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을 향한 욕망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국정토

2021-06-11     이상헌
뤽 베송 감독의 2014년 개봉작 <루시(Lucy)>. 주인공 루시가 특정 약물로 인해 뇌 활용률을 100%까지 가동시키게 되면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두뇌와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요즘 들어 새롭게 자주 듣는 말이 있는데 바로 ‘불확실성’이라는 단어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유례없는 기술의 발전과 그것의 즉각적인 응용으로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화된 시장은 기술의 보급을 가속하고 위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했으며, 이로 인해 기술의 시대로 규정되는 우리 시대는 전쟁과 재난이 없는 상태에서도 불확실성이 점증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 누구에게나 분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모두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노화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인간을 어리석다고 말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욕망은 인류가 종교, 철학, 예술을 탄생시킨 이유다. 영국의 대중철학자 스티븐 케이브(Stephen Cave)는 『불멸에 관하여(Immortality)』라는 책에서 문명을 “영생을 향한 욕망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진시황을 비롯해 많은 권력자는 죽음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모두 허사였다. 많은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죽음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욕망하는 이들 역시 불멸이 인간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며, 인간의 운명은 노화와 죽음임을 인정했다. 죽음은 인간의 생물학적 운명이다. 

 

‘생물학적 한계가 운명은 아니다’

죽음이 인간의 운명임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선구자인 맥스 모어(Max More)는 트랜스휴머니즘을 ‘과학과 기술에 의해 현재 인간의 형태와 한계를 뛰어넘어 진화의 지속과 가속을 추구하는 생명의 철학’이라고 규정하고, 노화와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를 과학과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에게 노화와 죽음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고 도전 과제다. 대표적으로 오브리 드 그레이(Aubrey de Grey)와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이런 입장을 강하게 대변한다. 

드 그레이는 노화와 죽음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운명이 아니라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여긴다. 그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손상의 축적으로 노화가 발생, 생물학적 한계에 도달하면 죽음에 이른다고 보고, 그러한 손상을 지속적으로 제거함으로써 노화를 막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손상을 세포 및 분자 수준에서 수리할 수 있는 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드 그레이는 특히 유전공학과 재생의학, 나노기술 등에 기대한다. 

드 그레이는 노화와 죽음을 불가피한 것, 인간의 본성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물 종의 기술적 결함이며, 기술적인 해결책을 발견해야 하는 도전 과제로 여긴다. 우리가 몸에서 발생하는 손상을 모두 탐지할 수 있고, 또한 끊임없이 수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노화와 죽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이른바 므두셀라점(Methuselarity)에 도달했을 때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불가피한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가장 오래 산 것으로 알려졌다. 대홍수를 대비해 방주를 만든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는 969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드 그레이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므두셀라보다 더 오래, 그것도 젊음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장차 인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드 그레이는 우리가 노화와 죽음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죽음과 관련짓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종교적 혹은 철학적 경향을 언급하며 우리가 친노화(pro-aging) 최면에 걸렸다고 말한다. 이런 최면 상태의 사람들을 깨워서 인간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불로불사를 실현할 나노의학

인체를 끊임없이 수리해 불로불사를 가능케 하는 궁극의 기술은 나노의학이다. 나노기술은 약물전달 체계에 혁신을 가져오고 진단의학에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나노의학의 최종 단계는 분자 수준에서 세포를 치료하는 나노봇이다. 리차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과거 한 강연에서 ‘기계 외과의사’처럼 작동하는 ‘미세 기계’를 언급한 적이 있으며, 에릭 드렉슬러(Eric Drexler)는 『창조의 엔진』에서 모세혈관을 따라 이동하며 살아 있는 세포 속으로 들어가 치료하는 극소 기계를 이야기했다.

로버트 프레이타스(Robert Freitas)의 『나노의학』에는 적혈구보다 훨씬 효율적인 인공적혈구, 우리 몸의 면역체계보다 더 강력한 능력을 지닌 인공 대식세포, 몸속에서 직접 수술하는 수술용 나노봇 등이 언급되어 있다. 프레이타스는 “미래의 나노봇은 인간 손으로 직접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정밀하게 세포 내 수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생체와 공존하는 수술용 나노봇이 개별 암세포를 발견해서 제거하고, 미세혈관 폐색을 제거해서 혈관내피 세포를 재건하고, ‘비침습적’ 조직과 기관을 이식하고, 손상된 세포 내외부 구조를 분자 수준에서 회복하고, 살아 있는 인간 세포 내부의 낡은 염색체 전체를 새것으로 교환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다”고 예측한다. 

이 이야기는 단지 공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혈관 속에 삽입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초미세 로봇은 이미 여러 해 전에 개발됐으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질병을 탐지하고 진단해서 치료할 수 있는 나노봇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한참 전에 들렸다. 적어도 프레이타스가 예측한 것들 가운데 일부는 실현되지 않을까? 나노봇에 대한 프레이타스의 세밀한 묘사는 나노봇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키워주는 것 같다. 프레이타스에 따르면, 나노봇에는 동력원과 방향 조정이 가능한 회전날개가 달려서 인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닐 수 있다. 또한 면역거부반응을 막을 수 있도록 생체와 일치하는 막을 갖추고 있고, 약물을 전달하는 주입기, 무선통신을 위한 안테나, 분자 분류기, 약물이나 호르몬 등을 저장하는 공간, 폐기물 처리 시스템 등도 갖추고 있다. 나노 수준의 초미세 기기이지만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기계인 셈이다. 

