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의] 10.궁극의 이상세계로 나아가는 길

반야심경 강의 10

2007-09-16     김용정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심무가애 (故心無가碍) 무가애고(無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 (究竟涅槃)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얻을 바 없으므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고로 마음이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구경열반을 얻느니라. 삼세제불 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무소득의 의미를 깊이 음미함으로써 이 절의 근본 뜻을 샛길 수 있다.
무소득이란 결코 재산상의 득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득(非得) 즉 aprapti로서 제법을 결합시키지 않는 활동 다시 말해서 공성(空性)체험에 있어서 모든 존재의 비획득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티끌 하나의 존재도 머무르지 않는 개방된 공성을 암 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현재의 직관 속에서 영원을 동시에 체험하는 상태, 부연해서 말하자면 과 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선형적인 시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무소득을 의미 한다. 그것은 영원 즉 지금, 지금 즉 영원으로서의 현재 속에서 색공(色空) 공색(空色)이 직 관되는 공성체험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걸림이 없다고 하는 '무가애', 두려움 없다고 하는 '무유공포' 구경열반' '무 상등정각' 등은 모두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지금 즉 영원의 공성체험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따로 없으므로 구경에는 열반에 이른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인도인들에게 있어 니르바나라는 말은 고의 세계가 반복되는 무서운 윤회전생으로부터의 해 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윤회전생설은 불교의 독점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인도만의 것도 아니다.

일찍이 서양고대철학자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특히 피타고라스학파는 우리의 일생을 일회 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이 말한 파라다이스는 피안의 세계를 의미하는데, 전생의 이 데아의 세계에 있었던 사람이 어떤 죄업으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왔지만 빨리 이 육신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플라톤의 파이론 편에 보면 철학을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연 습 다시 말해서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훈련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여기 반야심경에서는 마음이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구경열반을 얻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대상이 없는 두려움이 다.
즉 호랑이가 무섭다든가 개가 무섭다든가 하는 대상이 있어서 두렵고 무서운 것은 실상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대상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무서운 것은 그냥 이유 없이 불안한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우리 가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아 잘 모르는데 무의식중에 항상 죽음을 의식하기 때문에 근심걱정 이 떠날 날이 없는 것이다.

집안에서도 가죽들은 서로 무슨 사고가 없기를 기원하면서 누군가가 잘못되지 않나 하고 불 안해할 때가 많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아무 사고 없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알고 보면 불안이나 두려움은 궁극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 이라는 것이 물적인 대상은 아니다. 프로이디안들은 생의 본능을 죽음의 본능이라고하여 인 간 심리의 양면성, 즉 이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은 심층의식 속에 파괴의 본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잠시라도 가만히 있으면 권태감을 느껴 어떤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 쟁은 계속되어 왔고 끊임없이 전쟁을 일삼아왔으며, 지금까지도 국지적인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처럼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남을 쓰러뜨리고 파괴하려고 하는 좋지 못한 본능 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무기미한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 중생제도의 길임을 깨달아 죽음을 극복하게 위해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부처님이 정각하신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신 내용이 비유비무의 중 도사상과 함께 고집멸도 사성제에 대한 것을 보아도 부처님과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의 한결 같은 고민이 죽음에 대한 괴로움의 극복이었음을 잘 엿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실존적 고통인 죽음은 운명적인 생의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고(苦)가 생기는 성제란 이것이다. 쾌락 과 탐을 일으켜 후유(後有), 즉 재생에로 이끄는 갈애가 그것이다. 그것은 욕(欲)의 갈애, 유 (有)의 갈애, 무유(無有)의 갈애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계속하고자 하는 갈애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말씀을 역 설한 것이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근본 괴로움에다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 로움,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 등 여덟 가지 의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을 영원한 실체라고 믿는 집착심에서 오는 것이 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고의 멸진의 성제란 이런 것이다. 즉 갈애를 남김없이 버리고 단 멸하고 떠나 이미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멸제이다. 비구들 이여, 고의 멸진에 이르는 도의 성제란 이것이다. 즉 거룩한 팔정도이다."라고 하신 초전법 륜은 한마디로 고 즉 공포에서 해탈하는 길이요, 열반적정의 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지난번에도 언급했지만 쾌락주의와 고행주 의라는 두 가지의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극단적인 현 세주의도 극단적인 현세부정주의도 다 떠난 중도로서 팔정도를 행해야 갈애의 불을 끄고 진 정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극대화하여 극단적인 탐욕과 집착으로 가득찬 왜곡된 삶 아닌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로 움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두 극단을 버리고 그러나 그 양쪽의 좋은 점은 살려 평상심으로 돌아가 무상무아의 마음으로 살 때 진정한 삶,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는 것은 과 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함으로써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먼저 삼세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에는 과거라는 시간관이 따로 있고 현지라는 시간관이, 그 리고 미래라는 시간관이 따로 있다는 방식의 시간관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 는 과거라는 것이 사실 어디에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다만 과거는 현재에 있어서 우리의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영원 의 지금이라는 말을 쓴다. 과거가 따로 있고 미래가 따로 있고 현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 라 지금이라는 현재 속에 기억과 직관과 기대가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시간을 마치 자로 재 듯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고 있다. 이것은 찰나 즉 영원이라는 말이다. 삼세는 역사적 시간에서가 아니고 무한지향이라는 독특한 인도적 사유에서 파악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면 불교의 교리는 다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삼세제불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다 영원한 지금에 있다는 그러한 삼세의 모든 부 처님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에서 무소득의 경우도 시공관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잠시 아인슈타인의 견해에 귀 기울여보자.
뉴톤의 고전물리학을 뛰어넘어 현대 물리학에 일종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결국 공간.시간론이다.

과학자 중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은 마치 불교교리를 깨달은 것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 구분 지어 부르는 시간이라는 것이 매우 고집 스러운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현대과학시대에 걸맞는 종교는 불교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들자면, 그는 모차르트 음악을 열광적으로 좋아했고 또한 인간 모차르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모차르트를 좋아한 이유는 인간 모차르트나 모차르트의 음악 속에는 유례가 없는 직관적 생동감을 줌으로써 무 아의 경지로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모차르트는 18세기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사람이지만 인 생 자체를 절대로 어떤 실체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계속>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