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강의를 많이 하다보니 저절로 알아지는 것들

2021-06-18     백승권

필력과 직업의 상관관계

직장인 글쓰기 강좌의 첫 시간은 늘 수강생의 자기소개로 시작한다. 삼성이나 엘지(LG) 같은 대기업에 다니는 수강생들은 자신의 소속을 멋쩍게 밝히면서도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연구기관의 연구원들은 담담히 소속을 밝히면서 자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필자의 강의엔 특히 IT 분야 종사자가 많았는데, 이들은 회사 소개도, 업무 분야 소개도 지극히 무미건조하게 한다. 종교인이나 시민단체 간사는 자신이 하는 일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하며 자신의 일에 큰 관심을 가져달라는 얘기를 언제나 말끝에 붙인다. 변호사나 회계사 같은 전문직은 필자를 포함해 동료 수강생들을 잠재적 의뢰인이나 상담자로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직장인 글쓰기 교실이 아니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을 겪어보는 것은 강사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만 따져보면, 많은 사람이 소망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결코 앞섰다 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것과 거의 무관해 보이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도 놀라운 글솜씨를 보여주는 경우를 가끔 만나기도 한다. 그런 의외의 인물을 첫 강의 때부터 만나게 됐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고, 마른 체격에 안경을 쓰고 표정이 굳어 있는 H 차례가 됐다. 자신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처음엔 H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재차 묻고 답을 들은 뒤에야 그가 어느 빌딩의 건물관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중에 더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공업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하고 그 계통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다른 친구들은 큰 기업에 입사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건물관리 하청 회사의 비정규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H의 소개 내용을 알아차린 뒤 이런 생각이 뒤를 이었다. ‘보고서나 기획서 따위 업무용 글을 쓸 일이 없을 텐데.’ 그런 의문을 간직한 채 그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글쓰기 강의는 거의 매시간 실습을 한다. 수강생들에게 텍스트를 내주고 그것을 요약하거나 변형시켜 새로운 글을 쓰게 한다. 그리고 그 글을 사진으로 찍어 스크린에 띄운 다음 공개첨삭을 한다. 첫 시간, H는 그렇게 눈에 띄는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했다. 보고서를 써본 경험이 없는 것치고는 제법 쓴다는 정도의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강좌가 중반 과정을 지날 때쯤 H는 글을 한 편 내밀었다. 자신이 그냥 칼럼 비슷한 글을 끄적거렸는데, 한번 봐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흔쾌히 그러마고 글이 인쇄된 종이를 받아 가방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다음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 다행히 기억이 떠올라 허겁지겁 종이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무상급식과 좀비 거짓말

H의 글은 다음과 같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실린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의 칼럼에 재미있는 용어가 등장했다. ‘좀비 거짓말(Zombie Lies)’. 크루그먼은 말한다. 예를 들어 한 무리의 캐나다인들이 그들의 의료 보험 제도로 인한 문제 때문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이것을 ‘완벽한 허위’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종류의 거짓말을 좀비 거짓말—아무리 많은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곧바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이라고 표현한다.

요즈음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거짓말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다시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는 무상급식에 관한 내용이 그러하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무상급식은 재정을 파탄 내는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타당한가? 

(중략)

이처럼 증거를 제시하더라도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집단은 끊임없이 무상급식을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총을 맞아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 다가오는 좀비처럼 말이다.

앞에서 소개한 칼럼에서 폴 크루그먼은 말한다. “어떻게 하면 이 좀비들의 머리에 총을 쏠 수 있을까?” 이것을 지금의 한국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이렇다. 어떻게 하면 무상급식이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이런 종류의 거짓말들이 되살아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좀비 거짓말’이란 제목을 단 이 글을 다 읽고 난 다음 한동안 얼얼한 느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폴 크루그먼의 칼럼을 인용해 무상급식 반대 주장을 효과적으로 논파해내는 솜씨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적이 없는 〈뉴욕타임스〉의 칼럼 내용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H에게 이런 글은 당장 신문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글을 쓰게 됐느냐고, 글을 읽으며 내내 품었던 궁금증을 H에게 내보였다. H는 가끔 인터넷으로 〈뉴욕타임스〉 칼럼을 읽는다며 마침 폴 크루그먼의 ‘좀비 거짓말’이란 표현이 우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상급식 논쟁과 딱 맞아떨어지는 사례라 글을 쓰게 됐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후 H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고 강좌와는 별개로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됐다. 그는 서울에 있는 한 대형 콤플렉스의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많은 사실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건물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오랫동안 살펴보면 실제 건축허가 도면과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된다’,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부실 공사를 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다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날까 걱정된다’ 등등. 그러나 이런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은 이런 문제를 풀기엔 너무 힘없고 초라한 비정규직 직원일 뿐이라는 현실과 직면한다고 H는 힘없이 말했다. 

그러나 H는 이 문제를 알리기 위해 용기를 냈고 필자의 도움을 받아 관련 기관에 제보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만들지 못했다.

 

책 읽기로 삶이 변화할 수 있을까

H는 지난 2017년 대선 직전 필자와 저녁을 먹으며 어떤 후보에게 투표할지, 아예 투표를 포기할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그동안 민주당 쪽 후보에게 계속 표를 던졌는데 이런다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화할지, 솔직히 희망을 갖기 어렵게 됐다고 털어놨다. H의 절망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며칠 후 H는 문자를 보내왔다. 

제 삶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우리 사회가 변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이번까지만 계급 배반 투표를 하기로 했습니다. 문재인 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 돌아가신 날 서거를 발표하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서 2번에 찍었네요. 

무척 슬픈 일인데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거든요. 

크게 변화하진 않겠지만 안정되게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투표했습니다.

그 후 H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문자를 보내왔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 사드 배치, 최저임금 인상 등등.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묻어났지만 우리 사회가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행간에서 역력히 나타났다. 그동안 그는 한 번 직장을 옮겼고 강남의 한 단독 건물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영문판으로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영문이어서 너무 느리긴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회사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책을 안 읽는 것 같아서 어려운 책이지만 흥미 있는 책을 골라봤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 책 읽는 것은 돈의 구애도, 다른 사람의 눈치도 받지 않고 혼자 할 수 있으니 좋은 것 같습니다. 책 읽기가 제 삶의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줄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자기만족이겠지만 이런 자기만족도 때론 필요한 것 같네요.

H는 최근 스페인 독감을 다룬 로라 스피니의 저서 『페일 라이드(Pale Ride)』를 읽고 있다며 이 책에서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있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계급 배반 투표: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투표.

 

백승권
글쓰기 컨설팅 전문업체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로 업무용 글쓰기 강사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조계종 화쟁위원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