등이 주종을 이뤘다. 

1996년에 비로소 연등회의 상설기구인 연등회보존위원회(당시 봉축기획단)가 발족한다. 이때부터 축제다운 축제로의 변화가 시도되었다. 행렬 구간이 여의도 광장에서 동대문 운동장으로 변모한 것 외에도 동자승 캐릭터를 등장시켜 친근감 넘치는 연등회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 참여자들의 신명을 끌어내는 일에 주력했다. 

연등행렬에는 장엄등과 행렬등이 등장한다. 장엄등은 평균 2~3m가 넘는 대형등을 가리킨다. 반면 행렬등은 연등행렬 때 참가자들이 들고 걷는 등이다. 연등회를 가장 연등회답게 만드는 건 역시 행렬등이다. 연등회보존위원회가 출범한 이후 가장 괄목할 점은 모든 등을 손수 한지등으로 제작하는 분위기 형성이다. 2000년부터 전통등 만들기 강습회가 열렸다. 강습을 받은 이들이 자신의 사찰이나 단체에서 다시 강습회를 열면서 전통등 만들기는 전국에 걸쳐 들불처럼 번져갔다. 

연등회에 더 돋보이게 참여할 방법을 찾던 참여자들의 적극성은 연등행렬을 볼거리 가득한 축제로 변화시켰다. 촛불을 켜고 걷던 행렬은 다양한 실험 끝에 LED 조명으로 바뀌었고, 매해 더 빛나는 조명으로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더 멋진 행렬을 위한 고민 속에 탄생한 것은 디자인뿐만이 아니었다. 등을 내려 들던 연등회에 1998년에는 ‘기역(ㄱ)자’형 등대가 등장한다. ‘등’을 가슴 위로 드는 행렬로 바뀐 것이다. 마침내 2000년에는 두 개의 등을 달 수 있는 ‘티(T)자’형 등대로 인해 연등행렬이 가일층 화려해졌다. 

이제 주요 사찰마다 연등공방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머리를 맞대고 연등회에 사용할 등을 고민하고, 서로 격려하며 더불어 등을 만든다. 한지 전통등을 만들면서 자신감을 얻은 참여자들은 응용에 응용을 거듭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더하면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창의성 넘치는 행렬등을 만들고 있다. 해마다 연등행렬 현장에서 대중들이 찬탄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어느덧 연등공방은 세대 전승과 공동체 문화를 이끌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

연등회보존위원회에선 1996년 전통등 연구에 뜻을 가진 젊은 작가들을 발굴, 전통등연구회를 발족했다. 이듬해부터 등 문화의 전승과 보전에 중점을 두고 전통등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 이름으로만 전하던 전통등을 꾸준히 복원해내고 있다. 1957년 북한에서 발간한 『조선공예미술연구』에 실려있던 북한의 연등 사진과 삽화에 의존해 2014년부터 북한의 전통등이 재현되기도 했다. 

2011년 이후로 전승전통등 경연대회를 열고 있다. 단절 위기에 처했던 전승전통등이 대거 출품되면서 지난 10년 사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같은 해에 종이꽃[紙花]을 잘 만드는 전문인력들이 모여서 불교지화장엄전승회를 발족했다. 정명 스님을 필두로 불교지화와 전통등의 복원과 계승 발전, 후학 양성을 위해 정진 중이다. 전통의 맥을 이으면서 오늘의 등문화를 창조하는 전문 ‘등’장인들의 배출이 기대된다. 유학의 메카 안동에서도 선비들은 집마다 등불을 달았다. 고려의 유학자 이색은 병중에도 관등놀이를 즐기기 위해 힘겹게 산을 올랐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돌아가면서 ‘등’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었고, 국경 부근의 우국지사도 초파일 연등 아래에서 잠시 시름을 달랬다. 연등회는 그런 축제다. 누구랄 것도 없이 신명나게 등축제를 만들고 즐기는 과정이 1,200년을 내려온 연등회의 정신이다. 이 정신을 온전히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정성 기울여 등을 만들고 등불을 밝히며 함께 적극적으로 즐기다 보면, 넘쳐나던 비닐등이 사라지듯 안타깝게 여기는 것들이 스러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이 변혁이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정성스레 등을 빚고, 등불을 켜서 복을 빌고 나누는 이웃들이 있는 한 연등회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연등회 연등행렬에는 늘 전통등이 선두에 선다. 연등회는 등을 직접 만들어 행렬에 나서는 이들과 등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이윤수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대학 졸업과 함께 ‘대중불교’ 기자로 출발, 여성잡지 「주부생활」을 거쳐 1990년 불교방송 개국과 함께 방송작가가 됐다. 이후 KBS에서 30년 동안 매일 프로그램을 집필했다. 2012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연등축제의 역사와 문화콘텐츠적 특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