프레이타스가 상상한 나노봇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인류는 불멸을 얻게 될 것이다. 나노봇 덕분에 고치지 못할 질병이 없게 되며, 바이러스든 세균이든 치명적인 병원체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완전한 훼손이 아니라면 신체적 손상 대부분은 손쉽게 회복될 수 있으며, 세포를 언제나 최상의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젊음과 건강을 끝없이 유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 관리를 지속하는 한 죽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노의학을 통해 그야말로 불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몸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레이 커즈와일 역시 인간의 불멸을 추구하는데, 그 방식이 드 그레이와 다르다. 커즈와일은 몸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통해 불멸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우리 몸 밖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에 우리의 마음을 업로딩(uploading) 하는 때가 되면 우리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고 불사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업로딩은 한 인간의 패턴이 컴퓨터 시스템에 전송되는 기술적 과정을 가리킨다. 마음 업로딩 된 컴퓨터는 원래의 생물학적 뇌의 정보처리 패턴들을 실제적으로 모의하기 때문에 이 컴퓨터 시스템의 모의된 마음 또한 현상학적으로 의식을 경험할 것이다. 

커즈와일은 정보의 패턴을 근본적인 실재라고 여기는 패턴주의(patternism)를 주장한다. 개인은 각자 자신의 데이터 혹은 패턴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각자의 뇌가 작동하는 알고리즘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정의하는 것은 그 사람의 패턴 구성이다. 다시 말해 뇌의 감각 시스템들과 하위 시스템들, 그 시스템들의 통합, 일반적 추론의 회로들, 주의지속 시간, 기억 등을 포괄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 존재가 이처럼 패턴의 집합이라면, 그 패턴은 복사될 수 있으므로 인간 존재 역시 복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이점 이후에 등장하는 충분히 강력한 컴퓨터에서 그 패턴이 모의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의 마음이 컴퓨터에 다운로딩(downloading) 될 수 있을 것이다. 

커즈와일의 관점에는 데이터교(dataism)가 깔려 있다. 이 용어는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2013년에 <뉴욕타임스>에 실은 칼럼에서 처음 언급했으며, 그 뒤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호모 데우스』에서 거론했다.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것이 데이터 처리 시스템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라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종은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고, 개인은 이 시스템을 이루는 칩이다. 그리고 역사는 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라리의 설명에 따르면, 데이터교는 유기체를 생화학적 알고리즘으로 보는 생명과학과 전자 알고리즘의 설계 방법을 정교화하고 있는 컴퓨터과학이 결합하면서 탄생하게 됐다. 생화학적 알고리즘과 전자 알고리즘에 정확히 똑같은 수학적 법칙들이 적용되며, 이 과정에서 동물과 기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마침내 전자 알고리즘이 생화학적 알고리즘을 해독하고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데이터교는 주장한다.  

드 그레이의 입장 역시 데이터교를 함축한다. 노화를 억제하고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손상의 축적에 관련된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탐지하는 감시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노화와 죽음은 그것에 관련된 데이터로 재해석되며, 그런 데이터에 적절히 대응하고 처리하는 것이 불로불사를 위해 필수적이다. 나이가 더 많을수록, 즉 생물학적 시간이 더 많이 경과한 사람일수록 24시간 감시에 가까운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며, 더 많은 양의 데이터 처리가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재생의학을 통해 불로불사의 존재로 재탄생한 인간은 모니터링되고 즉각적으로 처리돼야 하는 데이터의 집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불사(amrita)를 얻었다”

생로병사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나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드 그레이와 커즈와일은 노화와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사실을 불변하는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에 맞서 싸우려 한다. 하지만 붓다는 생로병사의 자연적 현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면 집이 낡아 마침내 허물어지듯이 육신도 결국 죽게 되며, 이는 생명이 있는 모든 중생에게서 똑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몸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의 수단을 인간의 몸에 직접 적용함으로써 불사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불멸에 이를 수는 없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불사(immortality)라고 말한 것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수명연장(amortality)이다. 젊음과 건강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드 그레이의 재생의학적 처치를 받은 사람이나 커즈와일이 말한 마인드 다운로딩을 한 사람의 경우에도 죽을 수 있다. 노화와 죽음에 관해 의학적으로 완전히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을 뿐이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손쓸 수 없는 사고에 의해, 혹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반면에 붓다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깨달음을 통해 무명을 극복하고 존재의 참된 본성을 터득하는 것을 가르쳤다. 붓다는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나서 “나는 불사(amrita)를 얻었다”고 외쳤다. 산스크리트어 amrita는 무사(無死) 혹은 비사(非死)로 옮기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게 됐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껏 우리가 알던 죽음, 우리가 두려워했던 죽음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죽음이 아니다. 따라서 죽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죽음을 여전히 생물학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로 접근한다. 그들은 몸을 데이터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마치 기계를 끝없이 유지 보수함으로써 원리상 기계의 수명을 가능한 한 한없이 늘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수명도 그렇게 무한정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살아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릴 수는 있어도 불멸에 이를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진정으로 불멸에 이르는 길을 말해준다. 죽음이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임을 알게 해준다. 붓다는 죽음을 한 개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주 만물의 무상함 속에서 이해한다. 무명을 극복하고 일체의 본성을 깨닫는 길만이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준다. 죽음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사윤회의 무한한 과정에 속해 있는 것이다. 완전한 소멸로서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다. 삶과 죽음은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의 결과일 뿐이며 고정된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 꾸며낸 허구다. 실상은 인과 연에 따라 나타난 찰나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끝없이 변화하며 어느 것도 한 상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와 타인도 그러하고, 생과 사 또한 마찬가지다. 무상성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과 집착, 고통과 두려움이 생긴다. 무상의 진리를 알고 나면 죽음도 두려워할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불멸에 대한 욕망도 사라질 것이다. 불멸을 추구하는 서양적 사고는 죽음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니까 말이다.  

 

이상헌
서강대 전인교육원 교수. 저서로는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이 있다. 「붓다의 시선으로 본 인공지능」,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등 논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