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꿈이 서린 곳, 종교의 탐색

특집, 인생의 보람

2007-09-16     관리자

영글어가는 오곡백과, 차오르는 대보름달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 인가를 거듭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무엇에도 비교 될 수 없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무엇 에도 물들을 수 없는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력을 지닌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과연 몇 명이나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지닌 바 무한 공덕력 을 내어 쓰며 보람을 찾아가고, 또 행복을 가꾸어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거센 물질 문명의 이기에 밀려 자신의 존재가치는 상실한 채 허둥대며 어두운 그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는 혼돈과 방황의 무질서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인간다 움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보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과연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 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두 분의 교수님께 지혜의 말씀을 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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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보람'이라... 그런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경우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좌절과 회의만큼이나 보람도 무수히 느낄 것이겠기 때문 이다. 하지만 굳이 뭉뚱그려서 말하자면, 마침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비로소 할 수 있는 그런 가치있는 일을 찾아내서는 성심껏, 그리고 힘이 들어도 재미있게 해내면서 흡족해 하는 것 이 바로 사람 사는 보람을 느낄 때가 아닌가 싶다.
명색이 서생이다 보니 여기서도 공부하는 얘기나 해야겠다. 종교를 탐색하는 학문, 종교학과 인연을 맺은 지도 이제 20년이 되어 온다. 대학 종교학과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언감생심 종교학자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저 무조건 궁금하고 재미있 고 신이 나서 종교를 탐색하는 이야기들을 읽어대고 정리하고 또 나름의 탐색도 하고 토론 도 하고 하는 세월이 쌓이다 보니, 어찌어찌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또 일련의 많은 선택의 고비들이 있었다. 그런 고비마다 우연히 선택한 길과 길이 교묘하게 이어져서 불교를 전공하는 종교학자라는 지금의 좌표에까지 이르렀고, 그 일 에서 내가 이 한 생을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우연한 선택들이었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필연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그 많 은 우연한 선택과 선택들이 곳곳에 파인 함정과 빽빽이 솟은 장애 사이의 아슬아슬하게 좁 은 길을 용케 이어왔다 싶다.
종교를 탐색한다는 것은 참으로 복잡한 일이다. 우선, 탐색은 알아보자고 하는 일인데, 종교 에 관해서 '안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한다는건지,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도대체 가 능하며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그런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가 문제가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 고 종교에 관한 한 아는 것보다는 ale는 것이 우선이라는 인식이 박혀 왔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믿는 게 중요하지'라는 얘기, '도대체 종교를 믿기전에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설령 좀 안다 해도 그게 제대로 아는 것이겠는가?' 라는 식의 견해를 지금도 우리는 많이 접한다.
한마디로, 종교는 알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믿어야지만 앎도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 종교학은 그 태동부터 여지껏 그런 앎과 믿음 사이의 긴장을 벗어나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학과 종교 사이의 긴장일 뿐만 이니라 종교학 안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 는 긴장이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는 '종교는 인간의 꿈이 서린 곳'이라고 했다.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탐색하는 발걸음은 그 인간의 꿈이 서린 곳을 밟고 들어가는 것이어서, 발을 딛기가 참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얘기였다.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겠다고 냉정한 학술적 언어의 칼날로 마구 헤집으며 속속들이 해부해 보았자 남는 것은 종교의 시체, 그것도 각 부위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일 뿐, 살아 있는 인간 의 꿈은 감지하지 못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꿈속에만 빠져 있으면 믿음의 자리 가 아니라 앎의 자리에서 종교를 되묻는다는 종교학의 기본적인 존재 의의조차 망각하는 셈 이다.
그래서 종교학은 연구 대상인 종교에서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서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그런 참으로 애매모호한,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자리에서 종교를 탐색하는 것이라고 좌표를 매기고 있다.
많은 종교학자가 그런 이중적인 좌표를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했는데, 윈스턴 킹(Winstdn L. King)이라는 학자는 그것을 "거리를 둔 내부적 입장에서(from detached-within)"라는 말 로 표현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종교라는 것에 서린 인간의 꿈을 훼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고스란히 온전하게 드러내고 감지하며 거기에 동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꿈 밖의 언어로 물음을 던지고 해명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뿐만아니라, 그 꿈에 동참해야지만 꿈 밖의 언어로 물음을 제기하고 해명을 할 수 있어야 어느 한 가지 종교의 언어에 가두어진 인간의 꿈만이 아니라 그 다양성 너머 보편의 장으로 활짝 펼친 꿈의 넓이를 가늠 할 수 있다는 뜻에서 나온 얘기겠다.
실제로 종교학은 종교의 다양성을 전제로 해서야 비로소 성립할 수 있었던 학문이다. 현대 종교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막스 뮐러(Max Muller)는 "하나만 알면 아무것도 모르는 셈" 이라는 말로 그것을 표현했다. 종교는 다양하다라고 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사실을 수용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당장에 어느 s한 종교에 자기의 꿈을 진지하게 쏟고 있는 전형적인 종교인을 떠올려 보자.
종교를 통해서 펼치는 인간의 꿈에 대해서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이들이 그저 휙 사방을 둘 러보고는 그래, 종교는 다양하잖아? 하고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그 다양성이 진 지한 종교인과 종교학자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거기에 담긴 인 간의 꿈은 각자 지극히 진지하고 심각하여 절대절명인 꿈이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보아야 감지되는 그 각 종교적인 꿈의 철저한 절대절명성과, 한편으로 한 걸음 물 러난 이격된 자리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 다양성을, 그 어느 쪽도 훼손하지 않고 인간의 길 고 길며 진지무비한 꿈의 이해에 다 담아내려고 하는 종교학은 어쩌면 끝이 있을 수 없는 과제를 스스로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종교 자체가 그저 간단히 척추동물, 그 가운데서 영장류의 하나일 뿐이라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 인간이 그 모든 주어진 조건을 넘어서 끝없이 펼치는 탐색의 꿈을 담은 것이고, 그것 을 또 끝없이 탐색하는 것이 종교학이다. 양쪽 모두 인간이기에 비로소 꿀 수 있는 꿈이다.
<기나긴 탐색(The Long Search)>이라는 기록 영화가 생각난다. 전 세계의 각종 종교를 한 하나 찾아서 거기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기나긴 꿈과 탐색을 소개하는 것인데, 그 작업 자체 가 또 하나의 기나긴 탐색이다. 그리고 그 탐색의 끝은 항상 열려 있다.
종교에서 펼치는 탐색의 끝과 종교에 대한 탐색의 끝, 양쪽이 모두 그렇다.
흔히 보람은 뜻을 세운 어떤 일이 성취되거나 잘 진행될 때 느끼는 것이지만, 끝이 안 보이 기에 오히려 보람된 그런 일도 있다.
종교를 탐색하며 나는 그런 복잡한 보람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윤원철님은 서울대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철학박사, 현재 서울대 종교학과 조교수로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